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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담론과 수평주의적 사고 실험의 가능성
동아시아 담론과 수평주의적 사고 실험의 가능성
  • 고성빈 제주대·정치학
  • 승인 2009.02.23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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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교차로에서 탈제국을 꿈꾸다』백영서·최원식 외 지음┃창비│2008│349쪽

  동아시아담론은 중심부와 주변부 사고의 양대 조류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은 지역의 중심부(중국과 일본)가 동아시아를 인식하는 경향과 주변부(한국과 아세안)가 동아시아를 인식하는 경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중심부의 동아시아주의는 동아시아 주변부에서도 존재하는 사상적 자원들을 “동아시아의 원리”로 내재화 하려는 노력을 경시한 체, 서구와의 관계성의 맥락에서만 동아시아를 규정하면서 자국이 동아시아의 대표라고 하는 독점적 동아시아사고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 즉, 중국과 일본의 중심주의는 서구에 대한 저항에서 동아시아가 생성된 주요한 동기였다고 규정함으로써 지역 내에서의 중심부에 대한 주변부의 저항을 희석시킴으로써 주변부에서도 있었던 저항의식과 근대화에 대한 각성을 경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논리에 의하면 서구만을 상대역으로 쳐다보면서 그에 대한 저항을 목적으로 하는 중심주의적 동아시아사고만 존중받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주변부 동아시아를 곁눈질하는 방법으로서는 편향적인 수준의 동아시아사고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책의 구성에 참여한 주변부 지식인들은 중심부의 독점적 동아시아사고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주변부에서도 존재하는 동아시아의 사상적 자원을 탐색하려는 여정을 수행하고 있다. “제국의 교차로”라고 명명된 주변부의 저항을 상징하고 있는 세 도시-오끼나와, 호찌민, 타이뻬이-는 세계의 중심부인 유럽과 미국, 또한 지역중심인 중국, 일본과 별로 좋지 않은 역사기억과 경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토론자들은 제국주의와 국민국가주의를 탈피한다는 의미로 국가보다도 도시를 방문지로 내세우고 있다.

   독립왕국이었다가 메이지 일본제국에 합병당한 후에, 다시 미국이라는 거대제국의 군대가 점령했다가 일본에 반환된 곳. 그러나 미군의 주둔은 여전하고 일본본토로부터의 차별도 여전하다. 이렇듯 오끼나와는 동아시아주변부가 흔히 겪고 있는 세계의 중심과 지역의 중심에 대한 중층적 저항을 상징하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중국, 서구, 미국의 침략에 대한 투쟁의 역사를 펼치면서 자주적으로 독립을 쟁취한 후, 충만한 정신적 자부심으로 물질적 궁핍과 마지막 전투를 치르고 있는 호찌민. 중국본토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가 다시 본토에 대항하려는 국민당정권의 전진기지로 흡수당하면서 공산당과 국민당 양대 대국주의지향의 틈바구니에서 고통을 받았고 이제는 중국본토귀속에의 압력으로 자신의 독립의지가 풍전등화 상태에 있는 타이뻬이. 이들 모두가 주변부의 중층적 “저항정신”을 체현하고 있지만 우승열패(優勝劣敗)의 신화에 사로잡혀 있는 국민국가주의의 틀 안에서 보다도 동아시아차원에서의 문제해결을 원하고 있다는 면에서 탈국민국가, 탈제국을 표방하는 동아시아주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 현실을 토론참여자들은 공감한다. 


