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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복사 교재와 ‘네이버’ 지식의 범람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복사 교재와 ‘네이버’ 지식의 범람
  • 김혜경 서평위원 / 전북대·사회학과
  • 승인 2009.04.06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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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던 책을 구해도 좋습니다. 꼭 새 책을 사지 않아도 돼요. 근데 복사는 안 됩니다.” 매 학기 초마다 학생들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그러나 학기가 얼마쯤 지나서 학생들의 책상 사이를 돌아다니다 보면 여지없이 절반 이상은 복사 제본한 책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학기가 끝날 무렵 여기 저기 강의실들에는 기말고사를 끝낸 학생들이 ‘버리고’ 간 복사교재의 잔해들이 여기 저기 떠있기도 하다. 이전에 서울에서 시간강사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잘 보지 못하던 현상이라, 그것이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지방대학의 사정과 더욱 맞물려 있는 현상인지, 아니면 정보 과잉시대 학생들의 책에 대한 일반적 태도가 변화한 결과인지는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아무튼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전에 수업 중 교수님들이 소개해주는 책들은 교재성이긴 해도 그 분야의 초짜인 학생들에게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유의미한 책으로 이해됐던 것 같다. 그래서 시험을 대비해서이기도 했지만 밑줄치고 읽기도 하고, 메모도 해가면서 사고의 흔적을 남기는 자료가 돼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80-90년대를 통해 대학원을 다니면서 이제 책이란 교수님이 알려주시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찾아내야 하는 대상이 됐고, 그런 점에서 가족ㆍ젠더 영역을 전공하는 필자에게는 여성주의를 지원하는 환경을 갖춘 이화대학교의 도서관은 지식의 요람이 돼주었다. 복잡한 인간관계와 일상사에서 놓여나 혼자 즐길 수 있는 도서관과 그곳의 책들은 당시 내겐 일종의 ‘해방구’와 같은 구실을 해주었던 것 같다.

익숙해진 도서이용 패턴이 변화한 것은 그간의 습관화된 장소와 멀리 떨어진 대학에 취업하고 나서이며, 또 가장 아쉽게 느꼈던 점이 도서관 문제였다. 도서관 이용이 줄어들면서 이제 직접 서가를 뒤지면서 자료들을 훑어보는 가운데 나의 문제의식과 닿아있는 책을 찾아내는 것과 같은 ‘발견의 기쁨’은 사라지게 됐다. 대신 꼭 집어서 구입할 책의 리스트를 들고 인터넷 서점을 통해 책을 구하곤 한다. 혹은 웹상에서 피디에프 형태로 확인할 수 있는 논문들을 찾아보다가 필요한 논문들을 열 대편씩 좍 출력해서 기능적으로 읽어버리게 됐다. 그러니 아무래도 사상적인 측면은 약해지고, 도구적으로 정보를 열람하는 수준으로 떨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의 책읽기가 도구화된 것 이상으로 학생들의 책 이용방식은 천양지차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교재 복사는 차치하고라도 수업 중 발표에서도 단행본을 활용하는 사례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긴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얻을 수 있는 책의 지식보다, 짧은 시간에 훨씬 풍부하고 생생한 정보를 인터넷과 ‘네이버’ 지식을 통해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창의적이지 못한 복사 문화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실제로 학생들은 간략하게 요점만 압축된 ‘네이버’ 지식을 통해서 많은 것을 학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문자정보보다 이미지, 영상자료가 갖는 효과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필자 스스로도 내가 하는 이론 설명보다, 적절한 이미지와 영상을 가지고 토론거리를 만들어 오는 학생들의 발표가 더 훌륭한 수업이 됐던 경험이 여러 차례 있다. 여러 가지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지식인들의 독점적인 권력을 해체하는 효과도 있는 인터넷의 정보문화를 외면할 수는 없을진대, 이제 교수들은 책을 통한 지식의 생산과 재생산의 역할은 물론, 인터넷 정보와도 겨뤄 결코 밀리지 않을 효율적인 전달력까지를 요구받고 있으니, 그 내공과 숙제의 부담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김혜경 서평위원 / 전북대·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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