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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베일에 쌓여있는 ‘해체론’의 실천성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는 ‘해체론’의 실천성
  • 교수신문
  • 승인 2007.10.29 15:2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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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서평 _ 『마르크스의 유령들』 자끄 데리다 지음 | 진태원 옮김 | 이제이북스 | 2007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출간된 1993년은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1992)으로 대표되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부활’이 횡행하던 시점이었다. 역자가 요약하듯 당시는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미국이 주도하는 군사적 세계질서가 세력을 과시하면서 국내에서는 갓 출범한 문민정부가 세계화’의 논리를 주창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또한 영미 학계에서 이른바 해체론을 비롯한 ‘이론’의 전반적인 퇴조가 거론되기 시작하던 시점과도 겹쳤다. 위기의식의 발로였을지 동병상련의 심정이었을지 알 수는 없지만, 데리다가 역사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가던 마르크스를 다시 불러낸 데는 복합적인 시대의 요청과 그 나름의 진지한 문제의식이 함께 있었으리라는 짐작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데 하필 왜 마르크스이고 더구나 그의 유령들인가?
데리다의 논의가 기대고 있는 근거는 우선 마르크스가 ‘공산주의’의 유령을 언급한 1848년 유럽의 상황과 이 책이 출판된 1993년 시점의 세계 사이의 시대적 유비관계이다. 어쩌면 역사가 한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는 마르크스의 진단이 여기에도 적용가능할지 모르겠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어디로?”라는 긴급한 질문 앞에서 데리다가 “이미 보았다는 느낌이 주는 곤혹감”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아니 각종 종말론의 범람 앞에서 데리다가 목격하는 것은 역사의 희극적인 반복이 아니라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대착오”이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 햄릿이 선친의 유령에 대고 맹세한 뒤 읊조리는 저 유명한 대사, “시간이 이음매에서 벗어나 있다”가 데리다의 마르크스론을 이끄는 화두인 까닭도 거기에 있다. 햄릿과 마르크스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세계 역시 ‘이음매가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원초적인 타락”을 증언할 뿐이다.

왜 마르크스인가
그런데 선왕 햄릿의 유령과 공산주의라는 유령의 경우에도 그러했듯이, 문제는 이 시대착오적인 타락, 이러한 어긋남 혹은 탈구가 “무언가가 썩어 있는” 전체주의의 징후인 동시에 법률주의와 도덕주의를 넘어서는 해체불가능한 정의가 비로소 가능해지는 공간을 동시에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데리다에게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바로 마르크스(주의)가 징후로 불러내기는 했지만 가능성의 공간으로까지 발견하지는 못한 지점들을 사유하는 데 필수적인 존재, 곧 “비가시적으로 가시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데리다가 지적하듯, “정의의 탈-총체화의 조건인 필연적인 어긋남은 현재의 조건이며, 동시에 현존자 및 현존자의 현존의 조건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과도한 절망이나 맹목적인 푸닥거리는 데리다의 의제에 들어있지 않다.
데리다에게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정당한 애도작업을 통해서만 불러내는 것이 가능한데, 햄릿이 아버지의 환영 앞에서 복수를 다짐하듯 마치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가상적 유령들이 내리는 명령을 정의와 책임이라는 해체의 해체 불가능한 조건들에 대한 사유로 발전시키고자 한다.

유령학(Hauntology)의 필요성
특히 데리다에게 살아 있는 현재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직껏 진정으로 존재한 적이 없는 유령 타자들의 도래가 바로 ‘자본주의의 승리’와 ‘역사의 종말’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망령들에 의해 억압된 정의의 본 모습이며, 이는 혼란스런 이데올로기들 중에서 진리를 판별할 수 있다고 믿었던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신념과 결별하는 일과 통한다. 데리다가 보기에 “마르크스주의 유형의 분석은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남아 있지만, 무수한 근대적 또는 탈근대적 부인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기획 또는 마르크스주의 비판의 기획을 정초하는 마르크스주의 존재론이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하나의 메시아적 종말론을 포함하고, 포함해야 하며, 포함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지점에서 근본적으로 불충분”한 성격을 노정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환영들이 출몰하는 탈구된 현재의 상황은 마르크스의 정신을 부활할 수 있는 기회인 동시에 한 번도 주제화되지 못한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의 도래를 표시하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사실 이데올로기와 진리를 확연히 구분 가능한 것으로 보는 마르크스의 태도에 대한 비판은 이 책 전체에 걸쳐 마르크스의 망령들과 마르크스의 정신을 구별하려는 데리다의 입장을 집약시켜 주고 있는데, 이는 자칫 자본주의의 구조적 폭력성과 현실사회주의-특히 스탈린주의-의 억압성 간의 역사적 차이를 무시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적 다원주의를 신봉하는 자유주의자들의 낯익은 비판으로 오인될 소지도 많다. 테리 이글턴이 후쿠야마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을 두고 “정치적으로 가장 명시적일 때 가장 인상적이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에 특정한 마르크스주의의 형태들을 포함시킨 정치적 의도가 무엇인가라기보다, 데리다가 제기하는 정의와 책임의 문제가 마르크스주의 정치학 및 정치 일반에 과연 얼마나 근본적인 사유의 전환을 요구하느냐일 것이다. ‘탈구’의 이중성을 거듭 상기시키는 데리다의 발언은 프롤레타리아 및 노동자에 한정되지 않는 모든 억압된 유령들, 즉 계급, 국가, 성, 인종을 초월한 모든 역사적인 타자들에 대한 정의에 의거해 마르크스주의를 전화하자는 쪽에 가깝다. 데리다가 자신의 책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비판에 답하며 부연하듯이, 문제는 분석과 정치적 참여의 새로운 차원, 곧 사회적 차이들과 사회적 세력들의 대립을 가로지르는 정치적 참여의 필요성이다.

