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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보편주의’를 향한 지적 분석의 역사화
‘보편적 보편주의’를 향한 지적 분석의 역사화
  • 교수신문
  • 승인 2008.03.31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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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번역 중입니다] E. 월러스틴의 『European Universalism: The Rhetoric of Power』(The New Press in N.Y, 2006)

2003년 이라크를 상대로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군이 벌인 전쟁의 명분은 ‘자유의 확산’이었다. 그러나 웬만한 양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것이 단순한 수사에 불과함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수사가 기본적으로 남을 설득하는 데 목표가 있다면, ‘자유의 확산’이라는 수사는 그 수사의 허구성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오히려 ‘반수사’에 가깝다 하겠다. 19세기와 20세기에 걸친 제국주의 팽창에서도 서구 열강은 ‘문명의 빛’을 전 세계에 확산시킨다는 동일한 취지의 명분을 내걸었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이성’ 이나 ‘자유’ 혹은 ‘인권’ 등 보편주의 담론은 그 자체로 ‘특수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월러스틴의 이 책은 이러한 ‘보편주의의 정치성’의 문제점을 낱낱이 밝혀내면서 그가 ‘보편적 보편주의’라고 부르는 진짜 보편주의에 대한 모색을 담고 있다.

유럽 보편주의와 보편적 보편주의의 싸움을 현재 세계의 핵심적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파악하면서 이 싸움의 결과가 향후 세계체제의 모습을 결정하는 주요한 변수가 됨을 역설한다. 그런 점에서 분단체제의 현실을 살아가면서 북한 ‘인권’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곤혹스러움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사유하면서 지혜로운 해결책을 궁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야만’에서 ‘인권’으로 수사의 얼굴을 탈바꿈하다서구 열강이 자본주의 세계경제를 형성하는 데 침략적 팽창주의가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팽창은 문명의 진보, 경제적 발전을 확산시킬 것이라는 명분으로 진행됐다는 점도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책의 초반부에서 월러스틴은 이러한 정당화 담론과 사회적 실상 사이의 괴리가 상당했음을 상기시키면서 16세기 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과 관련된 도덕성 논쟁의 한 장면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것은 세풀베다-라스 까사스 사이의 논쟁인데, 이들의 논쟁에서 핵심사항은 “누가 개입할 권리를 가지고 있고, 언제,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였다.

이는 오늘날의 세계정치와 관련해서도 여전히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된다. 따라서 과거의 논쟁에서 부각된 쟁점들과 주장들을 살펴보는 일은 오늘날 현실을 역사적으로 인식하는 일이기도 하다. 세풀베다는 서구열강의 개입을 위한 네 개의 기본적인 근거들을 내놓는데 타자의 야만성, 보편적 가치에 위배되는 관습들의 근절, 잔인한 타자 속의 무고한 양민들 보호, 그리고 보편적 가치의 전파가 그것이다.

월러스틴은 20세기 후반의 탈식민화 결과로 국가간 체제에 중요한 변동이 일어나 세풀베다가 제시하는 개입의 근거들이 그 유효성을 상실하기는 했지만, 새로운 수사적 언어가 등장해 개입을 정당화했다고 주장한다. 복음화 사명이나 문명화 사명은 종적을 감췄지만 이제 ‘인권’이라는 개념이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월러스틴은 이 ‘인권’ 개념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인권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는 아무런 정부간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음을 들춰낸다. 이렇게 ‘개입’의 근거로 서구에 의해 전유된 보편주의 가치란 특정한 세계체제에서 지배층이 만들어 낸 사회적 산물이기 때문에 지금보다 훨씬 평등한 체제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강자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넘어서 인간성의 새로운 윤리적 기획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월러스틴은 유럽 보편주의가 근거하고 있는 인식론적 토대를 점검하는 데 힘을 쏟는다.

우선적으로 월러스틴은 오리엔탈리즘을 문제삼는다.
인문학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이 그리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탈식민주의’의 영향으로 오리엔탈리즘의 인식론적 근거가 상당히 취약하다는 사실이 충분히 밝혀졌다. 문제는 기존의 인식론적 틀에 대한 해체와 비판을 기반으로 월러스틴이 주장하는 것처럼 어떻게 “우리 모두가 비오리엔탈리스트가 될 수 있도록 해주는 그런 틀에 대한 합의”를 이룰 수 있는가이다.

월러스틴은 모든 가치체계들에 대한 동등한 타당성을 주장하는 급진적 상대주의가 답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자신의 기준에 의거, 상대주의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자기모순적인 주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른 답은 유럽중심적 보편주의의 위계질서를 전도시키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비오리엔탈리스트가 될 수 있는 방식으로 지식의 구조를 재구성할 것인가. 월러스틴의 답은 이렇다.

