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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기념비 밑에 새겨질 수 있을까
‘기억’은 기념비 밑에 새겨질 수 있을까
  • 정호기 / 성공회대·사회학
  • 승인 2007.12.03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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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진단_ 기념사업 르네상스 어떻게 볼 것인가

1990년대 이래 한국에서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많은 사건들이 발생했다. 변화를 실감하게 해준 것들 가운데 하나는 10여 년 전에는 거론만으로도 처벌의 대상이 됐던 주장과 담론이 공론화됐다는 점이다. 이러한 주장과 담론은 민주화의 진전과 더불어 일시적인 관심의 유발이라는 한계를 넘어서 여러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책 또는 보고서 등이 출간됐고, 각종 기록과 증언으로 엮어낸 영상물도 제작됐다. 그리고 크고 작은 행사가 개최됐으며, 다양한 규모의 기념 및 추모 시설과 장소 및 공간이 생겨났다. 광의의 기념 또는 추모 사업은 이 모든 것을 포괄하지만, 협의로는 기념 및 추모 시설이나 장소와 공간의 조성을 지칭한다. 올릭(Jeffrey K. Olick)이 엮은 『국가와 기억』이 확인해 주듯이, 기념사업이 이뤄지는 일련의 과정과 결과는 기억의 정치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더할 나위 없이 잘 보여준다.

정체성의 형성·유지와 기념사업
마일스(Malcolm Miles)는 “기념조형물은 무장한 군대나 경찰에 비해 적은 비용과 덜 잔인한 내용으로 확실한 사회통제를 해내는 셈”이라고 기념사업의 기능과 역할을 정의했다. 이것은 기념사업이 특정 국가 또는 사회의 정체성을 형성시키고 유지하는 데 유용하며, 궁극적으로 사회 통합에 매우 중요한 수단임을 말해준다.
세계의 여느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한반도에 터를 두었던 수많은 국가들도 기념사업을 펼쳤다. 이 가운데 일부만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사찰, 사당, 전승비, 기념비, 불망비, 공적비, 열녀비, 홍살문 등은 기념사업의 대표적인 형태이다. 한말에 이르면, 근대적 문물과 함께 서구적 기념방식도 도입됐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는 서대문역사공원에 있는 독립문이다. 독립문은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이 프랑스 개선문을 모델로 삼아 건립한 것이었다.
다카시 후지타니(Takashi Fujitani)가 저술한 『화려한 군주』는 근대 일본이 사회 통합과 천황을 중심으로 한 통치체제의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국가 의례와 기념사업을 적극적으로 이용했음을 잘 보여준다. 이 전략은 식민지 조선에서도 관철됐다. 기념사업이 조선에서 특히 활발하게 추진됐던 시기는 만주사변에서 태평양전쟁에 이르던 전쟁기였다. 일본은 전쟁으로 물자 조달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나, 전쟁 영웅을 숭배하고 전사자를 추모하는 기념사업을 벌였다.
국가와 지배집단이 주관하는 기념사업은 해방 이후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다만 사회의 변화에 따라 그 대상과 내용이 달라졌을 뿐이다. 근래에는 한국 사회의 광범위한 분야에서 ‘과거청산’ 작업이 진행되면서 이와 관련된 기념사업이 현저하게 많아졌다. 그동안의 기념사업들을 주제별로 분류하면 전쟁, 독립 그리고 국가폭력과 민주화운동에 관한 것이 다수를 점한다.
이 가운데 가장 높은 빈도수를 보여주는 것은 ‘전쟁’이다. 전쟁의 기념사업은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발생한 대립 및 충돌과 희생자를 대상으로 했다. 이것은 승전의 자축, 희생자의 추모, 산자의 애국주의를 고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모든 희생자가 기념사업의 대상에 포함되지는 않았다. 이들의 죽음은 사회의 구조적 갈등이 빚어낸 것이므로, 죽음의 발생 배경과 성격에 대한 평가가 수반됐다. 그리하여 이에 부합한 사건과 죽음만 기억되고 추모되고 기념될 뿐이다. 여기에는 과잉된 이데올로기가 맹목적으로 적용되기도 했다.
국가가 주도하는 전쟁을 주제로 한 기념사업은 유신체제 말기에 대규모화됐다. 이전에도 국립묘지와 같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탑과 비가 주류를 이뤘는데, 이때부터 공원과 같은 형태를 갖춘 기념관이 전국 곳곳에 건립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대규모 전쟁 기념사업은 전두환 정권 초반까지 계속됐다. 한편 전두환 정권의 말기에는 북한군이나 좌익에 의해 집단 학살된 민간인에 대한 추모 사업이 진행됐고, 노태우 정권에서는 전쟁기념관이라는 국내 최대의 전쟁 기념사업이 착수됐다. 전쟁을 주제로 한 기념사업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김대중 정권 이후에는 전쟁을 주제로 한 기념사업이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하나는 기존의 전쟁에 대한 기념사업의 흐름을 계승해 지역별로 또는 전쟁별로 전국 곳곳에 기념물들을 건립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한국전쟁 전후기에 발생한 민간인 희생자, 특히 남한의 국가 기구와 우익에 의해 집단으로 발생한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추모 사업이 대대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후자가 바로 과거청산 작업의 성과였다.
두 번째로 많은 것은 ‘독립’을 주제로 한 것이다. 이것은 과거청산 작업의 성과라기보다 정권의 정통성 확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식민지를 경험한 국가라는 특성상, 독립은 매우 긴요한 기념사업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정작 독립을 주제로 한 기념사업은 전쟁보다 늦게 이루어졌고, 규모도 작았다. 독립을 주제로 한 기념사업의 전환점은 전두환 정권 하에서 건립된 독립기념관이었다. 그리고 백범기념관, 서대문독립공원,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건립 등은 모두 김영삼 정권하에서 시작됐던 기념사업이었다.
세 번째는 ‘국가폭력’과 ‘민주화운동’을 주제로 한 기념사업이다. 동학농민전쟁과 4월혁명을 비롯해 5·18민중항쟁, 부마민주항쟁 등을 주제로 한 대규모 기념사업들은 이미 현실화됐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여러 기념사업들이 계획되고 있다. 이러한 기념사업은 전쟁으로 인한 민간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사업들과 마찬가지로 과거청산 작업의 효과이다. 

