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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17세기 오페라 무대 … 황후의 悲哀 얼룩져
가장 큰 17세기 오페라 무대 … 황후의 悲哀 얼룩져
  • 교수신문
  • 승인 2008.04.07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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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재의 ‘오페라로 읽는 서양 근대의 편린’ ]벨라스케즈의 공주님과 「황금 사과」

 미셸 푸코는 그의 『말과 사물』 첫 장에서 벨라스케즈의 ‘시녀들’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펼치고 있다. 맞은 편 벽에 걸린 거울 속에 어렴풋이 비친 부왕 내외의 모습을 화가 자신이 그리고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한 복판에는 이 글의 주인공인 어린 공주 마르가리타 테레자가 있다. 벨라스케즈가 그린 마르가리타 공주의 또 다른 초상화 역시 우리들에게 친숙한 그림이다. 푸른 옷을 입은 여덟 살짜리 공주의 앳된 모습이 담겨져 있는 이 초상화는 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와의 결혼을 위해 비엔나로 보내진다. ‘시녀들’에서 거울에 비쳤던 부왕 내외가 스페인의 왕 펠리페 4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 안나이고, 레오폴트 1세는 바로 안나 왕비의 친동생이다. 황제는 자신의 조카와 결혼하게 됐던 셈이다. 레오폴트 1세의 아버지 페르디난트 3세 자신도 펠리페 4세의 누이동생 마리아와 결혼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근친결혼은 가히 그 촌수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눈으로는 큰 문제가 될 법하나 당시로서는 이런 결합이 별 문제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군주가 아닌 평민의 경우였더라면 가장 큰 걸림돌이었을 교황의 특별 허가조차 별 어려움 없이 받아낸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지난 글에서 마자랭의 이태리 오페라 기획 마지막 작품이었던 카발리 오페라 「사랑에 빠진 헤라클레스」가 프랑스 루이 14세와 스페인 공주 마리아 테레자와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이미 살펴본 바 있다. 펠리페 4세의 딸 마리아 테레자와 결혼한 루이 14세가 펠리페 4세의 친누이 오스트리아 안느와 루이 13세 사이에서 태어났으므로, 이 결혼 역시 종남매 간의 근친결혼이었던 것이다. 펠리페 4세의 맏딸 마리아는 원래 레오폴트 1세의 누나였던 스페인 왕비에 의해 동생의 신부 감으로 점 찍혀 있던 상태였다. 그러나 국가의 필요에 따라 피레네 조약의 일환으로 프랑스에 시집보내졌다. 마리아 공주는 펠리페 4세와 프랑스의 이사벨 드 부르봉의 첫 결혼의 소산으로 마리아의 동생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가 1646년 맹장염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공주만 홀로 남은 것이다. 이사벨 왕비의 사후 펠리페 4세는 앞서 언급했던 황제 페르디난트 3세의 딸이자 레오폴트 1세의 누이인 마리아 안나와 재혼하는데 마르가리타 공주와 왕위를 잇게 될 외아들 카를로스 2세는 바로 이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자녀들이다.


카발리의 오페라처럼 체스티의 오페라 「황금 사과」 역시 황제 레오폴트 1세와 스페인 공주 마르가리타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이 오페라들은 르네상스 이래 늘 있어왔던 군주들의 또 하나의 결혼 축하 행사로 가볍게 넘겨버릴 수도 있지만, 이들을 둘러싼 역사적, 정치적 얽힘은 그리 단순하지 만은 않다. 이복누이들과 결혼한 사이였던 거의 동년배의 루이 14세와 레오폴트 1세는 비록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평생토록 라이벌로 지낼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황제의 선조 카를 5세가 1525년의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를 포로로 삼았던 이래 1815년의 비엔나 회의까지 줄곧 지속됐던 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랑스 왕가 사이의 유럽의 주도권 쟁탈을 위한 줄기찬 투쟁의 큰 흐름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30년 전쟁 후반 프랑스가 신교도 측을 후원함으로써 파리와 비엔나의 관계는 더욱 악화됐지만, 이런 정치적 대립이 문화적 소통까지 막았던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발레 의상을 갖춰 입은 황제 레오폴트 1세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는 원활했던 문화적 소통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데, 그림엽서로도 제작될 만큼 친숙한 이 초상화를 보면 곧 ‘밤의 발레’에서 태양을 상징하는 발레 의상을 갖춰 입은 루이 14세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당시 발레가 각국의 군주들이 너도나도 직접 참여할 만큼 인기가 높았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기록들 중 하나인 이 그림을 황제의 평상 복식을 한 레오폴트 1세와 초상화를 비교해 보노라면 당시 황제 또는 군주라는 존재의 실상이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를 곰곰이 되새겨보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눈으로 역사를 돌이켜보면 1660년의 프랑스 왕 루이 14세와 스페인 마리아 테레자 공주와의 결혼이 머지않아 다가올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몰락을 예견하는 중차대한 역사적 전조였음을 깨닫게 된다. 비록 이 결혼이 마리아 공주가 스페인 왕위계승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성사된 것이긴하나, 이 조건은 지참금의 지불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게다가 과연 왕위계승권이 조약에 의해 버릴 수 있는가 하는 법적인 문제 또한 내재돼 있기 때문이다. 약속된 지참금을 지불하기에는 이미 너무도 쇠약했던 스페인의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던 루이 14세는 끈질기게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동원했다. 마침내 17세기 초 자신의 손자 필립 앙주를 스페인 왕 펠리페 5세로 등극시키는 데 성공했다.

