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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쓰나미’ 몰려올까 … 학술논문 일일이 확인 필요
저작권 ‘쓰나미’ 몰려올까 … 학술논문 일일이 확인 필요
  • 박상주 기자
  • 승인 2008.05.13 13: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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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저작권 ‘인용동의’, 어떻게 하나

10년 전 미국, 최희섭 전주대 교수(영문학)는 한 미국교수와 영시해설서 출판을 의논했다. 미국 교수가 꺼낸 첫 마디는 “수많은 시를 전재해야 할 텐데 수많은 저자들 동의를 다 받아낼 자신이 있느냐, 시인들과 먼저 얘기하는 것이 좋겠다”였다. 번역, 평론에 들어가기도 전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최 교수는 출판을 포기했다.
최 교수는 “한국의 어느 학회에서도 평론을 하면서 그런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없었다. 미국에서는 인용동의가 가장 최우선 문제”라면서 “인용동의는 한국 학계가 신경 쓰지 않았거나 회피해온 것이지 세계적으로는 저작의 기초 절차에 속한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 학회 대부분의 연구윤리 규정에도 인용동의 관련 항목은 찾아보기 어렵다.

영문학을 전공하는 김 아무개 교수는 한 미국 시인에 관한 책을 쓰기위해 시 구절을 인용하려고 했다. 인용동의절차를 거치기 위해 저작권을 가진 미국 출판사와 접촉했다. 출판사는 단어 당 100달러정도의 사용료와 인세 0.5%를 요구했다. 그는 “학술목적이고 기대 수익이 거의 없다”고 설명했지만 출판사는 요지부동이었다.

□ 왜 인용동의에 무심했나=학자들이 인용동의에 무신경한 이유는 ‘학술목적 논문에서 인용동의는 필요없다’는 인식 때문이다. 한국 법률도 이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2006년 개정된 저작권법 제28조 ‘공표된 저작물의 인용’을 보면, ‘공표된 저작물은 보도·비평·교육·연구 등을 위하여는 정당한 범위 안에서 공정한 관행에 합치되게 이를 인용할 수 있다’고만 돼 있다.

지난해 합의된 한미FTA가 비준을 거치게 되면, 저작권법령도 미국 쪽에 맞춰야 한다. 국회 비준을 앞두고 있는 한미 FTA 합의내용 중 ‘저작권 및 저작인접권’과 관련된 내용은 제18.4조에 해당한다. 전문가들은 지적재산권 합의과정에 대해 “사실 한국 쪽에서는 주장한 것이 거의 없고, 미국 쪽 규정상 차이가 나는 것을 맞춰준 면이 크다”고 전한다. 이에 따라 미국 법과 같이 ‘인용’에 대한 경제적 논리가 저작권법에 가미될 것으로 보인다.

이대희 고려대 교수(지적재산권법)는 “FTA는 표절문제보다 더 강력하게 지적재산권 문제를 제기한다”면서 “저작권이 소멸된 저작물일 경우에도 출처를 밝히지 않을 경우는 표절이 되기 때문에 인용의 원칙은 언제나 꼼꼼히 지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저작권 위원회 관계자는 “입법안을 올려놓은 상태다. 국회에서 어떻게 할지는 지켜봐야 한다”면서 “FTA에서 출판과 관련해 민감하게 관심을 보일만한 것은 없었다해도 원저자 허락을 일일이 받아야 하는 것은 현행 법률로도 당연하다”고 말했다.

□학술논문 마음대로 인용해도 되나=현재 국내법으로 학술연구 목적의 인용은 무한정 사용가능하다. 그러나 외국 저작물을 인용하거나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내게 되면 인용 동의가 문제가 된다. 많은 학자들의 예상과 달리, 학술지도 엄연히 상업적 이득을 취한다. 교수들이 자유롭게 이용하는 학술논문 서비스도 대학이나 대학도서관이 학술지 발행 출판사에 사용료를 대신 지불하기 때문이다.

외국 학술지를 출판하는 학회와 출판사는 저자들로부터 논문을 받으면서 저작권 전체를 넘겨받는다. 학회 및 출판사들은 이 권리를 유지해 각종 저작권을 행사, 인용된 저작물의 사용료와 인세를 받아 수익을 창출한다. 다만, 학술·연구·교육적 용도로 사용할 경우는 융통성을 발휘해 눈감아 줄 뿐이다.
박준우 서강대 교수(지적재산권법)는 인용 분량에 대해 “표·그림·사진 등은 일부만을 따와서 허락 없이 쓰면 절대 안 된다. 텍스트는 일상적 문제가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5~6줄 정도라면 각주에 출처를 밝히고 쓰면 된다. 그러나 여러 문단의 내용을 조금씩 여러 번 인용해 쓰게 되면 실질적으로 원저자의 내용이 돼 문제 소지가 있다” 말했다.

