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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걸인의 철학’시대와 인문학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걸인의 철학’시대와 인문학
  • 교수신문
  • 승인 2009.02.23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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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경제위기가 왔다. 실업자들과 신용불량자들이 쏟아지고 있다고 한다. 곧 졸업식인데 수많은 제자들이 변변한 직장 없이 사회로 나가는 것을 우울해 하는 교수들이 많다. 이럴 때, 그러나 나는 한가하게도 ‘인문학의 위기’를 걱정하고 있다. 나라 전체, 아니 세계 전체의 경제가 위기를 겪고 있는데, 그렇지 않아도 위기에 빠져 있던 인문학에겐 설 자리가 아예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싶다. 얼마 전 주로 인문학 서적을 내는 출판사를 경영하는 친구를 만났을 때, 경제 위기는 언제나 사회의 약자들부터 그리고 출판ㆍ문화계부터 덮치기 마련이라며 걱정하는 소리를 들었다. 잘 안 팔리는 인문학 책들만 내는 그 친구 입장에서는 너무도 절실한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머지않아 인문학의 죽음을 위로하는 조종의 마지막 울림을 듣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볼 때 지난 97년의 외환위기 또한 하나의 커다란 문화사적 사건이 아니었을까 한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에서다.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성공적이었던 우리 근대화 과정을 지배했던 사회적 철학은 한 마디로 ‘걸인의 철학’(백낙청)이었다. 이 철학의 핵심 명제는 ‘먹고 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철학에 따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는 것만이 제일 중요한 것이기에, 그 철학을 ‘모유 이데올로기’로 학습한 이 땅의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죽도록 일해야 하는 역설을 당연하게만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우리나라는 지금 누리는 물질적 부의 토대를 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전까지는 인문주의적 문화의 뿌리가 뽑히지는 않았었다. 사람들은 ‘낭만’을 노래했고, 철학 책을 읽고 토론했으며, 밤새워 소설의 이야기를 따라가곤 했었다. 그러나 생존의 위기가 닥치자 그 모든 것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어느새 걸인의 철학이 완전하고 궁극적인 승리를 선언한 것이다. 한 때는 권위주의 국가가 나서 ‘잘 살아 보세’의 욕망을 퍼트리려고 온갖 억지를 부리곤 했었지만, 이제는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부자 되세요’를 너나없이 외치게 됐다. 부끄러움이 사라졌다. 부동산 투기는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죄악이 아니라 훈장이 됐다.

 사람이 사라졌다. 집값이 떨어질 거라며 장애인 시설을 거부하는 님비가 너무도 당당한 권리 찾기 운동이 돼버린 세상이다. 그리고 벌거벗은 욕망의 전일적 지배와 함께 ‘한갓된 삶’이 아니라 ‘잘 사는 삶’이 문제라던 저 소크라테스적 구분, 내가 볼 때 모든 인문학적 물음의 근원이라 할 만한 그 구분은 이 땅에서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다. 한 마디로 인문학을 위한 문화적 토대 자체가 결정적으로 붕괴되고 만 것이다.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이 우리나라의 사례까지 들어가며 『근대문학의 종언』을 이야기했을 때, 그도 내가 지금 문제 삼고 있는 사태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더러 문학 쪽에서 그의 테제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가 말하는 근대문학을 인문학 또는 인문정신 전반으로 등치시켜 놓고 보면, 우리의 고뇌는 훨씬 넓은 차원과 연관돼야 할 듯싶다. 어쨌든 인문학의 종언이라는 이 엄청난 진실이 어떤 비가역적인 역사철학적 ‘진리’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램뿐이다.

다시 경제 위기가 왔다. 우리나라 직장인 80 퍼센트가 생존을 위해 비굴한 행동들을 한 경험이 있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살기 위해 ‘영혼’을 내팽개칠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인문학이 설 자리는 없다. 이번 경제 위기는 또 어떤 문화적 변동을 낳을지 큰 걱정이다. 모든 사회성원의 ‘노예화’는 아닐까. 이런 종류의 묵시록을 떨쳐버리게 하는 것은 언제나 자유를 향한 열망과 의지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인문학은 또 ‘자유인’의 학문이었다. 새로운 자유인 모델 제시, 인문학의 운명은 바로 그 성공여부에 달려 있다.

장은주 서평위원 / 영산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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