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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특집] 오삼숙과 청송심씨 가상대담 :‘여성·지식인·권력’ 세가지 키워드로 본 2001 한국사회
[송년특집] 오삼숙과 청송심씨 가상대담 :‘여성·지식인·권력’ 세가지 키워드로 본 2001 한국사회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1.12.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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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2-26 09:35:35
오삼숙 : 1966년생. 여자친구, 남자친구와 함께 음식점 경영. 위로는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아들 둘과 함께 ‘모계 전승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고 있음. 올 2월 전직 대학교수였던 장모씨와 이혼 후 호주제 철폐 운동에도 앞장서는 등 활기찬 중년을 살아가고 있음.
청송 심씨 : 1550년생. 청송 심씨 집성촌인 경북 청송군 파천면 덕천동 중인가정에서 출생. 16세에 의령 출신 이씨와 혼인함. 20세까지 친정에서 살다가 분가. 24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면서 남긴 가문의 재산 중 논 두마지기와 벼 열 섬 물려받음. 슬하에 2녀 1남 둠.

씩씩한 21세기의 아줌마 오삼숙과, 주부의 삶과 독립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을 함께 꾸려갔던 16세기 아줌마 청송 심씨가 만나 나눈 이야기들을 거칠게나마 옮겨본다. ‘여성’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두 아줌마들의 걸걸한 입담을 업고 ‘지식인’을 타넘어 ‘조폭’과 ‘정치’에까지 이른다. 소견 좁은 여인네들의 수다로 치부하기에는 자못 뼈있는 말들이 오고 간 터, 어디까지나 ‘여성’의 눈으로 세상보기라는 것을 염두에 두시길.

아줌마들, 호주제와 딸차별에 분개하다
오삼숙(이하 오):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대부인. 먼길 여행하느라 고단하셨지요.
청송 심씨(이하 심):오랜만에 한양 오니 풍물도 새롭고 머릿속이 환하오. 소문은 익히 들었으나 실제로 보니 박꽃같이 환하고 명민한 눈매며, 참 어여쁘오. 시댁 알기를 고샅길 개똥으로 안다느니, 서방을 예사로 족대기니 하는 뜬소문이 우리 고을서도 적잖이 퍼졌지만, 얌통머리 없이 오입질 노름질 일삼는 허랑방탕한 사내들이 모여 실없이 지껄이는 소리로 멀찌감치 제껴둔 터이오. 그나저나 노고가 참 크셨소.
오:어머니 할머니께서 상심이 크셨는데, 네가 참아라 네가 죽어라 안하고 응원해주셨어요. 바람끼야 그렇다 치지만, 거짓말에 뇌물 상납에 논문 표절에, 교수란 작자가 영 신실하지 못해 애들 배울까 결심하게 됐지요.
심:한창 나이인데 좋은 사람 만나 재가해야지요?
오:결혼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닌데, 쉽지가 않네요. 아이들이 ‘장’씨 성을 그대로 달고 다녀야 하거든요. 호주제라는 것이,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것이 그리 흉악한 것인 줄 몰랐어요. 할머니 어머니 제치고 세 살 아들이 한 집안의 가장이 되고, 애들은 죽어야 성을 바꿀수 있고, 자식을 ‘동거인’이라고 호적에 올려야 하니, 어미 눈에서 파란불이 일지 않겠습니까.
심:저런 저런. 그것은 일제가 만든 것이 아니오. 그걸 모르고 호주제를 없애면 가족이 없어지네, 나라가 망하네 하고 늙은이들이 있는 엄살 없는 주접을 다 떤다지.
심:이를 말씀인가요. 딸은 잘나고 똑똑해도 대접 못 받으니 누군들 아들을 바라지 않겠어요. 아들 가진 제가 이런 얘기하면 욕할지 모르지만, 아들 낳을 궁리에 세월 다 보내는 여자들 많아요. 치성에 불공에 비방에 심지어 뱃속의 생명을 들어내기까지 한다네요. 내년이 말띠해라 벌써부터 난리라는데… 심:쯧쯧쯧…
오:그래서 호주체 철폐 서명도 하고 그랬지요. 고등학교밖에 안 나오고 15년을 부엌데기로 살아왔지만 당해보니 알겠더라구요. 험한 일 겪으니 세상도 보이구요.
심:참 장하고 대견하시오.
오:뭐 장할 게 있나요. 제대로 살아야겠다 마음먹으니 독해지데요. 제가 ‘천하무적 아줌마’잖아요. 염치없다 돈만 밝힌다 밥 많이 먹는다, 무슨 웬수가 졌다고 욕들을 해대더니만, 요즘엔 그나마 말 잘하고 똑똑한 아줌마들이 많이 나와서 다행이지요. 참, 소식 들으셨나요? 시집간 딸들이 들고 일어섰답니다.
심:종중 재산 내놓으라는 이야기 말이오?
오:청송 심씨 아주머니들이 처음으로 불을 댕겼답니다. 그 뒤로 용인 이씨, 성주 이씨, 경주 김씨, 반남 박씨 아주머니들이 들고 일어섰는데, 손이 부르트도록 제삿상 차리고 오래비 공양까지 하던 누이들한테 눈알 부라리기 일쑤였다지요. 그래서 법정까지 갔는데, 아예 내치거나, 몇 푼씩 받고 떨어지라고 그랬답니다.
심:우리 청송 심씨 여자들이 원래 사리가 밝습니다. 세종비 소헌왕후, 명종비 인순왕후에 경종비 단의왕후까지, 국모를 세 분이나 내지 않았겠소. 듣자 하니, 몰래 모여 종중 땅 갈라먹고 출가외인에게 재산 안 주는 것이 전통이니 하는데, 어느 허릅숭이들이 씨알 안 먹히는 소리들을 해대는지. 내 시대에는 여남차별이란 말이 없었소. 엄연히 나랏법에 딸 아들에게 공평히 재산을 나누지 않은 자는 엄히 다스리겠다고 밝혀놓았는데 혼인한 딸은 일가가 아니라니, 지나던 소가 웃을 일이지. 나는 혼인하고 네 해를 친정에서 살았고 분가하고도 무시로 오가며 살았으니, 도대체 어디서 나온 전통이고 미풍양속이오. 문사들은 무얼 하며, 식자들은 무얼 하는 겐지. 그릇된 것을 바로 잡지 않고 어찌 식자라고 할 수 있을꼬.

