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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통쾌한 이야기
진짜로 통쾌한 이야기
  • 교수신문
  • 승인 2009.06.01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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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를 후렴으로 하는 이야기(논어)도 있고,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를 후렴으로 하는 이야기(안톤 시낙)도 있지만,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를 후렴으로 하는 이야기도 있다. 어떤 이야기건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꺼낼 때에는 조심하는 것이 좋다. 이런 이야기들은 말하는 사람의 사람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하는 이야기는 특히 그러한 듯하다. 통쾌함을 느끼는 것은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때에 자유로움을 느끼는가 하는 것이야말로 당사자의 사람됨에 달려 있지 않겠는가.

필자는 언젠가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하는 이야기에 관해 묻는 고등학교 동창생의 전화를 받고 기억나는 대로 답해준 적이 있다. 그 이야기로 유명한 사람은 明末淸初에 살았던 김성탄이라는 사람인데, 그의 통쾌한 이야기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실려 있다. 제1화: 친구가 놀러 왔다. 친구와 나는 같이 잘 놀고 잘 먹었다. 날은 어두워지고 돌아갈 때가 됐건만, 오늘따라 이 친구, 일어서지를 않고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듯 자꾸 내 눈치를 살핀다. 나는 씩 웃으면서 ‘얼마 필요한데?’라고 묻는다. 이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필자가 기억해내어 동창생에게 이야기해준 것은 대체로 이러한 것들이다. 제2화: 친구가 놀러 왔다. 집에는 술 받아 올 돈이 없는 것 같다. 내가 아내에게, 이럴 때 소동파의 아내라면 비녀를 팔아 술을 사올 것이라고 말하자, 아내는 비녀를 뽑아든 채 술 주전자를 들고 문을 나선다. 이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제3화: 아침에 일어나니 어딘가에서 곡소리가 들린다. 구슬프고 처량하다. 아내에게 물어 보았더니 이웃집 구두쇠가 죽었다고 한다. 아! 그 노랑이 영감탱이었구만. 이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동창생은 대단히 만족해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 동창생은 동창회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그러한 처지 때문이었는지 김성탄의 처신에 크게 공감을 하는 눈치였다. 필자 역시 김성탄의 이야기로부터 통쾌함과 공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러한 필자의 기분에는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것이 섞여 있었다.

어느 여름날 필자의 대학교 은사님의 연구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학생이 선생님을 칭송하는 말을 했다. 영문과에는, 돈 같은 것에는 완전히 무관심한 채 공부에만 전념하는 교수님이 한 분 계십니다. 월급을 봉투째 잃어버린 적이 있는데 그때에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집중해 독서를 해내시더랍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영문과의 그 교수님 같으십니다. 이 말을 듣고 선생님이 대꾸하셨다. 뭐라꼬요? 내가 그 분 같다꼬요? 나는 월급봉투 잃어버리면 완전히 미쳐뻐립니다, 미쳐뻐려. 모두들 한참이나 통쾌하게 웃었다.

이러한 필자의 이야기도 통쾌한 이야기이되, 김성탄의 통쾌한 이야기와는 차이가 있는 듯 보인다. 두 이야기는 어떻게 다를까? 선생님을 칭송한 그 학생은 사학과 출신이었으니 김성탄을 잘 알고 있었을 테고, 그런 만큼 영문과 교수 이야기를 꺼낼 것이 아니라 김성탄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었다. 즉, 선생님은 ‘얼마 필요한데?’라고 물어준 김성탄을 많이 닮으셨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코믹한 대꾸로써 이러한 칭송을 사양했던 것이다. 선생님은 자기 자신을 그리되, 김성탄이 자기 자신을 그리는 것과 정반대가 되게 그린 적이 많다. 김성탄은 비녀 팔아 술 받아 오라고 호탕하게 큰소리쳐 우리를 통쾌하게 만들지만, 선생님은 이른바 공처가로서의 애환을 털어놓아 우리를 또 한참이나 통쾌하게 웃게 만든다.

그러니까 김성탄의 이야기에 숨어 있는 석연치 않은 무엇은, 우선, 김성탄의 이야기를 김성탄 자신이 한다는 데에 기인하는 것 같다. 요컨대 그는, 나는 통쾌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 선생님은, 나는 통쾌한 사람이기는커녕 한심한 좀팽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며, 그러한 주장을 통하여 사람들을 통쾌하게 만드는 것이다. 김성탄의 이야기를 남이 대신 해준다면 훨씬 낫겠지만, 그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비교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통쾌함은 역시 꽉 움켜쥐고 있던 것을 탁 놓아버릴 때 느끼는 자유로운 느낌이다. 김성탄의 통쾌한 이야기에 (아마도) 돈을 탁 놓아버린 사람이 나온다면, 필자의 통쾌한 이야기에는 자기 자신을 탁 놓아버린 사람이 나온다.

김성탄을 변호하고 싶은 사람들, 필자의 이 이야기를 통쾌하기는커녕 좀스러운 이야기라고 비하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창회장 자리를 비롯하여 長 자리라고는 생전에 앉아 보지 못한 사람들, 만년 평회원으로 지내다가 서너 명이 겸직을 하게 돼 있는 동창회 부회장 자리에나 용케 한 번 앉아 볼까 말까 한 사람들은 지금의 이 주장에 공감할 것이며, 필자의 은사님이 등장하는 통쾌한 이야기를 듣고서야 흔쾌히 통쾌감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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