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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革’으로 잃어버린 중국 10년, 용케 살려낸 것은 무엇인가
‘文革’으로 잃어버린 중국 10년, 용케 살려낸 것은 무엇인가
  • 교수신문
  • 승인 2007.10.29 14:3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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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中國 散策 ‘후삼계’와 개혁개방의 수혜자들

작가 老鬼는 지난 30년의, 개혁 개방으로 인한 사회적 진보가 없었더라면 오늘의 ‘작가 노귀’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1977년 이전의 30년은 그에게 굴욕과 고통, 열등감과 참담함만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부활한 ‘대학 입시(高考)’로 북경대에 진학하고부터 그는 시대의 거대한 변화 속에서 자아가치의 실현이라는 새로운 30년을 보낼 수 있었다. 월간 잡지 <小康> 2007년 10기(10월 1일자)는 ‘노귀; 血色的 浪漫’이란 글을 싣고 있다. 이 회고에서 노귀는, 1977년 12월 고시 과목의 하나인 ‘작문’ 시험을 치를 때의 추억을 더듬고 있다. 산서성 어문 과목의 작문 제목은 ‘知心話兒獻給華主席’, 마음속에 있는 모든 걸 당시의 국가 주석인 화국봉에게 털어내라는 뜻일 게다. 지난날의 “각종 辛酸과 凌辱”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부모님의 사랑도 못 받고 한 마리 외로운 이리(父母不理我, 孤狼一介)”처럼 살아온 자신의 인생 역정에 스스로 격동됐다.
내가 아는 중국의 지식인들, 교수나 전문직에서 대체로 성공한 사람들, 특히 77, 78, 79학번 출신들과 얘기해보면 노귀의 격렬했던 심정이 이해가 된다. 그들 대부분은 농촌이나 공장, 광산에서 최소 5~6년 이상은 생고생을 한 사람들이다. 출신 성분이 좋지 않아서 갖은 수모도 겪어야 했다. 앞길이 도통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더 암담했다. 그런 자녀들을 옆에서 또는 멀리에서  지켜보아야 하는 부모의 아픈 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들 앞에 날아온 소식, ‘高考의 회복’은 천상의 소리였을 것이다. 그것도 울림이 엄청나게 큰.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대체로 문화대혁명이 시작될 무렵 고등학교 학생이었던 사람들은 2천2백여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반면에 77, 78년 두 해에 입학한 대학생들은 어림잡아 40만명 정도라고 한다.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웅변으로 말해주는 대목이다.
<小康> 10월호에 실린 좌담회 기사에서 천밍밍(陳明明) 상해 복단대 교수는 그들 77, 78 학급 학생이야말로 ‘역사적 행운아’라고 말하고 있다. 만약에 문화대혁명이 종결되지 않았더라면 그들 대부분은 아직도 고난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1977년은 ‘재생의 원년’이 아닐 수 없다. 개혁 개방 30년 동안, 그들 77, 78 학급은 대체로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고 낡은 질서를 개혁하는 세력으로 하나의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됐다.
그들은 현재 당과 정부, 학술, 교육, 기업 등에서 거의 중추역할을 해오고 있다. 그들은 1977년에서 2007년 오늘에 이르기까지 30년간 중국이 이룩한 공전의 역사적 성취와 발자취를 함께 해왔다. 사회주의 경제의 기본 틀인 계획경제를 극복하고 자본주의식 시장경제를 과감하게 도입하면서 중국은 공업화와 현대화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현대 국가 건설의 토대를 마련하고 ‘민생 행복’, ‘사회 번영’의 길로 한달음에 나아갈 수가 있었다. 지난 22일 끝난 제17기 인민대표대회는 예상대로 ‘후삼계’ 세대가 중국 국가운영의 중심부로 진출한 것을 대내외에 선포하고 있다. 시진핑과 리커창이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됐고, 리위안차오와 보시라이가 정치국 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들이야말로 ‘중국 개혁개방의 증인이며, 수익자이며, 참여자이며 추진세력’인 것이다.

□ 아찔한 높이의 현대식 건물이 들어선 상해의 뒷골목에는 쓰러질 듯한 집에서 다닥다닥 붙어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공존해 있다.