펠리페 4세가 죽은 다음 해인 1666년에 있었던 레오폴트 1세와 스페인의 마르가리타 공주와의 결혼은 이러한 루이 14세의 야심에 미리 쐐기를 박기 위해서라도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을 둘 다 통치하고 있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대를 반드시 이어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에 따라 신속하게 성사됐다. 이렇듯 중차대한 의미를 지닌 결혼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축하 행사의 일환인 프란체스코 스바라의 대본에 안토니오 체스티가 곡을 붙인 오페라 「황금 사과」의 공연에도 전례 없는 규모의 자금과 인력이 아낌없이 투입됐다. 그러나 특별히 이 공연을 위해 로도비코 부르나치니의 설계로 건립된 극장 자체의 완공이 지연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결혼식 두 해 뒤인 1668년에 가서야 황후의 생일 축하를 위해 비로소 무대에 올려질 수 있었다. 역시 부르나치니가 고안한 24장면으로 이뤄진 정교하고도 교묘한 무대 장치를 배경으로 이틀에 나누어 여덟 시간 동안 펼쳐졌던 이 공연에는 48명의 노래하는 인물들이 등장했다. 이처럼 다양한 인물들의 등장은 17세기의 오페라 무대에는 두 번 다시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의 것이었다.

1660년대의 오페라들에서는 이미 프롤로그에서 나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리스 신들에 대한 언급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데 반해 스바라의 대본은 일반적으로 ‘파리스의 심판’이라고 알려진 그리스 고전 신화에 바탕을 뒀다. 당시 일반적이던 세 막이 아니라 다섯 막으로 구성된 고전 비극의 형태를 따르고 있는 것 또한 특이한 점이다. 특히 마지막 막이 끝난 후 ‘리첸차’라고 부르는 헌사가 뒤따르는데, 이 모든 특징들은 당시의 최신 유행에 조금은 뒤떨어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황금 사과가 관심의 초점이 되는 줄거리를 선택한 데는 비엔나의 별명이 바로 ‘황금 사과’였다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직접적인 동기야 어찌됐든 군주를 위한 모든 공연들이 그러하듯 마지막에는 군주 내외의 영광과 덕을 드높인다는 궁극적인 목적에 충실한 결말로 마무리된 줄거리가 조정되게 마련이다. 이 오페라에서는 원래 신화에 스바라가 창안한 등장인물들이 뒤섞여 한없이 이어질 듯한 헤라와 아테나, 그리고 아프로디테 간의 각축이 마침내 제우스에 의해 황금 사과가 황후 마르가리타에게 바쳐지는 것으로 결말지어진다.

「황금 사과」로 대표되는 거창한 축하 공연과 후사를 보기 위한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르가리타 황후와 레오폴트 1세 사이에서 태어난 세 자식들 중 딸 하나만이 살아남은 가운데 황후는 1673년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사랑스러운 마르가리타 황후를 잊기 어려웠으나, 대를 이어야 할 의무가 있었던 레오폴트 1세는 같은 해 친척인 티롤의 마지막 영주 페르디난트 카를의 딸 클라우디아 펠리치타스와 재혼했다. 그 결과 티롤을 황제의 통치하에 두게 됐으나 이 결합을 통해서도 왕자는 얻지 못한 채로 또 다시 황후가 죽자 레오폴트 1세는 팔츠-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를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아 비로소 두 왕자를 얻게 된다. 후에 요제프 1세와 카를 6세로 황제위에 올랐던 이 두 아들들은 1700년 카를로스 2세의 죽음으로 야기된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의 당사자들로 루이 14세의 손자와 각축을 벌인다. 지금은 우선 루이 14세의 궁정으로 다시 돌아가 륄리가 어떻게 프랑스의 서정 비극을 확립하게 됐는가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 한국교원대·음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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