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10:50 (토)
“사전밖에 모르셨던 분, 애들 고생 생각하면 눈물”
“사전밖에 모르셨던 분, 애들 고생 생각하면 눈물”
  • 김혜진 기자
  • 승인 2008.05.13 13: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망인 이용월 여사(76세) 인터뷰

반평생을 동고동락한 동반자에게 비친 고 신기철 교수의 모습은 ‘그저 사전밖에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친구 만나는 일도 없이, 특별한 취미도 없이 눈만 뜨면 연구소에 출근해서 밤 8시쯤 퇴근하는 것이 평생의 일상이었어요. 토요일, 일요일 심지어 명절도 없었고, 일탈이라고는 출근 전 운동 삼아 들르는 공중 목욕탕행이 전부였어요.”

사전에 대한 고인의 집념은 일제 치하에 있던 춘천고등학교 시절 상록회 사건으로 2년 6개월을 보낸 형무소에서 시작됐다. 17세 미령한 나이였지만 그림형제의 『독일어 사전』을 보고 사전에 뜻을 품었다고 한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표준국어사전』을 집필하던 중 성균관대 교수직을 맡기도 했지만, 사전에 대한 집념으로 교편을 접었다.

『한국문화대사전』을 집필하던 시기는 고인을 비롯해 가족들, 연구원들 모두 숨 가쁜 시절이었다. “카드 정리로 시작했어요. 어휘 하나 가지고 며칠씩 걸리기도 하고, 연구원들과 저까지 백방으로 자료 찾으러 뛰어다녔습니다.” 모래내에 위치한 연구소는 시간이 지나면서 빼곡한 자료로 발 디딜 곳이 없었지만, 그 자료의 양 때문에 이사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한다. “1층에 약국이 있었는데, 자료 때문에 무척 번거로웠을 텐데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어요.” 작은 관심이 큰 도움보다 때로는 더 고마운 법인지, 이 여사는 사전이 출간되자마자 1등으로 약국 주인에게 갖다드렸다고 웃는다.

한편으로 이 여사에게는 가슴 쓰리게 기억되는 시간이었다. “북한 자료를 찾기 위해 수차례 미국을 찾았지만 자료를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죠. 의자도 없는 책방에서 하루 종일 책만 살폈어요. 너무 고생을 하시다 돌아가셨죠.” 힘들고 고된 나날이었다. 지병도 없이 건장했던 분이 갑작스레 미국의 한 서점에서 쓰려져 몸져누웠기에 그 안타까움은 더욱 크다. 2001년 출판사에 원고를 넘기자마자 며칠만 쉬어보자며 찾은 미국행에서 황망하게 당한 일이었다.

고인의 뜻을 가장 잘 알았기에 사전을 향한 집념에 마음을 보탰지만, 또 그 때문에 사는 내내 애석함을 삭여야 했다.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힘들었죠. 광복회에서 나오는 10만원이 채 안 되는 돈으로 생활했는데, 자식들 등록금 납부할 때마다 찾아가야했던 은행문턱이 너무 높았어요. 몇십년씩 가정생활은 나 몰라라 하는 남편이 원망스럽기도 했지요.” 그 시절을 회상하던 이 여사는 “사전 때문에 애들까지 고생시킨 것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파요”라는 대목에서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래도 사전이 빛을 보도록 가장 바란 것은 가족들이었다. 사전 첫머리에 실린 가족들의 헌사가 이런 마음을 담았다. “아버님 평생의 숙원사업이었던 한국문화대사전이 발간돼 영전에 바칩니다. 『표준국어대사전』과 『새우리말큰사전』에 이어 『한국문화대사전』으로 이어지는 아버님의 큰 발자취가 후학의 학문 연구에 밑거름이 되고, 민족정기를 널리 떨칠 것입니다.” 나쁜 남편, 나쁜 아버지였지만 아름다운 집념의 고인이었다.          

김혜진 기자 khj@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