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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紀의 종교재판과 함께 한 공연
世紀의 종교재판과 함께 한 공연
  • 이남재 /한국교원대
  • 승인 2008.02.25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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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재 교수의 ‘오페라로 읽는 서양 근대의 편린’]로마의 바르베리니 극장과 ‘산 알레시오’

피렌체와 만토바에 이어 초기 궁정 오페라의 꽃을 피웠던 곳은 바로 반종교개혁의 기세가 한창 드높던 로마였다. 16세기에서 17세기로 넘어갈 무렵 로마에는, 명성과 자부심은 여전했으나 수입과 권력은 줄어들고 있던 오르시니, 콜론나, 사벨리, 가에타니, 치지 같은 구 귀족 가문들과 더불어, 주로 교황과의 인척 관계를 바탕으로 권세와 부를 누렸던 알도브란디니, 바르베리니, 보르게제, 파르네제, 로스필리오지 같은 신흥 가문들이 병존하였다. <산 알레시오>는 이들 중 바르베리니와 로스필리오지의 두 신흥 가문들과 직접 연관이 있다.


마페오 바르베리니는 1523년 교황 우르반 8세로 선출돼 1644년까지 재직했으며, 그의 두 조카들은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큰 조카 추기경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는 ‘네 분수’라는 뜻의 콰트로 폰타네 가에 위치한 기념비적인 바르베리니 궁전을 건축했는데, 이 궁전에는 당시 기록으로 삼천 명 이상 수용했다는 대극장이 포함돼 있지만, 실제로는 수백 명 정도의 선택받은 초대 손님들만을 받아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639년 최종 완공되기 전에도 극장에서는 오페라 공연이 계속됐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1632년 2월 18일에 초연된 <산 알레시오>였다. 두 해 뒤 이 오페라는, 당시 한창 벌어지고 있었던 30년 전쟁의 가톨릭 동맹국 폴란드의 국왕 브와티스와프 4세 바사의 동생 알렉산더 카를 바사 왕자의 방문에 즈음해 다시 공연됐는데, 궁정 오페라의 전례에 따라 이를 기념하기 위한 총보가 무대 장치들의 다양한 그림들과 함께 인쇄됐다. 공교롭게도 폴란드의 수호성자 성 아달베르트가 10세기에 로마의 아벤티네 언덕의 성 알레시오 교회당에 딸린 수도원에 기거한 적이 있었기에, 더욱 뜻 깊은 이벤트가 되리라는 심산도 없지 않았으리라.


<산 알레시오>의 대본을 쓴 것은 서른두 살의 지울리오 로스필리오지였는데, 그는 후에 교황 클레멘스 9세(1667~69 재위)가 됐다. 오페라 줄거리의 바탕이 된 가톨릭 성인전에 의하면, 로마 원로원 의원의 외아들이었던 알레시오는 결혼 첫 날 아내의 동의를 얻어 집을 떠나 에데사로 배를 타고 가서 17년간 거지 생활을 하다가, 근처 교회의 성모상에 의해 하나님의 사람임이 알려지게 된다. 갑작스런 주위의 관심이 부담스러워진 알레시오는 다시 로마로 되돌아온다. 아버지의 집에 당도했으나 달라진 그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또다시 17년간 계단 아래 공간에 거주하며 종으로 지내다가 마침내 숨을 거둔다.


성 알레시오의 이야기의 원형인 ‘하나님의 사람’의 이야기는 430년 경 시리아에서 메소포타미아로 가는 길에 위치한 에데사의 한 병원에서 죽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한 걸인에 대한 동시대 기록으로부터 비롯됐다. 구걸을 하면서도 다른 가난한 사람들과 가진 것을 나누었던 그에 대한 숭배는 시리아를 중심으로 9세기까지 동방 제국에 널리 퍼졌으며, 그리스 문헌에 의해 비로소 알레시오(알렉시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의 이야기는 972년 교황 베네딕트 7세가 아벤티네 언덕에 있는 성 보니파체 교회를 다마스커스의 대주교 세르지우스가 이끄는 동방 기독교인들에게 내주면서 로마에 전해졌는데, 이들은 교회를 성 보니파체와 알레시오의 교회라 개명하고 하나님의 사람의 유골을 이곳에 안치한 동시에 그리스와 라틴 수도사들을 위한 수도원도 설립했다. 이러한 로마 출신 성자의 전설은 곧 시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으며, 교회당 또한 에데사로부터 돌아온 알레시오 부친의 집으로 간주돼 그 계단이 지금까지도 ‘알레시오의 계단’으로 알려지고 있다.


