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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은 영리가 아니라 보건서비스” … 유럽형 의료보장의 철학과 정신을 전하다
“건강은 영리가 아니라 보건서비스” … 유럽형 의료보장의 철학과 정신을 전하다
  • 조홍준 울산의대·가정의학
  • 승인 2008.10.13 14: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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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민영화 논쟁과 한국의료의 미래』 이상이 외 지음│도서출판 밈│2008│268쪽

『환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파트릭 펠루 지음│양영란 옮김│프로네시스│2008│380쪽

조홍준 울산의대·가정의학

‘시장’과 ‘경쟁’을 도입하려는 이명박 정부의 시도가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중 가장 눈에 띄는 분야의 하나가 의료분야이다. 전통적으로 의료서비스는 정보의 비대칭성, 공급자의 시장진입 제한과 외부성 등으로 시장에 맡기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국가의 개입이 필요한 분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제주특별자치도의 영리병원 허용 시도, 민간의료보험의 활성화,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철폐 등의 주장과 정책이 어지럽게 제시되고 있다.

이제까지 의료제도와 관련된 논쟁은 대부분 제한된 전문가 사이에서만 이루어졌지 대중이 직접 참여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등장 이후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대통령직 인수위 시절에 이미 ‘건강보험 당연지정제’폐지 문제가 일반 네티즌 사이에 서 큰 논란이 됐다. 광우병을 반대하는 촛불집회는 건강보험민영화 또는‘의료민영화’에 관한 문제제기로 확대됐다. 시민사회운동이 1988년 농어촌 지역의료보험 도입 이후 의료보험 통합을 포함한 건강보험 개혁을 과제로 20여 년 간 운동을 지속해왔지만 이는 전혀 새로운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이상이 교수 등이 저술한 『의료민영화 논쟁과 한국의료의 미래』라는 책은 이런 논의의 흐름을 쪼ㅈ아간다. 그리고 이런 흐름이 이미 노무현 정부의 ‘의료산업화’ 논의에서 시작됐고 이명박 정부의 ‘의료선진화’를 통해 확대·심화되고 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저자들은 의료민영화를 의료공급과 재원조달에서 정부의 역할을 축소하고 민간의 역할을 강화하려는 것으로 정의하고, 구체적으로는 주식회사형 영리법인 병원의 허용, 민간의료보험의 활성화 정책임을 지적한다.

민간의료보험 활성화 전략의 핵심으로는 개인의 질병정보를 민간보험회사에 제공하는 것과 보험료에 세금을 공제해주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런 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때로는 선도하는 것은다름 아닌 재벌이 소유한 민간보험회사들이라는 사실도 지적한다. 의료민영화가 확대·심화된 모습이 바로 현재의 미국의료제도이다. 저자들은 미국의료에 대해 환상을 하나하나 지적한다. 남한의 국민 전체와 맞먹는 4천5백만 명이 의료보험이 없다는 것과 의료비가 국내총생산의 15%에 달할 정도로(한국은 6% 정도) 엄청나게 많이 든다는 것은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식코’를 통해서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정부나 시장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영리병원과 영리의료보험에서 제공하는 의료서비스의 질도 신통치 않다는 사실은 새삼 우리를 놀라게 한다. 

저자들은 이런 문제점 지적에 이어 자신들의 대안을 제시한다. 의료제공체계의 개혁을 위해서는 국민 모두가 주치의를 가질 수 있도록 하고, 병원에 대한 공공 투자를 강화해서 의료서비스의 질을 높일 것을 제안하고 있다. 아울러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확대하되 이를 위해서는 정부 부담을 늘리고 보험료를 인상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런 제안의 방향은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며 진보진영 내에서 상당히 오랜 기간 논의된 것과 큰 차이가 없다. 과제는 이에 필요한 재정을 어떻게 조달하고 보험료 인상을 위해 어떻게 국민을 설득할 것인가에 있었다. 저자들은 이를 위해 병원 시설 개선을 위해 민간자본유치사업(BTL)과 같은 방식을 도입하자는 제안을 한다. 

