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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대한 제3의 탐색
글쓰기에 대한 제3의 탐색
  • 손종업 / 선문대·국문학(문학평론가)
  • 승인 2007.12.03 13: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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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비평: 소설_ 신경숙 『리진』의 의미망

신경숙
그녀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백 년 전에 프랑스에서 출간된 조선에 관한 책에는 조선에 처음으로 파견된 프랑스 외교관이 조선의 궁중 무희에게 첫눈에 반해 그녀와 함께 파리로 건너갔다는 내용이 남겨져 있었다. 서구인들의 눈에 비친 여인은 단지 자신들의 언어를 독특한 방식으로 구사했던 ‘한 마리 작은 원숭이’와도 같았다. 작가 신경숙으로 하여금 글쓰기로 나아가게 한 것은 바로 이렇게 백 년 전 여인에게 강요된 철저한 침묵이었다.
작가된 자로서 이러한 반응은 기실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리라. 작가란, 이름 없는 존재들, 자기 언어를 지니지 못한 자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목소리를 불어넣어주는 존재가 아닌가. 굳이 김영하가 『검은 꽃』에서 멕시코 이민들의 행적을 좇아간 것이나, 조정래가 한 장의 빛바랜 사진으로 남은 한 젊은이의 모습에서 『오 하느님』을 써내려간 것을 들지 않더라도, 작가란 마땅히 그래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만 그 밀도에 있어서 『리진』은 압도적인 바 있다. 작가는 특유의 놀라운 마술적 언어를 통해 “완벽히 잊혀진, 어디에도 없는” 그녀에게 숨결을 불어넣었는데, 이는 의지 때문이 아니라 차라리 운명적인 것이라 할 만하다. 그녀가 『리진』을 찾아냈다기보다는 오랜 세월을 『리진』이 그녀를 기다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소설 『리진』 속에서 여주인공에게서 유난히 강조되는 것은 그녀의 시선이다. “그녀는 끝없이 펼쳐지는 잿빛 개펄을 처음 보았다”와 같은 구절에서처럼 그녀의 시선은 쉼 없이 움직이면서 피사체들을 붙잡아낸다. 이러한 시선의 집요함이야말로 비슷한 시기에 같은 소재를 다뤘다는 점에서 이목을 끌었던 김탁환의 두꺼운 소설 『리심』과 구별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제물포의 풍경을, 왕의 적색 곤룡포를, 프랑스 파리의 풍경들과 사람들을 응시하려 한다. 물론 더 자주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들을 견뎌내야만 하겠지만.
그렇게 ‘리진’은 어디서나 “쉽게 눈에 띄었다.” 그래서 “장죽을 문 노인도, 나막신장수도, 무뢰배로 보이는 젊은 사내도, 땟국이 흐르는 어린아이는 물론이고 외국인조차 지역에서 차를 팔거나 뗏목 위에 땔감을 싣고 온 청국인, 부두에서 쌀을 팔고 있는 일본인도 낯선 세계의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볼 때처럼” 그녀를 쳐다본다. 하지만 그녀는 “뭇 사람들의 곁눈질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습관처럼 숨듯이 움츠리고 걷는 조선 여인들하고는 확연히 구별되는 걸음걸이였다. 그녀는 걸음걸이의 균형을 흩뜨리지 않았다. 의혹에 찬 시선을 견디느라 저편 바다를 응시하는 따위의 행동도 하지 않았다.” 이처럼 그녀는 놀라운 능동성이다. 그녀는 자신이 알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세계를 향해 기꺼이 나아가고 散花하는 아름다움이다.
상징적이게도 소설 속에서 여인은 “이름조차 없는” 존재다. 뒤에 그녀는 왕에게서 ‘리진’이라는 이름을 하사받는데, 이때 왕비로부터 “이름의 주인이 어떻게 사느냐에 그 이름의 느낌이 생기는 게다. 사람들이 네 이름을 부를 때면 은혜의 마음이 일어나도록 아름답게 살라.”라는 당부를 받는다. 또한 왕비는 자신이 살고 있는 “가련한 나라”에 “먼 나라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글로 적어 보내”기를 요구하는데, 이러한 지점에서 리진은 은밀하게 작가 신경숙과 겹쳐진다. 리진이 불한사전에 의지해서 세상을 읽어내야 하는 것처럼 소설가 신경숙도 근대소설이라는 형식에 의지해서만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her-story의 가능성과 한계
낯선 세계의 다른 언어들 속에 포박될 여인의 운명은 풍랑에 흔들리는 어두운 갑판 위에서 추는 춤으로 표상된다. 이때 “파도같이 바람같이 달빛같이 가벼워진 그녀는 한 마리 나비”일 수밖에 없다. 소설 『리진』은 그 나비의 여린 날개 위에 역사의 무게를 던져놓은 형국이다. 그렇다면 ‘이름도 없는 존재’였던 그녀가 어떻게 그렇게 멀리 날아갈 수 있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눈 때문이다. “천지간에 혼자 남은 줄을 모르는 어린것의 눈은 말갰다. 다섯 살이 되도록 그저 ‘애기야’로 불렸던 어린 것은 눈을 깜박거리기만 했다.”고 말해질 때 그녀의 “이름 없음”은 어떤 비범함과 내통하게 된다. 이러한 그녀의 “이름 없음”을 가만히 껴안고 있는 것이 바로 강연의 “말없음”이다. 여기서 리진이 “꽃”이 “라 플뢰흐”로 번역되는 그런 세계로 나아가는 것과 강연이 대금과 검술로 나아가는 것이 대응된다. 그 어느 것도 미터법과 내연기관으로 상징되는 근대와 맞설 수 없음이 비극적이다.