뒤로 가는 지식인 “엘리트의식 미망에서 깨어나라”
오:있긴 있는데, 뒤를 보고 가는 문사가 있다지요. 이혼이 훈장이냐고, 장씨인지 누군지, 평생 수절하고 외롭게 살다 간 어르신 시대 아주머니를 본받으라고 쓴 책이 있대요. 얼마 전에는 바로 그 작가의 대문 앞에다 책을 쌓아놓고 장례식을 벌인 일도 있었답니다.
심:저런, 과부보고 수절하랬다고 그런 것이오?
오:아뇨. 그건 오래 전 일이고, 요번에 언론사 세무조사를 하는데, 뒤 구린 신문을 싸고돌았다네요. 사람들은 독재하고 사람 죽인 정권 때는 한 마디 안 하더니 웬 뒷북이냐고, 작가는 또 빨갱이 아니냐고 받아치면서 그렇게 됐답니다. 나이 많은 여자 작가는 작가를 우습게 아느냐고 화를 냈답니다. 듣고 있자니 기분이 조금 나쁘대요. 저야 뭐 책이라고는 토정비결하고 가계부밖에 모르지만, 작가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리 노발대발하나 싶기도 하구요. 전남편한테 징글맞게 질린, 그 뭐냐 엘리트의식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부모자식간에도 잘잘못을 따지는데, 읽어달라고 책 써내는 작가들한테 말 한마디 못한대서야 쓰나요? 심:문사와 식자들은 언제 말을 할 지를 가리고, 말을 아껴야 하는 것인데…그래도 시대가 변하기는 했나 보오. 언문 깨친 이도 적었으니 문사에게 대거리할 수나 있었나. 우리야 그저 읽어주는 대로 새겨들었을 뿐이지.
오:식자들 말에 발등 찧기 쉽지요. 멀리 갈 것도 없이 15년을 속았으니까요. 입 여는 족족 헛소리인 것도 모르고. 뭔가 미심쩍어하면 무식한 여편네니 어쩌니…죽어지낸 세월이 너무 억울한 거 있지요. 여편네 찍어누르려는 놈들, 여자 말이라면 귓등으로도 안 듣는 식자들, 요새는 그 알량한 소갈탱이가 다 들여다보여요. 웃겨 증말.
심:옛부터 학문에 밝은 어른들은 무엇보다 자기를 낮출 줄 알았다오. 타고난 세월이라 어쩔 수 없겠지만, 지금도 못내 아쉬운 것은 문리를 많이 깨치지 못한 것이라오. 그에 비해 요즘은 여자도 학자가 되고 선생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세상이오.

조폭과 정치, ‘배제’와 ‘차별’의 권력
오:그게 또 그렇지가 않데요. 공부해서 박사 되면 뭐합니까. 교수도 안 시켜주지, 대기업이고 중소기업이고 여자는 집에서 애나 보라지, 말로만 능력 평등, 정치고 경제고 좋은 자리는 죄다 남자들 차진데 여자들 괴로운 심정을 손톱만큼이나 알겠어요? 정치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내년 선거 땜에 벌써부터 난리들이랍니다. 누구는 벌써 대통령 된 것처럼 시덥잖게 굴질 않나.
심:말로만 여자를 위한다지만, 과거 시험 한 번 볼 수 없었던 내 시대보다야 여자 손으로 임금도 뽑는 지금이 훨씬 좋지 않겠소. 주어진 것을 현명하게 쓸 줄 아는 것도 지혜지요.
오:맞습니다. 예전에야 남편이 시키는 대로 아무나 뽑았지만, 인제 찬찬히 봐야지요. 아줌마들 모아놓고 굽신굽신하다가 뽑아놓으면 얼굴 싹 바뀌지는 않을지. 요즘 조폭이라고, 떼거리로 몰려다니면서 나쁜 짓 하는 무리들이 있는데, 걔네들 노는 것이 꼭 정치판하고 똑같다는 생각이 들데요. 힘 센 놈한테는 설설기고, 약한 사람 짓밟고, 돈 있는 곳으로 몰리고, 안되면 떼쓰고, 맘에 안 들면 두들겨 패는 것이 그렇거든요.
심:그럼 그 둘 다 不汗黨 아니오?
오:어떤 사람들은, 뭐 말라비틀어진 의린지 조폭은 의리가 있으니 낫다 그러고 정치판은, 깡패새끼들하고 저희를 비기냐고 거품을 물테지만, 엎어치나 메치나에요. 서로 권력을 갖겠다고 저희들끼리 치고 박고 하거든요. 그런데 그 권력이 뭐겠어요. 짓누르려는 힘 아닌가요. 여자들, 약한 사람들, 없는 사람들 빼고 지들끼리 맛난 거 먹겠다는 거 아닌가요.
심:어느 시대에나 천리를 모르고 날뛰는 불한당들이 있지만, 저들이 백년의 영화를 누린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키우겠소. 그러니 화를 삭이고, 마음을 크게 먹고, 그대로 가시오. 벌써 예까지 오지 않으셨소.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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