해체론은 어디로?
요컨대 데리다의 유령학은 “이질적인 것 그 자체가 서로 결합하는 곳에, 탈구와 분산 혹은 차이를 손상시키지 않고 타자의 이질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을 놓는 일”이 된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데리다의 탈구 개념에 내장된 ‘존재의 불가능성’ 때문에 사회주의의 이상을 물질적인 사회 내에 실현하려는 미래의 모든 시도들이 선험적으로 실패할 운명에 처했다는 마르크스주의 진영의 비판은 데리다의 정치적 영향력에 대한 과도한 인정일망정 정확한 사태 판단은 아니다. 따라서 탈구의 독특성에 공감한다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전 지구에 걸쳐 모든 남성과 여성들은 오늘날 어느 정도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의 계승자들”이고 오늘날처럼 기술적인 것과 미디어가 환원불가능해진 현재 상황에서 정의와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은 모든 지식인의 책무가 된다.
그런 뜻에서 해체론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어떤 마르크스주의의 전통 속에서만 어떤 마르크스주의의 정신 속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시도이며, 어떠한 해체에도 환원되지 않고 남아 있는, 해체의 가능성 그 자체로서의 해체불가능한 것, 다시 말해 “어떤 구조적인 메시아주의의 형식성, 종교 없는 메시아주의, 심지어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이며 어떤 법이나 권리, 나아가 인권과도 구별되는 정의의 이념이자 현재 통용되고 규정되는 속성과 구별되는 민주주의의 이념”을 추구하는 시도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대한 비판적 (탈)전유를 데리다가 해체론자로서 구상하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과연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원격기술과학 시대의 10대 재앙들-실업, 이민, 무역전쟁, 자유 시장, 외환부채, 무기거래, 핵무기, 종족내전, 국제 폭력조직, 국제법의 비실효성-은 데리다가 내린 가장 현실적인 정치적 판단인데, 이러한 난제들은 과연 탈구의 징후인 동시에 ‘메시아적 긍정’의 가능성을 지칭하고 있는가.

데리다는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자본주의의 승리가 자명한 것처럼 보이는 시점에서 마르크스를 들고 나와 그 정신의 필요성을 들춘다. 그림은 레닌 동상이 철거되는 장면.

마르크스주의의 자기비판과 메시아적인 정신에 공감하는 지식인들이 이 난제의 해결을 위해 연합하는 느슨한 ‘우애의 연대’는 제도나 조직이 없는 결합이다. 따라서 이 연대가 탈구된 현대 사회에서 어떤 종류의 정치력을 발휘할 것인가는 의문의 여지가 많고, 대다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반론도 이점에 집중돼 있다. 마르크스의 가능성에 대한 사유를 해체론과 연결 짓는 고리인 ‘탈구’ 개념은 원격기술과학 시대에 어김없이 관철되는 ‘텅 빈 보편성’의 구조에 대한 사유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발상의 소산이지만, 동시에 그렇게 이음매가 어긋난 현실에 존재하는 무수한 주체들의 낱낱이 해체된 현실도 가리킨다. 물론 이러한 이중적 탈구 자체는 하나의 전략적 선택이자 정의의 가능조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10대 난제를 꼽는 데리다의 진단을 평가하건대, 정치성과 정의의 가능 조건이자 불가능의 조건에 대한 해체론적 사유의 틀이 ‘해석’을 넘어서는 어떤 새로운 ‘실천성’에 대한 고민을 담은 것인지는 의문이다. 해체론자의 실천이 아니라 해체론 자체의 실천성은 여전히 베일에 쌓여 있는 것이다.
끝으로, 재출간된 이 책의 한국어 번역은 기존의 번역, 내지는 중역들이 회피한 데리다의 독특한 언어에 한층 살갑게 다가갈 수 있는 길잡이의 역할에 손색이 없다. 다만 역자의 방대하고 꼼꼼한 주석과 용어해설 및 원문에 충실한 번역 덕택에 복합적인 데리다의 진면목을 추적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됐지만, 때로는 독서를 늦추고 사유를 더디게 했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역자 자신의 재전유 노력이 좀 더 묻어나는, 좀 더 우리 입맛에 맞는 번역을 기대해본다.

강우성 / 한성대·영문학

필자는 ‘에머슨과 미국 르네상스 시대의 문체 연구’로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미국문학사』, 『이론 이후 삶: 데리다와 현대이론을 말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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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2007-11-10 01:43:12
위기가 어디서 비롯되는지 알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