과거청산과 사회통합 그리고 기념사업
과거청산의 대상과 내용 그리고 방법 등을 둘러싸고 정치·사회적으로 수많은 논쟁이 있었고, 현재에도 갈등을 겪으면서 진행되고 있다. 과거청산 작업이 힘겹고 복잡한 것은 단지 은폐된 또는 왜곡된 과거사를 바로잡는 데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청산의 유형과 수준은 다양하지만, 이것의 실행 과정에서 과거 속의 사람은 물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도 법적·제도적 호명을 받게 되고, 이를 계기로 새로운 무엇이 말해지고 드러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긴장과 대립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밝혀진 진상에 의거해 사회적 기억과 역사를 수정 및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피하며, 재발을 억제하는 다양한 장치의 등장을 감내하는 것이 두렵고 버거운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다양한 형태의 기득권과 독점, 그리고 권위의 박탈을 강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거청산 작업을 면밀하게 고찰하면, 이것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또는 도달하려는 지점이 사회 통합에 있음을 알게 된다. 적어도 법률과 제도에 근거를 두고 추진되는 과거청산 작업은 대부분 이를 명시하고 있다. 즉 과거청산은 대립의 해소와 타협 그리고 갈등의 봉합을 전제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사회 운동의 영역에서 전개되던 과거청산의 요구가 제도권에 진입해 실행되면, 이러한 경향과 지향은 선명해진다. 사회 통합은 희생자 또는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피해의 복원에 관한 사안의 실현이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가시적 효과와 영향력이 부족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조치들은 사람의 관계 속으로 스며들어 통계 수치로만 남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익명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기념사업은 사회 통합이라는 과거청산의 효과를 증식시키는 방법으로 선호된다. 기념사업은 선별된 기억과 역사를 공간과 장소에 투사시키는 일련의 행위이다. 기념사업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즉, 기억하는 것임과 동시에 망각하는 것이고, 진상을 공공 공간에 펼쳐내는 것임과 동시에 순치시키고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정부(관료), 관련자(단체), 전문가(집단) 그리고 기념 자본의 대립, 타협, 기만 등이 때로는 공개적으로 때로는 은밀하게 작동한다. 기념사업에 관련된 여러 주체들은 이를 통해 우월적 지위를 획득하고, 이해를 관철시키려 한다. 그리고 기념사업에 투입된 경제적 자원과 사업의 규모에 의거해 상처에 대한 정치·사회적 관심을 가늠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이와 같이 기념사업이 지닌 양면성과 부정적 결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을 터이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또는 기념대상자들의 활동과 희생을 후손이 오랫동안 기억해 주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보면, 기념사업만큼 가시적이고 직접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대안적 방안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사회과학적 관점에서의 기념사업에 대한 연구는 ‘기념사업의 대상으로 선정됐던 배경과 이유, 이를 주도하는 주체와 내용이 무엇인가’를 밝히려는 것이다. 그리고 기념사업을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달성하려는 목적과 도달하려는 지점 그리고 이것을 둘러싼 이해관계를 밝히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정호기 / 성공회대·사회학

필자는 전남대에서 ‘기억의 정치와 공간적 재현’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한국의 역사기념시설』등이, 논문으로 ‘저항의례의 국가화와 계승 담론의 정치’등이 있다. 현재 성공회대 민주주의와사회운동연구소 연구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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