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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대학 강사를 교원으로 인정해야 할 10가지 이유
[오피니언] 대학 강사를 교원으로 인정해야 할 10가지 이유
  • 강수돌 고려대·경영학
  • 승인 2008.08.25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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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돌 고려대·경영학

갈수록 오늘의 대학은 ‘진리 탐구의 상아탑’이 아니라 ‘수익 추구의 상아탑’으로 전락하고 있다. ‘큰 공부’를 하는 대학이 진정한 진리 탐구의 상아탑이 되려면, 사회와 담을 쌓고 저 혼자만 고고하게 놀 것이 아니라, 대학과 사회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부단히 교류하며, 치열한 사회적 삶의 현장 속에서 진리, 정의, 자유, 사랑, 봉사 등의 아름다운 가치들을 어떻게 하면 올바른 방식으로 구현할지 고심하는 현장이 돼야 한다. 대학이 이런 현장이 되어야 함을 기본 전제로 한 위에서 나는 대학 강사들이 정식으로 교원 대우를 받아야 할 10가지 이유를 말하고자 한다.

첫째, 학문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에게 학문할 의욕을 북돋우기 위해서다. 대개 강사들은 석·박사 이상 학위를 갖고 있다. 대학 졸업 이후 최소한 5년에서 10년 정도의 공부를 더 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학문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안정된 직장 이상의 뜻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개 진리 탐구나 후세 교육, 사회봉사 등의 뜻이다. 따라서 이들을 교원 대접 않는 것은 학문할 의욕을 꺾는 셈이다.

둘째, 독일어 표현처럼 ‘갓 나온 햇병아리 같은 박사’들이 가진 참신한 생각과 이론들을 대학 혁신의 새로운 에너지로 적극 수용하기 위해서다. 내일의 희망도 없이 ‘보따리 장사’만 해야 하는 사람들이 참신한 생각과 이론을 펼치기는 어렵다. 그만큼 대학의 물은 고이기 마련이고 장기적으로 썩기 마련이다. 새로운 박사들이 부단히 들어오고 새로운 에너지를 순환하며 새로운 토론과 논쟁이 활성화해야 대학도 건강한 생명체로서 살아 움직일 것이다.

셋째,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연간 1천만 원 내는 대학생들이 보다 내실 있는 교육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다. 대학 강사들이 교원이 아니라고 한다면,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은 적게는 1/3, 많게는 1/2에 해당하는 수업을 교원이 아닌 이들한테 받고 졸업하는 셈이다. 이러한 형식적 문제보다 더 문제인 것은 강사들이 안정된 연구를 하기 어렵기에 대학 수업이나 수업 외 지도가 갈수록 부실해지기 쉽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이 강사 선생님들의 수업이 부실하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의욕적인 강의가 더 많다. 그러나 교원 대접을 않는 일이 지속될수록 처음의 열정과 의욕이 급격히 식을 것이라는 우려가 큰 것도 사실이다.
넷째, 학생들과의 인간적, 학문적 교류를 일상화, 연속화하기 위해서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 힘겹게 입학한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만나는 선생님도 중요하지만, 수업 시간 외에 면담이나 회식 자리, 각종 행사 등에서 선생님들을 만나 진로를 고민하거나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에 관한 학문적 고심이나 인간적 고뇌 같은 것을 공유하는 것이 그 지적 성장에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

