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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마라, 쓸쓸한 저녁의 속내를”
“묻지마라, 쓸쓸한 저녁의 속내를”
  • 허형만/ 시인 목포대 교수
  • 승인 2007.10.22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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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단상 시인이 부치는 편지

가을이면 누구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한다.

적당히 잘 익은 햇살과 옷깃에 꽃잎처럼 달라붙는 바람과 더불어 어디라도 좋으니 떠나고 싶어 한다. 나도 그랬다. 지금 책상과 방바닥에 널려있는 책과 잡지사의 원고청탁서와 부탁받은 시집 해설들을 잠시 저만치 밀어두고 그냥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다.

아직 덜 끝난 박화성학회 발표 논문이며 약속만 해놓고 엄두도 못 내고 있는 김영랑 관계 자료들이 눈에 밟힐지라도 몇 날 며칠 통신이 두절된 그 어딘가에서 홀로이고 싶었다. 홀로이면서 가을 햇살과 가을 바람과 가을의 향기에 젖어들었으면 싶었다. 마치 높은 가지 끝 한 마리 까마귀처럼.

그러던 차 마침 (사)충북시를사랑하는사람들(회장 심억수 시인)로부터 하루 충청도 일원의 독자들과 함께 열차 여행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왔다. 이 가을에 ‘시사랑 열차’라니, 더욱이 내 시를 사랑하는 독자들과 함께라니, 얼마나 아름다울까 싶어 흔쾌히 승낙했다. ‘꿈은 이루어진다’ 했던가. 2007년 10월 13일, 오전 8시 21분. 시사랑 회원들과 충청 지역 독자 150명이 조치원 역에서 내 고향 순천으로 향하는 통일호 열차에 오르면서부터 나의 가을 여행은 시작되었다. 이날의 여행 명칭은 ‘허형만 시인과 남도로 떠나는 시사랑 열차’였다.

이날처럼 열차를 전세 내어 열차 안에서 시를 낭송하고 시를 이야기하며 흥에 겨웠던 적은 지난 겨울, 계간 시 전문지 『시안』이 주최한 무박 2일 정동진 여행이 있긴 했다. 새벽에 정동진에 도착해서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환호성을 지르고 오긴 했었다. 돌아와 시를 써서 그 잡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렇게 겨울 여행은 또 겨울 여행대로 맛깔스러웠다. 그러나 그때는 순수한 시인들만의 잔치였다면 이번의 가을 여행은 그땐 맛보지 못한, 초등학교 1학년생부터 70줄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시를 사랑하는 독자들과 함께라는 점에서 색다른 감흥이 일렁였다.

순천 역에 내린 150명 시사랑 가을 여행 독자들은 순천시에서 내준 3대의 버스에 탑승하고 내 모교인 순천고등학교로 이동하여 점심을 먹고 솔밭에 모여 시낭송을 했다. 나는 ‘고향과 시’라는 주제로 문학 강연을 했다. 그리고 순천만으로 이동했다.

순천만 갈대밭은 언제 보아도 정겹다. 푸릇푸릇한 봄이면 봄대로 아직은 덜 바랜 초록과 갈빛을 띤 가을은 가을대로 정겹다. 이제 가을이 깊어가고 겨울이 저만치 손짓할 즈음이면 갈대는 흰 꽃으로 화사하리라, 흑두루미도 돌아와 이곳에서 한겨울 안식을 취하리라. 갈대밭은 세계 5대 연안 습지로 지정된 그 가치만큼 장관을 연출하고, 그 광활함에 감탄한 청주의 한 독자는 평생 내륙에서만 살아 이런 곳은 처음이라며 올 가을이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갈대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처음 마주치는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누면서 동행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말했다. “이 가을이 참으로 행복합니다.” 청주에서 온 중년의 독자가 화답했다. “저는 이 가을에 쓸쓸해지지 않으려고 생머리를 파마로 바꾸었답니다.” 일행들이 환하게 웃었다. 순천만을 떠받든 하늘이 유난히 맑아 보였다. 엷은 구름도 오늘따라 신비롭게 보였다. 마침 왜가리 한 마리가 우리들 머리 위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허공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그때, 음성에서 왔다는 독자가 시를 읊었다. “새떼들 솟아오르고/갈대 눕는다//대대포구로 떨어지는 해/뻘 속을 파고드는데// 묻지 마라/쓸쓸한 저녁의 속내를//만월 일어서고/별 하나 진다” 바로 내 시 ‘순천만’이었다.

가을은 사람들을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하게 한다. 가을이 되면 융의 말처럼 비록 그 대상이 알 수 없는 열망, 결코 충족되지 않는 그리움일지라도 사람들은 여행을 하고 싶어 한다. 도피가 아니라 순종이 아니라 어쩜 우리네 한 삶이 여행이듯이 떠남과 머무름이 결코 다를 수 없듯이.

 ‘허형만 시인과 남도로 떠나는 가을여행’에 함께 해주신 분들을 태운 ‘시사랑 열차’는 저녁 6시 다시 조치원을 향해 떠났다. 나는 순천 역 출구에서 그들을 일일이 손을 잡아 배웅했다. 이 가을이 참으로 아름다웠다는 말과 함께 행복하시라고. 다시 홀로된 나도 내 고향 순천을 떠나오며 버스 안에서 내내 행복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나의 시 ‘가을 노래’를  떠올렸다.

가을에는 그대여
서로 위로하자
햇살은 빛나
강물의 피부가 저리 곱고
들꽃 한 송이도
따뜻한 대지에서 향그롭나니
우리네 삶이
비록 흔들리는 절망이래도
가을에는 그대여
서로의 슬픔을
꼬옥 껴안을 일이다.

 

1945년 전남 순천 출생.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3년 『월간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후 시집 『첫차』 『영혼의 눈』 『비 잠시 그친 뒤』 등 11권과 평론집 『시와 역사인식』, 『우리 시대의 젊은 시인 읽기』, 『문병란 연구』, 『우리 시와 종교사상』 외 수필집 등의 저서가 있다. 목포현대시연구소장, 우리문학기림회장,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 광주시문예진흥위원, 전남도문예진흥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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