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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과 오해를 넘어서]낡은 논쟁 대신 새로운 앎이 필요하다
[비판과 오해를 넘어서]낡은 논쟁 대신 새로운 앎이 필요하다
  • 전중환 이화여대 강사·진화심리학
  • 승인 2008.11.24 13: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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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논쟁이 벌써 삼십 년도 더 지난 일이군요. 1975년에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이 출간되면서 전 세계 지성계가 극심한 사회생물학 논쟁에 빠져들었으니까요. 올빼미 부부의 자식 돌보기처럼,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사회적 행동을 진화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 사회생물학입니다. 스티븐 제이 굴드와 리처드 르원틴 같은 비판자들은 사회생물학이 과학적으로 그릇될 뿐만 아니라 대중을 호도하려는 ‘나쁜 과학’이자 반동 이데올로기라고 공격했지요. 당시 사회생물학에 퍼부어진 비판들이 과연 정당했는지 시간의 도움을 빌려 되짚어 보겠습니다.

우선 사회생물학은 극단적인 유전자 결정론이자 환원주의라는 비판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이기적 유전자가 만든 고정불변한 형질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유 의지를 부정하고 현 사회의 불평등을 과학적으로 정당화한다는 거죠. 그런데 어떤 형질이든지 유전자와 환경의 복잡한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생물학자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빈 서판』을 쓴 인지과학자 스티븐 핀커는 극단적인 유전자 결정론자로 매도된 과학자들이 실은 유전자와 환경이 똑같이 중요함을 역설한 사례들을 『빈 서판』 첫머리부터 길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회생물학자들이 유전자만 중시할 뿐 문화나 양육방식 같은 외부 환경에 의해 행동이 변할 가능성은 무시한다는 오해는 어떻게 생긴 걸까요. 도킨스가 『확장된 표현형』에서 지적했듯이, 비판자들은 수많은 세대에 걸쳐 일어나는 진화를 보는 관점인 유전자 선택론(gene selectionism)과 한 세대 동안 개체가 발달하는 과정을 보는 관점인 유전자 결정론(genetic determinism)을 혼동했습니다.

사회생물학자들은 “암컷으로 하여금 수컷의 긴 꼬리를 선호하게 만드는 유전자…”같은 식으로 특정한 행동을 ‘지정하는’유전자를 임의로 가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그들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 즉 대립유전자들의 차별적 성공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형질 B가 자연선택 됐다는 말은 기존의 형질 A를 지정하는 유전자들 사이에 형질 B를 지정하는 유전자가 출현해 개체군내에 더 잘 전파돼 오늘날에는 B가 득세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공격성이나 사랑, 혐오감 같은 형질들이 과연 자연선택이 만든 적응인지 궁금하다면 당연히 그 형질들의 유전적 토대를 먼저 가정해야지요.

사회생물학이 각 인간의 행동을 오직 생물학으로만 환원시켜 설명한다는 비판은 어떨까요. 어찌 된 영문인지 토론 중에 튀어나오는 “그거 환원주의적인데”라는 말은 “그거 유영철보다 더 흉악하고 위험해”라는 말과 동의어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의도 의사당에도 나쁜 국회의원과 좋은 국회의원이 있듯이, 환원주의에도 ‘나쁜 환원주의’와 ‘좋은 환원주의’가 있습니다.

나쁜 환원주의자는 무슨 현상이든지 그를 구성하는 최소 근본단위로 내려가서 그 수준으로만 설명해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쿼크 입자가 미국의 금융위기에 끼친 영향’ 같은 연구를 할 법한 이런 과학자는 실제로 없습니다. 좋은 환원주의자는 어떤 현상을 설명하고자 그 부분들의 특성과 상호작용에 주목합니다. 생물학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는 모든 자연과학이이처럼 건전한 환원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환원주의가 아닌 과학을 찾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지요.
한편, 사회생물학은 유기체의 모든 특질들이 자연선택에 의해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게끔 만들어졌다고 보는 적응만능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판받았습니다.

흥미롭게도, 적응과 부산물을 잘 구별해야 한다는 이러한 경고는 사회생물학의 학문적 토대를 놓은 조지 윌리엄스의 1966년 저서 『적응과 자연선택』에서 처음 유래했습니다. 진화생물학자들은 모든 형질이 자연선택의 산물이라고 강변하지 않습니다. 대단히 복잡하고 정교해서 누군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적응적 형질이 자연선택의 산물이라고 주장할 뿐입니다.

사회생물학자들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체제를 이념적으로 옹호하려 했다는 비판은 이제 저절로 무너지게 됩니다. 최근 국내에 번역된 『현대 생물학의 사회적 의미』의 저자 하워드 케이조차 동의하듯이, 사회생물학에 가해진 비판들은 “지나치게 가혹하고 감정적”이었으며 “별다른  깊이있는 분석도 제시하지 못했으며 사회생물학을 사회다윈주의와 나치 인종과학과 한통속으로 묶은 단순한 급진주의를(159쪽)” 드러냈습니다. 사실 윌슨은 현 체제의 옹호와는 거리가 먼, 정치적으로 순진한 과학자였습니다. 정말로 과학을 정치에 끌어들여 마르크스주의 생물학의 필요성을 부르짖은 이는 로즈와 르원틴이었습니다.

치열했던 논쟁을 뒤로하고, 오늘날 동물의 행동에 대한 진화적 연구는 눈부시게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화심리학과 인간행동생태학은 진화된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발견들을 쉼 없이 성취하고 있습니다. 사회생물학에 대한 낡은 논쟁을 되풀이하기보다는, 진화된 인간 본성에 대한 통합적 이해를 함께 추구할 시점이 아닌가 합니다.

 

전중환 이화여대 강사·진화심리학

필자는 텍사스대에서 진화심리학으로 박사학위를 했다. 역서로 『욕망의 진화』가, 논문으로 「사촌에 대한 이타적 행동」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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