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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 무너진 서울市廳舍의 역설
[대학정론] 무너진 서울市廳舍의 역설
  • 박현수 논설위원 /영남대·문화인류학
  • 승인 2008.09.22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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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수 논설위원 /영남대·문화인류학
서울시 청사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가 원숙기에 도달하던 무렵에 세워진 대표적 상징물이다. 우리가 흔히 중앙청이라 부르던 조선총독부 건물과 이 시청 건물은 동시에 이루어진 식민통치의 도구이자 상징이었다. 서울역 역사나 한국은행 건물, 그리고 이미 없어진 중앙청 건물에 비해 서울시청은 결코 아름답다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보존해야할 것은 아름다운 것 만이 아니다. 우리 존재에 필요한 품위를 주는 것은 보존돼야한다.

미적 가치는 문화재로서 갖춰야할 충분조건이 아닐뿐더러 필요조건이라 하기도 어렵다. 젊은 시절 이태준, 이상, 정지용,  박태원 등이 노닐며 날마다 보았던  서울의 건물이 이런 커다란 공공건물 뿐은 아니었다.

이들이 살던 집은 대체로 문안이나 문밖의 조그만 한옥들이었다. 또 서울 4대문 밖에서 더 떨어진 곳에는 토막민이라는 새로운 빈민계급이 무수한 판잣집들을 짓고 있었다. 이제 식민지 시대를 증언해야할 이런 주택들은 남은 것이 없다. 마찬가지다.

개발독재시대, 산업화 시대를 보여줄 물적 증거들은 남아나지를 못했다. 적어도 구로동의 쪽방이나 전태일의 청계천 피복공장 하나쯤은 남아 있어야하지 않을까.
2000년대에 들어와 한국의 인문학과 정부가 이룩한 가장 뛰어난 업적은 소외돼온 가까운 이웃과 가까운 옛날을 제대로 대접하게 된 것이다. 근대의 유물, 유적도 문화재의 개념으로 감싸게 된 것이다.

근대 문화재는 일제 식민주의의 자취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는 만큼 세계 여러 민족과 함께했던 제국주의의 역사 속에 우리 역사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일이며  또한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역사가 없는 역사보다는 낫다는 사실을 인정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론적 전환에도 불구하고 근대문화재 등록제도는 그나마 남아있던 역사 유적들에 대한 기동력 있는 파괴 작전을 부추기기도 했다.

문화재 보존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복원을 주장한다. 이런 일반적 주장의 근거와 무관하게, 몇 년 전 청계천공사가 청계천 복원이라 한다면 이는 어처구니없는 무지이거나 사기이다. 최근 ‘복원’됐다는 청계천의 한 끝에는 육이오 뒤의 청 판잣집들이 다시 세워졌다. 우습기 짝이 없는 이 촬영장의 세트 같은 물건은 한편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들게한다.

복원이라는 작업은 대체로 이런 것이다. 복원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머리 속의 공사로 충분하다. 복원을 위한 자료나 지식이 충분하다면 그런 복원은 불가능할 수 밖에 없다. 이미 없어진 것을 억지로라도 되돌리려 애쓰는 모습은 안쓰러우면서 아울러 보존의 당위성을 보여준다. 보존을 외면한 채 막대한 국비를 투입해 복원과 파괴를 반복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누군가가 이로써 이익을 얻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시스템을 알고있다. 그러나 이를 막지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 문화재의 파괴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파괴를 추진하는 사람들을 이겨본 일은 없다.
보존을 바라는 사람들의 의견 개진은 경제적 뒷받침이 없는데다가 끈질기지 못하며 개탄에 그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파괴 또는 제거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음모는 끈질기고 치밀하며 손에 잡히는 경제로 뒷받침을 받고 있다. 경제 살리기, 실용주의, 규제철폐로 우리 역사의 자취, 특히 근대문화재는 아슬아슬한 상태에 있다.

그러나 무엇이 진짜 경제이고, 무엇이 진짜 실용적인 것이며, 무엇이 규제를 풀어야할 대상인지는 누구나 알 수 있다. 근대 역사의 유적은 우리의 경관에 깊이를 주는 요소다. 근대문화재에 대한 법률의 허점을 노리는
것은 기업을 운영하는 모리배들 뿐 아니라 시민들이 뽑은 지배자 집단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이번 시청파괴사건에서 드러났다.

과연 정부의 본질은 무엇이며 국가의 실체는 무엇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무너진 시 청사를 다시복구시키려는 것은 쓸데 없는 짓이다.

이제 시 청사의 처리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 청사의 잔해가 우리 문화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무너진 현상태의 그대로의 보존이야말로 심각히 생각해 봐야할 방안이 아닐까.
2008년 한국의 문화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그리고 문화의 자취란 무엇인지 생각게 하는 계몽적 기념물로서.

박현수 논설위원 /영남대·문화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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