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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성찰과 불안한 의심의 극장
고독한 성찰과 불안한 의심의 극장
  • 도정일 / 경희대 명예교수·영문학
  • 승인 2008.01.29 13: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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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칼럼_ 책의 철학

인간이 천사를 만난다면 그 천사를 향해 인간은 무엇을 자랑할 수 있을까.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두이노의 비가’ 한 대목에서 던지고 있는 질문이다. 시인의 이 질문은 인간에 관한 인문학의 어떤 질문보다도 상큼하고
날씬하다. “인간은 무엇인가?”라거나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기 좋아하는 인문학자를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둔중한 질문들은 사람을 기죽이고 숨통 조이고 어깻죽지를 내려앉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사에게 뭘 자랑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일 때, 사정은 달라진다. 사람들의 눈은 문득 빛나고 얼굴은 웃음으로 환해진다.

정신이 날개 달고 하늘로 치솟고 있다는 증거다.
인간은 천사가 아니고 천사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천사가 할 수 없는 일, 그러니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 그것이 인간의 자랑거리다.
천사가 할 수 없는 일은 많다. 그는 이를테면 노동할 일이 없으니까 땀에 절은 더러운 옷 같은 건 입을
기회가 없을 것이고 집 지을 일이 없으니까 망치질 하다 손에 못 박는 일도 없을 것이며 주린 자의 라면, 싸구려 김치찌개, 냄새나는 청국장도 먹을 일이 없고 먹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더러운 옷 입을
줄 모르지? 세탁이 뭔지도 모르겠네? 굶을 줄 알아? 셋방에 살아봤어?” 같은 말로 천사를 윽박지르는
일은 재미는 있어 보이지만 그 정도의 자랑거리로 천사를 기죽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를 꼼짝
못하게 하자면 그가 하고 싶어 하면서도 할 수 없는 일, 그리워하면서도 하지 못하는 일을 들이대는
수밖에 없다. 천사가 그리워하면서도 결코 하지 못하는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죽는 일, 곧 유한성의 경험이다.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알고 자신의 죽음을 예기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는 자기 존재의
유한성을 의식할 뿐 아니라 그 의식을 의식하는 자의식의 존재다. 의식이 의식과 대면하고 자의식이 동시에 자신을 성찰하고 객관화하는 사건은 인간의 경우에만 가능하다. 유한성의 존재이면서 또 인간은 유한성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고 미래를 계획하며 기억과 상상을 용접한다. 과거와 미래를 접목시키는 동물계 유일의 시간형식을 인간은 갖고 있다.

그의 의식은 의식 바깥의 세계를 인식하며 알고자 하는 자와 알고 싶은 대상이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아는 자’(knower)임과 동시에 그 아는 자로서의 자기와 알기의 ‘대상’(the known)으로서의 타자를 구분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는 그러나 지식에 대한 그의 무한욕망과 그가 성취할 수 있는 지식의 유한성 사이에서
번민하며 그 괴리와 모순을 타넘기 위해 밤잠 설칠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가 자랑할 만한 모든 것들, 그가 천사 앞에 내놓을 위대한 자랑거리는 그의 존재를 규정하는
그 순간성의 조건과 유한성의 경험으로부터 나온다.

남미 작가 호르헤 루이 보르헤스가 나이 80을 넘기면서 쓴 시에 ‘순간’이라는 것이 있다.
“다음 생에 태어나 내가 다시 산다면”으로 시작되는 시다. 그는 자신의 한 생이 ‘순간’이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순간이 그 다음의 순간으로 이어진다면 그 새로운 생을 어떻게 달리 살아볼 것인가.
다음 생에 태어나 내가 다시 산다면?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구절-“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리/
완벽해지려고 버둥거리지 않으리.” 생의 순간적 단회성은 그 단회성을 넘어서는 연속의 상상과
접합하고 이미 한 생의 끝자락에 선 자의 기억은 지나간 생에 대한 성찰(실수하지 않으려고 왜 그토록 버둥거렸던가) 위에서 다른 삶의 방식(더 많이 실수하리)을 제시한다.

재탄생의 상상력은 물론 불가능한 것에 대한 상상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한 그 상상력이 과거의 기억, 혹은 지나간 삶에 대한 성찰과 결합해 있다는 점이다. 기억과 상상의 이런 접합은 인간이 처한 유한한 조건으로부터 나오고 그 조건 때문에 가능하다. 게다가, 그 연속의 상상력 속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은 유한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인(완벽추구의 불가능성)한다. 천사에게라면 이런 성찰과 상상은 필요하지 않다.

