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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철학 연구의 길 제안 … 현실과의 소통 강화가 관건
정상적인 철학 연구의 길 제안 … 현실과의 소통 강화가 관건
  • 권용혁 / 울산대·철학
  • 승인 2008.07.07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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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한국 현대 실천철학』 김석수 지음|돌베개|2008

『한국 현대 실천철학』 김석수 지음|돌베개|2008
한국의 대다수 서구철학 전문가들은 지금도 한국철학계에 서구철학을 소개하고 그 중요성을 계몽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상식이지만 서구철학의 대상은 서구인의 삶과 연관되어 있는 문제들이다. 그 철학적 입장은 당연히 이 대상들에 대한 반성 과정에서 구상되며, 다양한 입장들이 공론장에서의 논증을 통해 구체적 보편의 모습으로 체화된다.

한국에 있어서의 철학이 서구철학의 단순한 수용을 넘어 정상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한국인의 삶에 대한 분석과 반성활동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 철학은 원래 구체적 현실과 소통하는 걸 본업으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특히 현실과의 소통을 주 업무로 삼고 있는 실천철학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서구철학계의 논의만으로는 더 이상 우리의 현실에 부응하는 개념들을 적확하게 포착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철학자들도 한국사회의 변화 속도나 그 특이성을 아우르는 개념틀을 구성하고 조탁하는 데 참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설이 너무 길었다. 그만큼 서평자의 주관적 의도가 앞선 서평임을 부인하고 싶지 않다. 독자들의 혜량을 바랄 뿐이다.

철학과 현실 사이, 고민의 진정성


오랜만에 철학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진정성이 담긴 글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글 곳곳에 담겨 있는 저자의 일관된 문제의식과 균형 잡힌 시각이 이 책을 더 돋보이게 한다. 저자는 척박했던 현실 상황에서도 철학자의 길을 걸었던 선배 철학자들의 텍스트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데 반 이상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저자는 그들의 텍스트를 서양 실천철학 수용사의 관점에서 정리하고 있다. 먼저 일제시기에 수용된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가 해방과 한국전쟁시기를 거치면서 그 당시의 민족주의와 어떤 연관 관계에 있는지를 탐구하는 글(1부 1장)에서부터, 해방 이후 60년대 국가주의시기에 이데올로그로 활동한 철학자들의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평가한 글(1부 2장, 3장), 그리고 70-80년대에 수용된 서구 사회철학 및 박종홍과 황장엽의 마르크스주의 해석(1분 4장, 5장), 그리고 사회주의권 붕괴와 국내 민주화와 더불어 개인주의와 다원주의가 확산된 1990년대 이후에 수용된 다양한 서구철학들을 살펴보는 글(2부 1장)까지 20세기 전반에 걸친 한국에 있어서의 실천철학의 큰 흐름들을 거의 다 다루고 있다.