“비오리엔탈리스트가 되는 것은 우리의 지각과 분석과 가치진술을 보편화해야 할 필요성과, 자신들이 보편적인 것을 내놓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특수주의적 지각과 분석과 가치진술을 잠식하는 것에 맞서 그들의 특수주의적 뿌리를 지켜내야 할 필요성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즉 특수한 것의 보편화와 보편적인 것의 특수화라는 변증법적 교환을 통해 새로운 종합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답은 지적 곡예에 가깝다고 할 수 있고, 어떤 실천적 대안이 되기에는 다소 막연한 감이 있다. 어찌 보면, 익숙해져 있는 지적인 틀을 벗어나는 최초의 사태는 이런 막연함을 동반하기 마련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창조적 태도가 필요한 지도 모른다. 또한 매순간 모든 현상을 지배하는 객관적 법칙을 찾는 데 전력을 기울이는 과학적 보편주의가 새로운 유럽 보편주의의 화신으로 등장해 유력한 인식론으로 자리 잡으면서 창의적 발상의 여지가 그만큼 줄어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월러스틴이 대학 문제를 집중 거론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학문 분과주의 불러온 지식구조의 붕괴
대학의 이념과 기능에 대해 오늘날 논란이 분분한데, 그러한 논란은 대학이 사회의 요구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대학상이 크게 변화됐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최근에는 대학이 취업준비기관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이른바 ‘대학의 기업화’가 촉진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학문과 배움의 성격도 상당히 달라져 학문분야 간의 통합과 분야 내의 분화가 혼재하고 있다. 월러스틴에 따르면 이러한 변화는 실제로는 19세기 중반 이후로 가속화됐던 현상이다.

대학은 세속 지식 전체의 거점으로써 사회가 요구하는 지식을 생산해내는 역할을 떠맡았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학문 분야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으로 분리됐고, 이른바 ‘두 문화’의 분리가 제도화됐다. 진리 추구는 오로지 경험과학을 바탕으로 법칙을 정립해나가는 과학자의 영역이 됐고, 인문학자들은 선과 미의 판정을 추구하는 고립된 집단이 됐다. 그 결과 인문학이 수행하는 윤리적 비판의 가능성과 객관성은 과학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평가절하 됨으로써 강자들은 윤리적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사회과학은 프랑스 혁명이 몰고 온 정상적인 사회적 변화 양상을 탐구하고 그 변화의 방향을 잡아 줄 정책개발의 필요성 때문에 탄생했으나,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이에서 애매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월러스틴은 68혁명 이후로 이러한 근대 세계체제를 떠받히는 지식구조의 세 기둥이 견고함을 상실함에 따라 대학의 제도적 위기가 발생했음을 지적한다. 그 위기와 병행해 두 문화의 분리가 동요되기 시작함에 따라 자연과학에서 복잡성 연구가, 인문학에서 문화연구가 등장했는데, 이러한 지식운동은 다른 지점에서 출발했지만, 여러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는 것이다.

월러스틴은 지식구조의 이러한 새로운 구심적 경향이 재통합된 인식론, 즉 ‘모든 지식의 사회과학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는다. 물론 이러한 인식론의 구체적인 모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것이 ‘배제되지 않는 중도’론의 형태를 띨 것임을 암시하는 가운데 지식인의 의미와 역할을 재규정하는 방향으로 논의의 초점을 맞춘다. 기존 세계 질서를 정당화하는 유럽 보편주의에서 ‘보편적 보편주의’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진리추구에서는 분석가로서, 선과 미의 추구에서는 윤리적 개인으로서, 그리고 진선미를 통합하는 데 있어서는 정치가로서 활동하는 지식인들이 이 세 가지 차원의 과제들을 지혜롭게 통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월러스틴은 무엇보다도 지식인들이 다방면의 지식을 갖춘 학자들(generalists)이 돼야 함을 역설한다.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이행기를 이해하는 데 개별적인 일반지식을 적용시킬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방식의 하나로 월러스틴이 제시하는 것은 우리의 지적인 분석을 역사화 하는 것이다. 이는 지식을 연대기적으로 무한히 축적하는 일도 아니고 설익은 상대화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바로 가까이에서 연구하고 있는 현실을 보다 큰 맥락, 즉 그 현실이 작동하고 있는 역사적 구조 속에 위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지식인들은 세계체제의 특정한 시기인 구조적 위기 혹은 이행의 시기를 분명히 이해하고 미래를 위한 우리의 선택지들을 제시해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월러스틴도 인정하듯이 이런 과제를 추구하는 지식인들이 인기가 있을 리는 만무하다. 강자들은 이들의 작업에 당혹해할 것이고 강자들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지식인들의 우유부단함과 조심스러움에 너그럽지 않을 것이며 노동계급은 지식인들에게 그들의 분석을 소통 가능한 언어로 번역해 달라고 요청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월러스틴의 주장에 동의한다면 지식인들은 세계체제의 이행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윤리적 선택을 분명히 하고 정치적 진로들의 가능성을 조명해 주는 일을 끝까지 지속해야 할 것이다. 지식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역할에 대해 숙고하고 모종의 선택을 해야 할 시점이 임박해 있는 것이다. 월러스틴의 이 책은 오는 6월경 창비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김재오 / 영남대·영문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윌리엄 블레이크의 묵시록 다시 쓰기’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 ‘아놀드의 사상: 민주주의, 비평, 그리고 교양’ 등이 있으며, <안과밖> 편집위원을 역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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