   이들이 동의하는 것은 저항에너지로써 국민국가주의의 폭력보다는 화해와 관용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여정에서 지향하는 사고는 중심부를 타자로 규정하고 대결을 추구하는 게 아닌 주변부와 중심부와의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즉, “다름을 존중하고 일치를 모색”하는 사고에서 오끼나와 지식인인 아사또 에이꼬는 오끼나와가 체현하고 있는 중층적 저항과 국민국가주의의 불확실한 현실화문제를 의식하면서 동아시아 국가 간의 아닌 지역 간, 시민들 간의 교류를 제시한다.(117면) 타까자또 스즈요도 동아시아네트워크를 통해 얻은 정보를 가지고 함께 사는 평등한 사회,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사회를 추구해야 한다는 탈국민국가주의적 희망을 피력한다.(119면) 쳔팡밍은 동아시아에서 주변화 된 타이완의 내부가 지금 중국본토의 민족주의공격에 직면해 통일과 독립이 대치하는 소용돌이 상태에 빠져 있다고 진단(289면)하면서, 타이완에 가해진 수차례의 식민지배의 피해, 즉 스페인에서 국민당까지의 타자들의 지배에서 당한 피해를 극복할 수 있는 “혜택”으로 어떻게 전환시켜 내느냐 하는 것이 타이완이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역설하고 있다.(231면) 호찌민에서도 이러한 관용과 화해의 정서는 특별한 게 아니다. 그들이 누리는 자유가 일면 엄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오랜 저항에서 얻은 결과이기 때문이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그러한 저항으로 내면에 원한을 쌓아 놓기 보다는 관대함과 유연함으로 과거의 압제자를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131-133면) 과거의 적국이었던 미국에 대해 먼저 관계정상화를 위해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 그에 대해 오랫동안 “금수조치”로 응답했던 미국이라는 제국의 오만함(138면)에서 주변주의와 중심주의 사이에 넘기 힘든 골짜기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과거 그들에게 가해졌던 제국의 폭력에 대한 여유 있는 관용정신에서 베트남은 주변이지만 중심에 못지않은 저력을 보여 주고 있다. 주변주의적 사고를 표방하는 한국의 지식인들은 미 제국에 봉사했던 베트남전에서의 국가역할을 반성하면서 베트남의 관용을 주변부 동아시아의 원리로 받아들여야 하는 부담을 기꺼이 져야만 한다. 과거에 중국, 일본제국의 틈에서, 현재는 미국의 동아시아패권의 교두보로서 끊임없이 주변부로서의 저항과 문제의식을 다져온 한국이 지역중심과 주변사이에서 중재역할을 자임하는 것과 같이, 베트남의 탈제국의 경험도 마찬 가지로 중심부와 ASEAN 사이에서 중재역할의 자산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저항의 역사를 거친 후에 오히려 제국들에 대해 관용을 가지게 된 베트남의 경험은 중심부에게는 과거에 대한 성찰을, 주변부에게는 미래에 대한 영감을 불어넣기에 충분하다. 

   이렇게 저항에너지를 발전과 관용의 원동력으로 전화시키고 있는 세 도시에서 방문자들이 찾은 것은 주변부 동아시아사고의 씨앗일 것이다. 즉, 동아시아의 원리인 “저항”과 “관용”이며 거기에 “수평주의”를 접목시켜야 한다. 주변부는 중심부사고의 저변에 깔려 있는 정서 즉, 서구에 대항키 위해 주변부를 포섭해 대표하려는 중심주의와는 다른 수평주의사고를 공유하고 있다. 이들의 여정은 동아시아지역에서의 수평주의적 사고를 실험하고 확산시키려는 시도에서 나왔다. 주변부 동아시아담론에서의 “수평주의”적 사고의 함의는 단순히 지역 국가 간 힘의 불균형 상태를 무시한 기계적 평등상태를 추구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는 중심국, 주변국을 망라해 국가 간의 차별성-문화적, 경제적, 정치적인 측면-을 인정하되 상호인식과 관계에서 그 차별성을 위계화하거나 절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지적, 문화적 차별성을 다원성으로 받아들이면서 중심부의 주변부에 대한 동아시아내부의 오리엔탈리즘적 사고와 주변부의 중심부에 대한 옥시덴탈리즘적 사고 모두를 초탈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사고에서는 근대의 국민국가주의와 대국주의를 탈피한다는 의미까지도 중층적으로 포함돼 있다. 이 같은 사고를 더 확장시켜 유추해 보면 동아시아지역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와 더불어 세계중심인 미국도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에 대한 수직주의적 사고(위계주의)를 벗어나 서구 중소규모국가들을 대하듯 수평주의를 배양해야 한다. 