저자의 지적처럼 특정 이론 수용사는 현실 관련 논의를 풍부하게 하지만, 수용된 이론의 우월성으로 인해 현실에 대한 세밀한 고찰이 소홀해지는 한계가 있다. 이를 보완하고자 저자는 저서의 후반부(2부 2장부터 6장)에서는 서구 현대 실천철학의 내용을 한국적 현실과 연관 지어 고찰하고 있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 제기된 현실의 문제들이 가지는 독특성을 서구의 실천철학 이론과 어떻게 연관 지어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을 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1987년 이후의 시민사회론을 다룬 글(2부 2장), 포스트모더니즘과 ‘차이’의 문제를 다룬 글(2부 3장), 스피노자-마르크스주의의 사유와 다중이론을 전개한 글(2부 4장)이 그렇다. 지방자치와 시민자치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마지막 두 장(2부 5장, 6장)에서는 현실 문제의 해결을 위해 서구이론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시각이 돋보인다. 저자는 세계화 및 서울 중심주의의 대안으로 지방 분권과 지역 혁신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그 실천철학적 전략으로 다원주의와 차이에 대한 존중의 논리를 도입하며, 기초·단위체들의 자율성 확립의 토대 위에서 상호 인정과 연대성을 확립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저자는 열한 개로 구성된 이 책의 거의 모든 장에서 정상적인 철학함을 위해 요구되는 균형 잡힌 시각을 일관성 있게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참된 지식인 상, 참된 철학자 상으로 정리되고 있다. 먼저 철학자는 현실 반영적 연구와 문헌 중심적 연구 사이의 상호 긴장을 유지하면서 조화를 추구해야 하며(90쪽), 텍스트에 몰입해 현실을 떠나버리거나, 현실에 분노해 텍스트를 멀리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이 둘의 긴장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한다고(440쪽) 기술하고 있다. 즉, 현실 읽기와 텍스트 읽기의 균형을 도모해야 한다고 한다. 현실 읽기에만 몰두하면 단순한 실천가로 매몰될 것이며, 텍스트에만 갇히면 현실을 상실한 공허한 연구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철학자는 전통과 현대, 안의 것과 바깥의 것의 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시각은 저자의 결론부 요약에서처럼 “철학자는 수입 철학이 가지고 있는 세계성, 시비 철학이 가지고 있는 비판성, 자립 철학이 가지고 있는 전통성 모두를 종합하여 보편성과 개별성의 상보적 관계를 도모하는 것”(442쪽)으로 기술돼 있다. 마지막으로 철학자는 우리의 철학사를 우리 스스로 주체적으로 정립해야 한다고 한다. 이는 철학의 주체적 창조 과정이며, 철학 본래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이처럼 이 책은 특정 서구철학 이론을 중심으로 기존의 특정 철학 내부 논점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글도 아니며, 이와 논쟁 중인 다른 서구 이론의 논점을 논박하는 글도 아니다. 이 책은 수입학에서 벗어나 현실과 소통하면서 스스로 정상적인 철학함의 길을 찾아가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자 한다. 이 책은 철학을 주체적으로 정립하기 위해 당연히 요구되는 논점들을 제시함으로써 이 땅에서 지금 철학함을 업으로 삼고 있는 지식인들에게 정상적인 학문의 길을 제안하고 있다. 따라서 서평자도 이 글을 특정한 서구철학적 입장에 의거해서 판단하거나 그 수용사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파악하는 저자의 입장에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저자는 지금 여기서 철학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받아들일 수 있는 정상적인 철학함의 길을 매우 설득력 있게 정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논점처럼 한국에 있어서의 철학이 정상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현실 반영 연구와 문헌 중심 연구 사이의 적절한 관계 유지가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현실 읽기와 텍스트 읽기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것도 필요하다. “진정한 철학자는 현실에 예속되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현실을 떠나서도 안 된다. 그는 현실과 함께 철학하되, 현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비판하면서 생산해 내는 일을 담당해야 한다.”는(147쪽) 저자의 입장에 서평자도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그럼에도 저자가 전개하고 있는 논점을 보강하는 논의를 덧붙이는 것도 이 글을 읽을 독자들에게 보다 생산적인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앞으로 한국에서 철학의 정상화를 위해 요구되는 몇 가지 현실적인 전략과 관련된 것이다.

저자는 참된 철학자 상을, 바람직한 실천철학의 길을 당위론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당위론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에게 주어진 인문사회적 현실지형을 보다 객관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서평자가 보기에 한국의 현실지형에서 철학을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현실 반영 연구가 강화돼야 한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서구이론에 대한 문헌 연구는 넘칠 정도로 활발하지만, 현실에서 발현되고 있는 문제 중심의 연구는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어서다.

텍스트 축적과 성찰적 재구성의 몫

현실 반영 연구를 위해서는 그것과 관련된 기초 텍스트를 성찰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텍스트들이 충분히 축적돼 있지 않다. 따라서 현실과 소통하고자 하는 철학자들은 텍스트 축적과 성찰적 재구성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 황혼이 지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최소한 현재적 입장에서 자료를 정리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에 철학자들이 참여할 필요가 있다. 한국 근현대사가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독특한 소재들(분단과 통일, 산업화와 민주화의 연속적 성공, 붉은 악마와 촛불문화, 다양한 소수자 문제들 등)을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있기에 그렇다.

게다가 문제 중심 연구에는 학제적 공동 연구가 필수적이다. 현실 문제를 보다 객관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다학문적 접근과 이들 사이의 상호보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당파성과 특수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학문의 속성상 학제연구를 제안하고 협업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드는 데 철학은 매우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철학자들이 오히려 중재자, 조율사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야가 산재해 있다. 그들이 열린 연구 자세로 현실과 소통하고 있는 타학문의 성과들을 함께 공유한다면, 실천철학의 정상화는 더 빠른 시일 내에 다가올 것이다.

마무리해 보자. 이 책의 업적은 한국에 있어서 실천철학의 위상을 정리하고 정상성을 회복하기 위한 방안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독특성과 의의를 평가받아 마땅하다. 저자 스스로 지적하고 있듯이 이러한 실천철학의 기초 닦기 작업은 보다 세밀화돼 그 속살을 풍부하게 할 필요가 있다. 덧붙여 저자가 행한 선배 철학자들의 텍스트 분석을 기초 삼아 이제는 현실과 소통하기 위한 조건들을 학제적으로 함께 만들어 갈 필요가 있다. 현실과의 정상적인 소통은 현실에 관한 텍스트가 풍부하게 주어질 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저자를 포함해 한국에서의 실천철학 정립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정상성 회복을 위한 후속, 심화 연구를 성원하고 또 기대해 보자.

 

권용혁 / 울산대·철학

필자는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회와 철학 연구회 부회장으로 있다. 철학적 보편주의와 동아시아 공동체 사상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홉스의 개인주의 극복』, 『이성과 사회』, 『철학과 현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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