 
프랑스의 파트릭 펠루가 쓴 『환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는 응급의학과 의사가 직접 겪은 프랑스 의료의 문제점을 지적한 칼럼을 모은 책이다. 영화 ‘식코’를 본 사람이면 프랑스 의료제도가 미국과 대비돼 매우 훌륭한 제도로 묘사된 것을 기억할 것이다. 밤에 의사가 환자를 방문하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프랑스 의료제도의 우수성은 2000년 세계보건기구가 전세계 의료제도를 평가한 보고서에도 나타나는데, 프랑스는 190여 개 국 중 의료체계의 수행능력에서 1위를 차지했다(이 보고서에서 사용한 평가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지만, 그렇더라도 프랑스가 상위권에 속하는 것은 사실이다). 프랑스 응급의료체계(SAMU)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제도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따라서 펠루의 프랑스 의료제도에 대한 비판은 약간 당혹스럽다. 이는 한 의료체계에 대한 내부자와 외부자의 평가가 크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우리가 항상 불만을 토로하는 한국 의료보장제도도 국제적으로는 모범적인 제도로 평가받고 있다!), 그 나라가 처한 현실의 맥락을 이해해야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프랑스는 중도우파인 사르코지의 집권이후 ‘2007 병원개혁계획(Plan Hospital 2007)’을 수립하고 이를 밀어붙이고 있다.

이 계획은 공공병원에 대한 정부의 재정지출을 줄여 공공의 역할을 축소하고 결과적으로 영리민간병원의 역할을 강화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현재 프랑스는 공공병상의 비중이 65%이고 (우리나라는 10% 미만) 공적의료비가 전체 의료비의 80%를 차지하고 있는데 (OECD 평균은 73%, 우리나라는 53%) 이를 축소하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를 ‘의료민영화’라고 할 수는 있으나 그 맥락은 우리와는 아주 다르다. 따라서 펠루의 책만 읽고 프랑스는 의료제도가 형편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응급실에 사회복지사가 근무하며 건강문제 이외의 문제를 해결해준다든지, 책 여기저기서 언뜻언뜻 보이는 내용 즉, 의사가 구급차를 타고 응급현장에 나간다든지, 입원이나 수술이 필요한 환자를 위해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책임지고 알아봐준다든지 하는 것은 우리나라 응급실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펠루의 증언을 통해 공공병원의 인력과 재정삭감이 국민의 건강과 의료진의 사기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으며, 의료민영화의 영향은 공공의료제도가 잘 갖추어진 나라에서도 심각한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우리나라 보다는 덜 하겠지만) 점을 잘 알려준다. 프랑스 응급실이 복잡한 이유의 하나는 영국 등 다른 유럽국가와 달리 주치의제도가 정립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두 책은 모두 전문가가 아닌 일반 대중을 위해 쓴 책이다. 대중을 독자로 삼은 건강서적은 많지만 의료정책과 관련된 것은 거의 없다. 특히 『의료민영화 논쟁과 한국의료의 미래』는 최근 진행되고 있는 논쟁적 사안에 관해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해서 그 전말과 함의를 상세하게 분석하고 대안까지 제시해 대중은 물론 이 분야의 전문가들에게도 새로운 논쟁거리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완전히 성공했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눈에 띈다. 전문적인 용어를 좀 더 친절히 설명해 줄 필요가 있다(예를 들어 건강유지기구, HMO 등). 서술의 일관성이 다소 부족하고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는 문제는 아마도 여러 저자가 참여해서 일어난 어쩔 수 없는 결과로 보이지만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다.   

『환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는 의료제도와 관한 책이 아니다. 따라서 진보적인 응급의학과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면서 갖게 되는 개인적 소회를 맛깔스럽게 보여준다. 아주 바쁜 응급실에서 환자 개개인을 통해 문제의 근원이 되는 사회구조적 문제까지 이해하는 저자의 능력은 놀랍기까지 하다. 그러나 칼럼이라는 글의 속성 상 깊이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프랑스 의료제도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책의 끝 부분에 전문가의 해설을 포함하기는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칼럼에서 써진 의료제도와 관련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이 두 권의 책은 형식과 써진 곳이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펠루의 말을 빌자면 “건강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체의 관점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보건서비스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의료서비스에서 국가가 공공의 책임을 민간과 시장에 맡기는 정책은 환자에게 제공되는 의료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리고 비용을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의료인들에게도 좌절과 절망을 초래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미국의료제도의 길’로 갈 것인지 아니면 ‘유럽 복지국가 의료보장의 길’로 갈 것인지의 기로에 서 있다.
건강을 모든 국민이 누려야 할 ‘권리’로 받아들이고 이를 사회구성원의 연대(solidarity)를 통해 해결하기 원한다면 우리가 선택할 길은 명확하다. 한국형 의료보장이 유럽 국가를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겠지만 유럽형 의료보장제도가 지닌 철학과 정신을 담아내는 방식의 의료보장을 만들어내야 한다.

 

조홍준 울산의대·가정의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보건의학으로 박사학위를 했다. 주요 저서로 『빈곤과 건강』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한국에서 결혼상태와 흡연: 젠더와 나이의 영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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