학계에도 그들 77, 78학급은 많이 진출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로서는 내가 만날 수 있는 범위가 대체로 교수 사회이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서 ‘후삼계’ 세대를 살필 수밖에 없다. 그들의 특징을 굳이 말하라면, 스스로 은근히 프라이드가 강하고, 국가 사회에 대한 헌신성과 열정이 대단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들은 1977년 이전까지의 아픈 기억을 쉽게 잊어버릴 수는 없지만, 그 이후의 삶에서 많은 부분을 보상받았다는 생각도 하는 것 같다. 앞에서 천밍밍 교수의 입을 빌려 ‘역사적 행운아’라는 말도 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행운’ 못지않게 시대에 대한 소명감과 책임감도 대단하다. 꿈에 그리던 대학 입시를 볼 수 있었고, 대학에 진학하고서는 모든 것이 국가부담으로 공부할 수 있는 국가 시스템의 혜택도 충분히 받았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신뢰와 국가에 대한 책임의식이 유난히 강한 세대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시장경제가 본 궤도에 오르면서 중국 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 대체로 80년 이전까지만 해도 대학생들은 국가의 보조를 받고 있었다. 대학생 수도 적었지만 사회 시스템이 그랬었다. 입학금, 등록금은 말할 것도 없고, 기숙사도 무료, 교과서도 무료로 공급받고, 적으나마 생활보조비도 받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대학생 수는 늘어났고, 국가의 대학 지원금도 나날이 줄어들고 있다. 학생들은 옛날 같지 않게 등록금도 내야하고, 숙식비 모두가  자가 부담이다. 취업도 제 힘으로 해야 한다. 농촌이나 오지의 백성들은 대학 보내기가 여간 힘들지 않은 세상이 되고 말았다. 결국 부익부 빈익빈 문제가 중국의 진로를 새롭게 열어가도록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 한국을 다녀간 콜린 파월 전 美국무장관, 미국 최초의 흑인 국무장관이었던 그가 중국에 대해 한 말이 있다. “중국의 힘은 군사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부흥에서 나온다”고 말하고, 냉전의 위협이 사라진 지금 인류 앞에 놓인 세계사적 중요과제는 빈부격차 해소, 에너지, 환경 이슈와 자라나는 세대를 어떻게 교육할 것이냐의 문제라고 제시했다. 중국이라고 예외일 수가 없다. 더 심각하다고 말할 수 있다.
1966년부터 10년간, 한국과 중국은 너무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 기간에 한국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반면에 중국은 문화대혁명으로 쑥밭이 돼버렸다. 시장경제로 경제적 도약을 이뤄냈던 한국은, 그러나 대학생들이 학비 마련을 위해 여간 고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반면에 중국은 대학생들마저 공짜로 공부하고 취업 배정도 국가의 몫이었다. 그런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시장경제로 이행하면서 중국의 대학생과 학부형들이 죽을 고생들을 하고 있다. 이번 제17차 중국 인민대표대회에서 채택된 호금도의 ‘과학적 발전관’이라는 것도 성장과 함께 배분의 문제도 심각하다는 것을 얘기해준다. 다만 ‘양극화’니 어쩌니 하면서 ‘빈부격차’ 문제를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가지고 사생결단으로 정치 싸움의 도구로 삼지 않는 것이 한국과 다를 뿐이다.
작가 노귀는 서른 살이 돼서야 대학생이 될 수 있었다. 그는 고난의 30년 세월을 ‘고고 회복’ 한 방으로 되찾았다. 5년 뒷면 중국의 정상에 오를 ‘후삼계’, 그들은 노귀와 더불어 고난의 시절을 보냈고, 지난 30년 개혁 개방을 위해 구체적으로 참여하고 헌신했다. 문화대혁명, 그 잃어버린 10년을 중국 사람들은 용케도 살려냈다.

* 이번 50회를 끝으로 ‘연재기획 : 이중의 중국산책’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과 지난 2006년 3월부터 1년 6개월 넘게 글을 써 주신 이중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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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suyu 2007-11-01 13:46:14
그 동안 중요한 정봉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잘 읽었습니다.
但, 중국 人名, 地名 들을 漢字가 아닌 한글로 적었을 때는 判讀하기거 어려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