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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쟁점] 정성기 경남대 교수의 '사회구성체 논쟁 책임론'과 학계 반응
[학술쟁점] 정성기 경남대 교수의 '사회구성체 논쟁 책임론'과 학계 반응
  • 권진욱 기자
  • 승인 2002.03.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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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13 21:50:31

그 많던 지식인들은 어디로 갔는가. 1980년대 후반 한국 사회과학계를 호령하던 사회성격 논쟁 혹은 사회구성체 논쟁(이하 ‘사구체 논쟁’)은 왜 소리소문 없이 빈사하고 말았는가. 최근 사구체 논쟁에서 사회변혁의 한 축을 자임했던 교수가 한 주요일간지를 통해 ‘뒤늦은 책임론’을 펼쳐 화제가 되고 있다. 정성기 경남대 교수(경제학)가 바로 그 인물. 종속적 독점자본주의론의 입장으로 한때 논쟁에 참여했던 정 교수는 최근 ‘탈분단의 정치경제학과 사회구성’(한울 아카데미 刊)이라는 책을 펴냈다.

“조선 기사, 강조 지나쳐도 왜곡 아니다"

지난 2월 26일, ‘조선일보’에서는 ‘사구체 논쟁의 오류’와 ‘지식인의 편가르기 현상’을 문제제기하고 있는 정 교수의 기사를 실었다. “학생들에게 사회구성체 논쟁의 오류를 고백하고, 강의실 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하며 용서를 구했다”는 정 교수는 “지식인이 사회통합에 기여하기보다 앞장서서 편가르기에 나서는 요즘 현실은 사회구성체 논쟁 와중에 이미 배태됐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정 교수는 우리 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담당 기자의 강조가 실린 기사”라며, 하지만 “사회구성(체)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의 소중한 유산이며 좌파뿐 아니라 사회해체적인 자유주의와 우파 역시 겨냥하고 있는 것”이라 해명했다. 사실의 일면적인 부분만을 부각시킨 조선일보의 의도적 기획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사구체 논쟁은 1985년 중남미 종속이론의 아류에 불과하던 한국사회 분석을 비판한 ‘현대 한국사회의 성격과 발전단계에 관한 연구(1)’이라는 박현채 前 전남대 교수(경제학)의 논문이 시초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박 교수의 이론은 일제하 한국사회를 ‘식민지 반봉건사회’로 주장한 안병직 前 서울대 교수(경제학) 등의 주류 이론에 맞서 ‘종속적 자본주의’로 분석한 것이었다. 박 교수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라는 사회주의적 전망을 내놓고 안 교수가 논리적 대척선상에서 ‘중진자본주의론’이라는 자본주의적 전망을 내놓으면서 논쟁이 촉발됐다. 이어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이론적 구조’를 썼던 이병천 강원대 교수(경제학), ‘민중민주론’의 윤소영 한신대 교수(경제학), ‘주변부 자본주의론’의 정성진 경상대 교수(경제학) 등 소장 정치경제학자들이 가담해 1980년대 사회과학의 정점을 이루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국가의 강압적 지배정책 완화, 대중문화 영역의 폭발적 팽창 등 국내외적인 변환 속에서 사구체 논쟁과 정치경제학적 분석은 시민사회 논쟁과 문화담론 등에 의해 국가주의, 경제환원주의, 스탈린주의 등으로 비판받으며 논쟁의 주도권을 넘겨준 후 퇴색하고 말았다. 이는 시민사회 논쟁의 당사자들 대부분이 학계에서 대체로 지속성을 이어오고 있으며 현실정치에서도 일정한 지분을 확보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대안 제시 없이는 논쟁 가치 없다”

정 교수는 “사회구성(체)은 한국사회를 남한과 동등하게 봄으로써 북한의 존재, 분단 현실을 사상해버렸으며 당시 논쟁 당사자들은 이제 서구 이론의 수입과 추상적인 대안 제시에서 벗어나서 우리 언어로 국가, 직장, 가족과 같은 구체적 수위의 현실분석을 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하지만 정 교수 식의 ‘정리와 책임’론에 대해서 경계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는 “원론적으로 공감할 수는 있지만 사람마다 다른 정리의 방식이 있는데 특정 방향으로 가도록 제시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일축한다. 실제로 과거의 사구체 논쟁에 가담했던 학자들은 나름대로의 ‘이후 작업’을 수행중이다. 윤소영 교수의 경우 후기 알튀세 연구 및 신자유주의 비판, 정성진 교수의 경우 트로츠키주의 및 국제적 마르크스주의 연구라는 비교적 과거와 근접한 틀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이병천 교수처럼 1990년대 초반 이후 포스트마르크스주의나 비판이론, 페미니즘, 생태주의 등으로 이론적 전향을 감행한 이도 다수다. 한편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으로 약관의 나이에 논쟁의 중심에 뛰어들었던 이진경 서울대 강사의 경우와 같이 정치경제학이 아닌 프랑스철학, 문화이론 등 다른 분야로 연구 방향을 돌린 이도 있다.

박 교수의 비판에 대해, 신원을 밝히기를 거부한 한 논쟁 당사자는 “현재로서는 한 두 마디로 재단할 수 없다”고 전제한 후, “이후 누적된 새로운 연구 성과를 무시한 채 논의를 끄집어내는 것은 세인의 흥미를 제공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찾기 힘들다”고 비판했다. 류 교수 역시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에 대한 논점이 뚜렷하지 않다”고 논평했다. 또한 박 교수의 남북한 분단 현실 인식에 대한 논의는 이미 백낙청 서울대 교수(영문학)가 주장한 ‘분단체제론’의 내용과 중첩되는 사항이 많다.

“불꽃 꺼졌어도 유산 여전히 크다"

이미 ‘현대한국의 사상흐름’(당대 刊)을 출간한 윤건차 가나가와대 교수(한일사상사)는 사회구성체 논쟁이 지적 폐쇄성, 단순성을 갖고 있고 이론적 기반에 있어 주체성이 결여된 것으로 평가한다. 예를 들어 박현채 교수의 경우 오쓰카사학(大塚史學), 안병직 교수의 경우 나카무라 사토루(中村哲)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지목하고 있다.

그렇지만 현재 인문사회과학 전공자들은 사구체 논쟁을 경유한 이후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윤 교수는 ‘포스트 담론’이 주도하는 지식 동향에 대해서 “여러 사상의 흐름이 있어야 하겠지만 민족·계급의 문제를 피해갈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즉, 과거의 거대 담론은 폐기돼야 할 것이 아니라 미시적 문제와 함께 연결된 방법론을 고민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권진욱 기자 atom@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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