로스필리오지의 대본에는 성자전의 기본 줄거리에 덧붙여 로마와 종교처럼 알레고리적 인물들과 함께 천사와 악마, 천국과 지옥 장면이 펼쳐진다. 이렇듯 초현실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은 네리가 설립한 오라토리에서 1600년 공연됐던 카발리에리의 알레고리적인 종교적 라프레젠타치오네의 전통과도 맥이 닿는다. 또한 로마에서는 여자가 무대에 오를 수 없다는 규제가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단속적으로 시행된 결과 소년들과 카스트라토들이 여자 역할을 하는 전통이 생겨났다. 여자들이 배제된 바르베리니 극장에서의 오페라 공연은 소년들만 등장하는 예수회 학교의 연극과도 닮은 점이 많다.  많은 예수회 학교들에서 매 학기 말 무대에 올려졌던 수준 높은 라틴어 연극 공연은 높은 인기를 끌었는데, 여기에서 과거의 성자들의 삶을 돌아보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종교 교육 수단을 제공했다. 


이민족의 침입으로 풍전등화와 같았던 5세기 초 로마를 배경으로 펼쳐진 성 알레시오의 이야기는 이와 같이 여러 신앙의 본보기들 가운데 하나였다.  오페라의 3막 2장에 나오는 전령의 말 속에는 ‘위대한 목자 인노켄티우스’와 ‘영광스러운 황제 호노리우스’가 성 알레시오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방문했다는 언급이 있다. 393년에서 423년까지 재위했던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의 치세에 제국 전역이 이민족에게 유린당했으며, 급기야 410년에는 로마 자체가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에게 함락돼 약탈당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돌이켜 본다면 로마를 떠나 종교에 귀의하고 싶었던 알레시오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세는 401년에서 417년까지 재위했는데, 역시 알라리크에 의해 교황권이 위협 받기도 했으나, 멜레티우스파의 분열과 삼위일체의 본질에 관한 4세기의 복잡한 논쟁을 종식시켰고, 417년에는 펠라기우스주의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제창자 펠라기우스를 파문하는 등 여러 교회분쟁을 해결했으며, 그때마다 항상 로마의 우위성을 내세웠다고 하니 로마 교황청의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교황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성인전에는 교황 인노켄티우스가 죽은 해인 417년을 성 알레시오의 죽은 해로 기록해 연대적 불일치를 피하고 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아내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을 체현한 성 알레시오의 이야기를 극히 호사스런 바르베리니 궁전에서 본다는 것 자체도 아이러니지만, 최근 불거진 우리나라 종교 지도자들의 호화 생활 문제도 비추어볼만 하다.


교황 우르바누스 8세 치하에 일어났던 가장 유명한 사건은 갈릴레오의 재판일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죽은 해인 1564년 피사에서 태어났던 갈릴레오는 공교롭게도 셰익스피어와 동갑이었다. 아버지 빈첸초 갈릴레이가 음악가였기에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던 갈릴레오였지만, 여기서는 그의 유명한 재판이 <산 알레시오>의 초연과 재공연 사이인 1633년에 있었다는 사실이 더 관심을 끈다. 갈릴레오와 교황청, 특히 예수회와의 갈등은 1610년대 중엽부터 불거지기 시작했으나, 갓 취임한 교황 우르바누스 8세가 1623년 그의 책 『시험자』의 헌정을 받아들이고 출판을 허가하자, 1624년에는 로마를 방문해 오랜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새 교황을 만나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려 시도했을 만큼 개선됐다. 그러나 피렌체로 돌아간 갈릴레오가 <산 알레시오>가 초연된 1632년 『2개의 주된 우주체계-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대화』를 출판하자 마침내 교황청은 1633년 2월 질병에 시달리던 노령의 갈릴레오를 로마로 소환해 재판에 회부한 결과 유죄판결이 내려진다. 연금 기간에도 연구를 계속한 갈릴레오는 ‘성 알레시오’가 재공연된 1634년 『두 새 과학에 관한 논의와 수학적 논증』을 출판했다.


이처럼 <산 알레시오>와 갈릴레오의 재판이 같은 도시에서 같은 시기에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갈릴레오는 소리, 맛, 냄새, 색깔 같은 속성들은 ‘의식 안에만 존재’하며, 이러한 ‘이차적 특질’들은 언젠가는 ‘수학적으로 계량될 수 있는 물질과 운동의 일차적 물리적 특질들로 분석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했는데, 오페라야말로 가장 ‘이차적 특질’들이 두드러진 예술 장르이기 때문이다. 예수회가 포교 수단으로 적극 활용한 바 있는 이러한 ‘이차적 특질’들의 대표 격인 <산 알레시오>와, 브루노의 화형과 더불어 ‘유럽 철학에 대한 개신교의 독점’이라는 결과를 낳게 된 갈릴레오의 재판은 파스칼이 설파한 ‘부드러운 정신’과 ‘기하학적 정신’을 잘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들이다. 공교롭게도 갈릴레오가 죽은 1642년에 뉴튼이 태어났으며, 또한 다음에 살펴볼 몬테베르디의 마지막 오페라 <폽페아의 대관>이 베네치아에서 초연된다는 사실 또한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이남재 / 한국교원대· 음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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