  다섯째, 진리 탐구의 전당이라고 하는 대학 차원에서 보더라도 학문 후속 세대가 튼실하게 이어질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강사 선생님들이 더 이상 ‘일용 잡급직’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상근 교원’ 대우를 받을 수 있을 때, 학문적 열성과 능력을 동시에 가진 후세들이 ‘희망’을 갖고 줄줄이 나올 것이다. 현재 자신이 배우는 선생님들이 한갓 ‘일용직’ 지위에 머물다가 행여 대학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영원히 ‘폐기처분’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들이 학문적 열정으로 평생을 걸고자 하는 결단을 내리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강사들이 최소한의 교원 대접이라도 받으며 열심히 탐구하고 교육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때, 학문 후속 세대들에게서 부단히 ‘청출어람’의 가능성이라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은 조건 속에서 대학원 교육의 질을 논하고 학문 후속 세대를 논하며 연구의 국제 경쟁력을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여섯째, 최근 한경선 박사의 유서에서 드러나듯, 대학에서 교원 임용을 둘러싼 불합리성, 비합리성, 불공정성 등을 타파하기 위함이다. 시간강사가 정당한 교원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언제 잘릴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대학의 교원 임용도 기존 선배 교수들과 얼마나 친분이 두텁고 얼마나 ‘하청’ 받은 일을 잘 수행하는가에 따라 좌우되기 쉽다. 대학이 진리탐구의 전당, 사회정의의 전당, 이웃봉사의 전당이 되기 위해서라도 신규 교원 임용에서는 연고주의, 학벌주의, 남성주의 등 외형적 기준을 타파하고 당사자의 학문적 능력 외에 사회적 식견, 인간적 면모 등을 두루 보아야 한다.

일곱째, 대학 의사 결정 과정, 특히 교육과정이나 학내 행사 등에 강사를 참여시킬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 교육의 1/3 내지 1/2을 강사가 담당하는데도 교육과정의 개편이나 개혁과 관련해서 강사들의 의견이 반영될 통로는 거의 없다. 창의성과 열정이 넘치는 젊은 강사들에게 교원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교육 과정이나 학술대회 등 각종 학내 행사에 참여할 기회를 주는 것이 대학 교육과 연구의 질과 수준을 한층 드높일 수 있는 방안이다.

여덟째, 강사 선생님들이 스스로 가진 ‘자기 억압’ 또는 ‘눈치 보기’ 등을 타파할 필요성 때문이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강사들은 전임 교수들의 눈치 때문에 ‘말도’ 함부로 못하고 가르치는 방식도 자유롭지 못하다. 심한 경우, 자신을 소개한 전임 교수의 책을 교재로 써야만 한다고 느끼거나 그 교수의 이론을 적극 옹호하는 내용으로 수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분은 “나는 지금 강사 생활로도 행운이라고 생각하기에 강사 지위를 개선하자는 운동은 내 행복을 스스로 갉아먹는 행위라 본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이 현재의 강사 자리를 얻기 전에 당한 수모나 역경을 생각한다면 지금 이것만으로도 너무나 만족하고 다행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과잉 또는 배반이라 생각한다. ‘스스로 자기식민화’를 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이런 태도 속에서 과연 자신의 학자적 신념을 담은 이론이나 연구 가설, 주장 등이 나오기나 하겠는가.

아홉째,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지식인으로서의 대학 강사들이 사상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1949년 고등교육법에서 교원으로 인정되었던 대학 강사는 개발 독재 시절이던 1977년에 교원의 범주에서 제외됐다. 대신 전임강사 제도가 생기고 기존 강사들은 교원 범주 밖의 존재인 시간강사로 격하됐다. 지식인의 본질인 비판과 저항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지식인들의 입과 눈과 귀를 틀어막은 채 ‘지식 사회’를 논하는 것은 마치 샘물 없는 오아시스와도 같다. 비판과 저항의 자유,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실질적으로 보장될 때, 온갖 이론과 실천이 참다워질 수 있다. 대학의 민주화를 넘어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서라도 강사들에게 교원 지위를 부여하고 비판과 저항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열 번째, 현재 지배적인 기득권 중심의 사다리 질서를 타파하고 다양성 중심의 원탁형 질서를 창조하기 위해서다. 지금의 사다리 질서는 소수의 기득권을 위해 대다수가 희생당하는 방식으로 굴러가고 있다. 모두가 사다리의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도 없는 현실에서 비생산적인 경쟁만 치열해진다. 올라간다 한들, 진리, 정의, 자유, 사랑, 봉사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이론적, 실천적 노력을 하기보다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급급하다. 강사에게 교원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이러한 사다리 질서를 타파하고 모두가 다양한 얼굴로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원탁형 질서를 만드는 데 일조할 것이다. 

이 글은 계간 <황해문화> 2008년 여름호에 실린 글을 요약한 것입니다. 재수록할 수 있도록 흔쾌히 허락해주신 <황해문화>와 강수돌 교수에게 감사드립니다.

강수돌 고려대·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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