  

 한편, 지식인들은 호찌민에서 보았던 자부심어린 관용이 오끼나와, 타이뻬이에서는 체념적 정서와 혼합돼 있다는 것을 볼 수밖에 없다. 양자의 제국의 압제에 대한 저항과 관용은 그 결말이 불투명하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사고가 이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방문자들은 대답해야 한다. 그들을 위로하고 동정만을 해야 할 것은 아니다. 오끼나와의 “자치문제”(38-52면), 타이뻬이의 “국가와 비국가간의 중간”(252면)에 놓인 존재인식의 문제는 모두 동아시아의 “다양성”원리를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미처 언급치 못한 것은 주변부 지식인 연대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변부의 다양성을 확인하고 중심부에게 이것을 각성시키는 일이다. 구체적으로, 이 경우에 다양성의 함의는 이들이 제국의 합병에 저항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반드시 국민국가형태가 아니더라도 다른 형태의 존재방식과 공간을 확보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즉, 동아시아내부 제국의 변두리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면서도 탈제국, 탈국민국가주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어떤 유연한 방식을 확보 할 수 있는가 하는 이론화 작업이 이 책에서는 다루지 않은 주제인가 싶다. 

   이들의 여정에서 이론화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으나 이러한 문제점을 의식했음인지 백영서는 한국인과 오끼나와인의 차이, 제국 혹은 근대가 만들어낸 위계질서 안에서 각자가 처한 다른 위치를 연대운동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 대화를 나누자고 제안하고 있다.(106면) 이와 같은 다름을 지적하면서 그것으로 인한 공동체의 어려움도 언급한다.(195면) 여기에 다시 그는 우선적으로 “인식공동체”를 구상하자는 제의를 하고 있다.(233면) 중국과 일본의 공동체의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의식에 대한 우려도 이미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여기에 한국과 같은 주변부가 주도하는 “주변적 지성의 결집”의 당위성과 소통의 필요성이 존재한다고 역설한다.(250-255면)

   이렇게 세 도시 이야기에는 희망과 아쉬움이 동시에 교차하고 있다. 이는 이 책이 주변주의를 확립하기 위한 출발점이지 귀착점은 아니라는 면에서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는 주변부의 시각과 운동은 있으되 실천을 위한 이론화작업의 결실로서의 “주변주의”가 아직 명확히 보이진 않고 있다. 즉, 주변부 동아시아인식을 추출한 후에 생성된 “저항, 관용, 수평주의, 다양성”이라는 네 가지 개념을 “동아시아의 원리”로 삼아 실천을 지향하기 위한 이론화작업을 시도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이러한 주변부의 사상적 자원을 눈앞에 둔 채로 그것을 이론화하려는 시도보다도 단순히 캠페인적 차원에서만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를 제시하면서 아시아를 방법으로 서구문화를 “되감기”하면서 서구의 것을 더욱 보편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竹內好, 1966: 420). 그가 말하는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는 여기서 “아시아의 원리”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아시아의 원리가 중심부보다는 주변부에 더 존재한다는 것을 일본중심주의에 경도됐던 그는 파악하지 못했다. 주변부의 문제의식으로써 중심부를 “되감기”하면서 탈제국, 탈국민국가로 가는 길을 개척할 수 있지 않을까. 주변부의 저항정신과 관용, 수평주의, 다양성을 동아시아 주변주의적 원리로 삼아 중심부와의 소통을 확대하면서 구체적 실천을 지향하는 이론화작업을 할 수는 없을까. 이러한 의문이 남는 것으로 보아서 주변부 지식인들의 여정은 아직 멈추기에는 때가 이른 것 같다.

 

고성빈 제주대·정치학

필자는 런던대에서 중국의 지식인 연구로 정치학 박사를 취득했다. '한국과 중국의 동아시아 담론 : 상호연관성과 쟁점의 비교 및 평가' 등의 논문이 있다. 현재는 동아시아 지성사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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