기억과 사유, 상상과 표현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독특한 능력들의 목록을 대표한다. 인간이 천사를
향해 자랑할 것도 결국은 그 네 가지 능력으로 집약된다. 인간은 기억하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표현하는 존재이다. 그 네 가지 능력의 어느 것도 완벽하지 않다. 기억은 수많은 구멍들을 갖고 있고
사유는 불안하다. 상상은 기억과 사유의 한계를 확장하지만 유한한 경험의 울타리를 아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표현의 형식과 내용도 시간성에 종속된다. 그러나 기억, 사유, 상상, 표현의 인간적
시도들은 그것들이 지닌 한계 때문에 무용해지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것들만이 가지는 순간적
아름다움의 광채를 포착하고 표현하기 때문에 위대하다. 워즈워드의 5월의 꽃, 푸쉬긴이 노래한
해질녘 다리 위의 소녀와 잠자리 떼, 괴테가 본 마리엔바드의 위대한 가을 숲, 프로스트의 눈 내리는 겨울 숲 - 이런 것들은 그 순간성 때문에 아름답다.

기억이 완벽할 수 있다면 아무도 기억하기 위해 애쓰지 않을 것이며 사유가 완전할 수 있다면 아무도 사유의 엄밀성을 이상화하지 않을 것이다. 지식의 한계 때문에 상상은 위대해지고, 표현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도전 때문에 표현은 아름다워진다.
책은 인간이 가진 그 독특한 네 가지 능력의 유지, 심화, 계발에 봉사하는 가장 유효한 매체이다.
문자를 고안하고 책을 만들고 책을 읽는 것은 결코 ‘자연스런’ 행위가 아니다. 인간의 뇌는 애초부터
책 읽으라고 설계된 것이 아니다. 문자가 등장한 역사는 6천년, 지금 같은 형태의 종이인쇄책의 역사는 6백년에 불과하다. 자연선택이 사냥과 채집 등 인간종의 생존에 필요한 다른 여러 기능들을
수행하도록 설계한 뇌건축물의 부수적 파생효과 가운데 하나가 책을 쓰고 책을 읽는 기능이다.

말하자면 그 능력은 덤으로 얻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덤’이 참으로 중요하다. 책 없이도 인간은 기억하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표현한다. 그러나 책과 책읽기는 인간이 이 능력을 키우고 발전시키는 데 중대한 차이를 낸다. 최근의 뇌과학적 생물학적 연구조사들은 읽기 행위가 만들어내는 이런 ‘차이’의 존재와 크기를 거듭 확인시켜주고 있다. 책을 읽는 문화와 책을 읽지 않는 문화는 기억, 사유, 상상, 표현의 층위에서 상당히 다른 개인들을 만들어내고 상당한 질적 차이를 가진 사회적 주체들을 생산한다. 어떤 인간을 생산하는가에 따라 사회는 달라지고 문명도 달라진다. 누구도 맹목적인 책 예찬자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책읽기가 인간을 더욱 인간적이게 하는 소중한 능력들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결코 희생할 수 없는 매체라는 사실이다. 그 능력의 지속적 발전에 드는 비용은 싸지 않다. 무엇보다도 책읽기는 손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상당량의 정신 에너지가 투입돼야 하고 훈련이 요구되고 읽기의 즐거움을 경험하는 정신습관의 형성이 필요하다.

책의 세계는 정신의 자기회귀를 강화하는 고독한 성찰과 불안한 의심의 극장, 의식이 의식을 만나
협상하고 교섭하는 대화의 극장, 인간이 유한성의 조건 속에서 그 유한성에 보복할 모든 가능한 책략들을 꾸미는 음모의 극장이다. 그 극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정신적 비용은 싸구려가 아니다. 지금 문명과 사회는 일종의 갈림길에 서 있다.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극장을 떠나 편하고 힘들지 않은 오락과 쇼의 세계에 들어가도록 인도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자기 손으로 계발하기 시작한 능력들의 약화와 위축에 동의하지 않기 위해 그 정신의 극장을 더 잘 유지할 것을 종용하는 길이다. 전자는 결코 후자를 대체하지 못한다. 우리 시대가 그 대체에 동의하는 순간 인간은 천사 앞에서 별로 자랑할 것이 없는 자기 강등의 길로 들어설 것이 확실하다. 

도정일 / 경희대 명예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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