『리진』의 특이성은 여성적인 시선에 의해 포착된 역사라는 점에 있다. 소설 속에서 리진-명성왕후-조선은 모두 근대(남성)로부터 비극적인 방식으로 호명된 존재들이다. 그들은 근대의 담론적 질서에 의해 왜곡되고 압살된 존재들이며 오래 침묵을 강요당한 타자들이다. 그들은 모두 ‘박명’의 푸르름과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근대에 의해 가뭇없이 희생됨으로써, 사라져버린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환기한다. 이렇게 소설 『리진』은 역사소설이자 그 부정적 형태로서 그녀의 역사 her-story를 지향한다. 신경숙의 글쓰기는 시대와 역사 속으로 확장될 때, 오히려 그 시선의, 영혼의 질감이 도드라진다. 소설 『리진』은 이야기의 바다에서 형적 없이 헤매던 신경숙의 글쓰기가 발견한 하나의 돌파구로 여겨진다. 이 소설을 쓰면서 작가가 느꼈던 충만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돼야 한다.
이 소설에서 비로소 작가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취재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구축하는 새로운 경험을 하기에 이른다. 작가의 시선에 포착된 이미 사라져버린 왕국은 가혹하고도 아름답다. 그 한 가운데에 명성왕후가 놓여 있는데, 이 명성왕후에게서 우리는 새엄마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이 낯설고 이질적이지만 세련되고 고아한 세계에 대한 매혹의 끝에는 놀랍게도 비상을 바른 불한사전이 놓여 있다. 리진으로 하여금 그 금종이를 삼키고 죽어가게 했다는 점은 대단히 놀라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책들의 세계 -세계의 감각
소설 『리진』은 이미 그 안에 충분히 영상적인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이미 그런 소식이 들려오거니와, 그것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아마도 그것은 작가가 빚어놓은 언어-이미지를 시각-이미지로 변환하는 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소설 『리진』은 낯설면서도 친숙하다. 이 고아한 소설은 어느새 문화산업의 일부로서도 훌륭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김탁환의 『리심』에는 있지만 신경숙의 『리진』에는 없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냄새’다. ‘콜랭’은 그 이름을 부르기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낯선 냄새도 풍기는 존재라는 것. 이를 확대하면 세계의 도시 파리는 단지 눈부신 스펙터클만 지닌 곳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될 수도 있으리라. 훗날, 파리를 방문했던 일본의 무정부주의자 오스기 사카에의 관점은 확실히 다르다.
“도로 양측으로 즐비한 건물은 5층, 6층, 7층 정도의 높은 건물 일색이지만 낡고 더러운 것으로 말하자면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동차를 타고 지나쳐서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상점들도 더러운 물건들만 팔고 있었다. 도로 한가운데로 나 있는 넓은 보도는 전체가 더러운 텐트로 지어진 가건물로 넘쳐 흘렀고, 일본이라면 절대 볼 수 없는 야만인 같은 얼굴의 인간들이 우글거렸다.”(『오스기 사카에 자서전』 중에서)
이러한 관점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정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 상이한 두 가지 지적이 모두 파리라는 근대도시의 양면성에서 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파리에 관한 『리진』의 묘사는 생활인의 것이라 하기 어렵다. 따라서 “파리 여인들보다 더 파리 여인 같군요”라는 홍종우의 비판은 그대로 작가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이 그려낸 리진은 당신보다도 더 당신 같군요”라고. 그러므로 소설 속의 그녀가 어느 순간에 “나는 누구일까요?”라고 물을 때 그것은 생각보다 깊은 세계를 동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마지막 피난처인 <동양의 방>도 그저 시각적인 것일 뿐이며 공허하다. 그곳에서 그녀의 모습은 어떠한가. “리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움푹 파인 검은 눈동자를 깊이 주시했다. 거울에 비친 리진의 얼굴은 눈만 있는 것 같다. 리진은 손수건으로 거울을 문질렀다. 검은 눈이 흔들리다가 다시 커다랗게 부각되어 왔다.” 

손종업 / 선문대·국문학(문학평론가)


 

필자는 중앙대에서 ‘1950년대 한국 장편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소설을 바라보는 열두 가지 시선』, 『탈식민의 텍스트, 저항과 해방의 담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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