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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번역가의 겸손 혹은 소명의식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번역가의 겸손 혹은 소명의식
  • 이현우 서평위원 서울대 강사·노문학
  • 승인 2009.03.30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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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손에 든 책은 『번역, 권력, 전복』(동인, 2008)이다. 책은 여타의 번역서에서 흔히 읽을 수 있는 딱딱한 문장들로 구성돼 있었다.
물론 딱딱하다는 게 흠이 될 수는 없지만, 경험상 이런 경우에 사소한 오류들도 동반하기 마련이다.
가령 리오타르의 ‘Grand Recits’는 ‘메타서사’라고 옮겼는데, 흔히 ‘거대서사’(혹은 ‘큰 이야기’)라 옮겨지는 표현이다. ‘xenophobia and racism’도 ‘배타주의와 민족 우월감’으로 ‘의역’했는데, ‘외국인 혐오증과 인종주의’란 ‘직역’을 왜 기피했는지는 의문이다. 이런 정도야 의견 차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정작 흥미로운 오역은 따로 있었다. 번역상의 어려움을 야기하는 문제들을 언급하면서 저자는 “때때로 어떤 공백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은 다른 문화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또 어떤 것은 매우 다른 의미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란 지적을 한다. 같은 의미를 담은 대응어가 없거나 마땅하지 않은 경우를 가리키겠다. 원천언어(출발어)와 목표언어(도착어)를 저울에 올려놓았을 때 한쪽으로 기우는 경우다.

그러한 지적을 보충하기 위해 저자는 “에스키모인의 ‘횃불의 신’은 잘 알려진 예이다”라고 덧붙였다.
무슨 말인가. 원문을 찾아보니 이렇다. “thus, the well-known example of 'Lamb of God' in the case of the Eskimos.” 여기서 ‘Lamb of God’이 어떻게 ‘횃불의 신’이란 뜻이 되는지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깨닫게 된 건 번역과정에서 두 단계의 치환이 있었으리라는 점. 먼저 역자는 ‘Lamb of God(하느님의 어린양)’을 ‘Lamp of God(신의 횃불)’로 잘못 보았고, 이어서 ‘God of Lamp(횃불의 신)’라고 어순을 뒤집어 읽지 않았을까. 극지방에 사는 에스키모인들이 ‘양’이란 동물을 구경해봤을 리 없다. 따라서 번역어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고, 유목민족의 표현인 ‘하느님의 어린양’을 이해하기도 난감했을 것이다(그런 경우엔 ‘하느님의 물개’라고 옮겨야 할까). 이것이 문화적 차이와 그 ‘공백’이 낳는 문제이고 에스키모인의 언어로 ‘하느님의 어린양’을 번역해야 하는 상황의 곤경이다.

결과적으로 ‘횃불의 신’이란 번역은 ‘잘 알려진 예’를 잘못 옮긴 예가 됐다. 흥미로운 것은 저자의 글이 번역가의 역할과 함께 번역에서의 조작 문제도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언어를 조작하는 데에 따른 결과와 번역이 가져다 줄 수 있는 힘의 남용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번역이 가져다 줄 수 있는 힘’이란 실상 번역과정에서 행사되는 ‘번역가의 힘’이다.
번역가는 단어를 선택하고 배치하고 또 추가하고 생략하면서 자신의 힘을 행사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또 다른 ‘저자’이며 ‘신’이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본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지만, ‘횃불의 신’이란 오역 덕분에 상기하게 되는 신은 프로메테우스다.

번역가는 인간(독자)에게 횃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와 닮지 않았는가. 번역의 목적이 ‘소통과 나눔’이라고 할 때, 그것의 절반(소통)은헤르메스의 일이며, 나머지 절반(나눔)은 프로메테우스의 일이다. 나는 헤르메스-번역가들의 겸손을 존중하며, 프로메테우스-번역가들의 소명의식을 존경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러한 신적인 힘과 의지의 오용이나 남용을 경계할 필요도 있지 않나 싶다. 헤르메스-번역가들의 겸손이 혹
자신의 책임에 대한 방기는 아닌지, 프로메테우스-번역가들의 소명의식이 혹 도취적 자기만족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염려되기도 하는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우리가 읽는 책의 태반이 번역서이거늘!

이현우 서평위원 서울대 강사·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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