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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師無往敎之禮의 교훈
[원로칼럼]師無往敎之禮의 교훈
  • 교수신문
  • 승인 2001.1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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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1-13 10:00:42
인류 역사이래 수많은 직업 중 남을 가르치는 일을 가장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 여기에 종사하는 사람을 스승이라 일컬어 만인이 존경해왔다. 본래 예언자인 ‘무당’에 뿌리를 둔 스승이란 말속에는 남의 모범이 되는 言行과 예절을 갖춘 인격자, 학문을 닦는 선비라는 뜻도 함께 들어있다.

따라서 예로부터 스승이 되고자 하는 이는 먼저 남의 師表가 될 수양으로 인격을 다듬고 거기에다 해박하고 심오한 지식을 쌓은 연후에 가르침에 임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동서고금의 대학자는 모두가 고매한 인격과 학식의 소유자였으며, 그들의 문하에는 제자들이 다투어 모이고 그에 따른 학풍이 형성되었 정보화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 이 무슨 해묵은 言說이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세상이 몇 번 바뀌어도 가르치는 일은 변함이 없고 그 가르침의 법칙 또한 변함이 없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외형상으로 보면 인구대비 대학생의 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 문맹률이 3% 이내인 나라, 세계에서 교육열이 가장 높은 나라가 우리나라다. 그럼에도 스승이 가장 존경을 받지 못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교육현실이 이 지경에 이르자 작금에는 교사 단체나 교사 후보자들의 심한 몸부림이 있었는가 하면 지방의 모 고교에서는 학부모 수백 명이 스승을 존경하겠다는 이색행사도 벌였다지만 이것은 한낱 가냘픈 몸짓일 뿐 결코 결정적인 처방이 될 수는 없다. 왜 우리교육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그 이유는 교육정책의 정치논리, 시장논리 의존에 따라 朝令暮改식 지시행정으로 교육현장은 혼란과 고통이 가중되었고 이에 학생과 스승과 학부모 상호간의 인간적인 만남에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교육현장에는 교실은 난장판, 교무실은 싸움판, 교감은 눈치판, 교장은 미칠판, 학생은 놀자판, 교사는 죽을판이라는 自嘲的인 한탄의 소리가 쉼없이 터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좌절할 수는 없다. 우리 교육이 제자리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교권이 바로 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부, 학무모, 교육자가 모두 변해야 한다. 교육부는 지금까지의 관치주의적 지시행정을 지양하고 교육의 전문성을 제고할 수 있는 지원행정으로 전환해야 한다. 학부모 역시 교육을 교육전문가인 스승에게 맡기고 그들의 자존심에 손상이 가는 행위를 금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육자 자신이 변하는 일이다. 교육자는 단순한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며 지식을 판매하는 노동자도 아니다.

가르치는 직업은 다른 직업과는 달리 敬業, 樂業, 勤業의 정신이 들어 있는 숭고한 직업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신으로 교단에 임할 때 교권은 바로서게 된다. 조선조 인조가 우암(송시열)을 둘째 아들 봉림대군의 스승으로 정하고 대궐에 들어와 가르치도록 명했다. 그러나 우암은 정중하게 “스승은 가서 가르치는 예가 없습니다(師無往敎之禮)”라고 사양했다. 이에 왕은 크게 뉘우치고 대군을 스승의 집에 가서 배우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오늘날 높은 어른의 자제를 가르쳐달라고 부탁 받으면 가문의 영광이라며 허위허위 달려가는 이들이 한번쯤 반성해볼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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