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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 嚴於己 寬於他
[대학정론] 嚴於己 寬於他
  • 이영수 발행인
  • 승인 2008.09.01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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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수 발행인

2학기 개강을 맞은 대학가가 평온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계절이다. 예측도 할 수 없이 급변하는 국내외 상황 탓도 있겠지만, 대학 전체가 실용화되면서 나타나는 어떤 피로감, 긴장감 때문일 것이다.

헤리 레드넷이란 호주 멜버른의 모나쉬대 교수가 쓴 『윤리적 삶의 이해』가 새삼 음미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의 말을 간추리면, 지금의 사회는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 세 가지 세력이 형성돼 있다고 한다.

첫째 유형은 윤리적인 기능과 형태를 지지하는 세력, 둘째 유형은 이러한 문제에 아예 무관심한 집단이며, 셋째 유형은 윤리적 기능과 형태를 반대하는 세력들이다. 세계화가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는 작금의 세계에서 이 둘째, 셋째 세력들이 우위를 점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레드넷 교수는 이 세력들이 다양한 부문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 천착하고 있다.

그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지금의 학교나 관료조직에서는 의무와 책임을 강조하는 교육이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면서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이들이 사라져 간 빈자리에는 승진과 성공, 재물과 권력에 매달리는 모습과, 때로는 목적을 위해 아부하고 부도덕한 행위라도 서슴지 않는 행동 군상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윤리적인 전통이 힘을 잃으면, 그 다음 나타나는 현상은 추문이 대학과, 나라 전체를 배회하게 된다는 것이다.

얼마 전 한 지인의 출판기념회를 다녀왔다. 은퇴 후에도 열정을 가지고 왕성하게 학술활동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풍요로워보였다. 그러나 그의 고민이랄까, 고뇌가 묻어나는 지적은 그가 보여준 풍요로움이 놓여있는 현실의 황량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하기만 하다. 그의 말인즉, 한국 사회의 지도층이 윤리적 투명성, 도덕성 문제에서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형편없이 뒤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가까운 일본의 예를 들면서, 그들이 얼마나 높은 윤리적 투명성을 자기 기준으로 제시하고, 거기에 부합하려고 애쓰고 있는지, 그것이 그 사회의 윤리적 전통을 어떻게 떠받쳐 왔는가를 조심스레 언급했다.
그의 발언 전부를 공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공감대가 형성되는 지적이었다.

사회의 그 어느 집단보다 존경받아야 할 학자나 성직자들조차 오늘 곳곳에서 손가락질 받고 있다. 이러한 비난은 비록 일부의 문제라 하더라도, 높은 도덕성이라는 기준을 요청받는 영역인 까닭에 어떤 작은 비난조차도 겸허히 새겨야 한다.

학자와 성직자들조차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는 현실이니, 정치인이나 여타 다른 전문직 종사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어째서 학자나 성직자들에게 높은 윤리의식, 도덕성이 요구될까 따지는 것은 무망한 일이다. 이들이야말로 진실의 문, 진리의 길로 안내하는 선택된 이들이다. 이들에게는 늘 다음 세대의 눈빛들이 고정돼 있으며, 다음 세대로 가는 희망이 집중돼 있다.

학자와 대학이 시장의 가치에 현혹돼 자기 본령을 잃는 순간, 종교가 정신의 빛을 잃고 흔들릴 때, 거대한 추문이 떠돌고 결국은 추문 속에 모든 것이 가라앉아 버릴 것이다.
개강을 즈음한 이 계절, 嚴於己 寬於他라는 전통적 윤리의식을 되새기는 것은, 세속적 의미의 물질적 성취가 아니라삶의 긴 호흡을 준비하고,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제대로 가르치는 책무가 여전히 대학의 몫, 특히 학자의 일로 남아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더 많은 윤리의식, 도덕성이 요청되는 시대다.

이영수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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