김형순 인하대 교수(신소재공학부)는 하버드대 하워드 교수의 말을 빌어 “미국 출판계 관행에 따르면, 논문 전체 대비 10%까지를 인용 분량으로 하면 인용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10%를 넘어가면 ‘위험수위’로 출판사에게 인용사실을 분명히 말해야 한다. 20%가 넘어가면 완벽하게 저작권을 침해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학술목적 인용 허용에 대해서 “학자들이 잘못 알고 있다. 학술지에 게재되는 논문도 인용 허락을 받아야 한다. 학술목적과 학술지를 구분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창의성 여부를 따지기 때문에 자기표절도 문제로 삼는다. 다른 사람의 창작물을 마음대로 가져다 쓰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인용동의, 출판계 반응은=출판계는 인용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지나친 확대해석”이라는 반응이다. 이승우 길 기획실장은 “학술적인 목적으로 쓴 논문 인용에 대해서는 출판을 해도 대체로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논문까지 일일이 인용을 확인해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건 출판계 입장으로는 지나친 확대해석”이라고 말했다.
출판계에도 아직까지 인용의 방안, 인용의 양 등과 관련한 가이드라인이나 전문가들 간 논의가 부족한 상태다. 이 기획실장은 “지적재산권법 관련 전문가가 별로 없고, 같은 사안을 놓고도 전문가들끼리 매번 다른 결론들을 내고 있어 답답하다”고 털어놨다.

상업적인 출판도 외국 저작물 인용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특별히 큰 문제로 삼지는 않았다. 교수와 출판사가 출판계약을 맺을 때에도 인용동의에 관한 책임소재는 언급하지 않았다. 국내 저작물은 간단히 전화나 편지 등을 통해 인용동의를 대부분 받지만 외국 저작물의 인용동의는 쉬쉬하고 있는 상황이다.
해외 저작물은 인용을 대가로 출판수익 대비 사용료를 요구한다. 영세한 출판사들은 외국 출판사들의 눈을 피해 인용사실을 숨기기도 한다. 한 출판인은 “몇 권 팔릴 지도 모르는데 출판 전에 책 가격에 영향을 주는 인용료까지 챙겨줄 여유가 없다”면서 “인용허가를 받으려면 우리가 인용했음을 알려줘야 한다. 좋은 방식은 아니지만 차라리 아무 말 없이 책을 내는 방법을 취한다”고 털어놨다.

□인용동의, 어떻게 해야 하나=김형순 인하대 교수는 “학술 목적으로 인용동의를 받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고 말한다. 외국의 경우 출판사마다 저작권 전담 직원이 있고, 통상적인 일이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거나 까다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논문을 쓰다가 표, 그림, 사진, 텍스트를 인용하고 싶다면 원본을 발행한 출판사를 인터넷으로 찾으면 된다. 미국의 학술출판사들은 대부분 논문을 받으면서 저작권도 모두 넘겨받기 때문에 인용하려는 사람은 출판사만 통하면 된다.

한국은 저작권 외에 저자 인격권을 인정하고 있다. 저작권을 출판사에 넘겨도 저자는 수정이나 향후 저작물 사용의 일부 권리를 가진다. 따라서 한국 저작물을 인용하려면 출판사보다 저자에게 인용동의를 받는 것이 확실하다.
인용동의는 주로 팩스, 서류나 이메일을 통한다. 주로 포함되는 내용은 ‘논문의 어느 부분에 얼마 분량으로 어떤 독자들을 대상으로 글을 쓴다’는 사실을 알리는 정도의 수준이다. 출판의 경우에는 ‘어떤 내용을 어느 분량으로 인용하는데, 발행되는 책은 어느 나라에서 몇 부로 인쇄돼 어느 나라 독자들에 한정해 읽힐 것’ 등을 알려주면 된다.

미국의 출판사들은 인용하려는 사람의 답변을 통해 인용의도를 살핀다. 목적이 순수 연구·교육 등이라고 판단되면 융통성있게 처리해 무료나 저렴하게 인용할 수 있도록 한다. 상업적 용도의 출판일 경우는 수익률 등을 감안해 협상해야 한다. 어떤 경우는 몇 개, 몇 회까지는 무료로 하고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건당 사용료를 받기도 한다.
그림, 사진, 표는 단 하나만을 쓰더라도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 한다. 문장 속에 있는 텍스트 인용은 분량이나 용도에 따라, 국가에 따라, 출판사에 따라 각기 다르다. 특히 시를 인용할 경우는 분량과 달리 남다른 의미에 따라 문자당 가격을 책정하기도 한다.


외국 논문 등을 편집해 대학원 교재로 사용할 경우는 해당 논문을 발행한 출판사에 강좌 수강생 수와 복사본의 수, 편집되는 교재의 목차 등을 알려주고 각 교재에 출판사의 허락을 받았음을 명기해 해당 출판사에 1부 정도를 보내주면 허락을 받을 수 있다.
김 교수는 “직접 해봐도 그리 어렵지 않다. 일일이 확인해 동의를 받아내는 것을 귀찮아하지 말고 저술 작업의 하나로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상주 기자 sjpark@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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