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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中國 散策-43 ]한중수교 15년
[이중의 中國 散策-43 ]한중수교 15년
  • 교수신문
  • 승인 2007.08.27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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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익을 위해서라면” 영원한 적국도 동맹국도 없다

□ 1972년 미국과 중국은 국교를 수립했다.

폭풍우 휘몰아치고
깃발이 마구 휘날리니
이것이 바로 인간세상이어라
지나간 서른여덟 해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가버렸네

세상에 못해 낼 일 없노라
마음먹고 오르려고만 한다면

風雷動/ 旌旗奮/ 是人…世上無難事/ 只要肯登攀

모택동의 시 <정강산에 다시 올라(重上井岡山)>의 마지막 구절이다. 1965년 5월 하순, 모택동은 38년 만에 자기의 첫 혁명 근거지였던 정강산을 찾아서 이 시를 썼다. 1937년 10월 그는 호남성 고향에서 추수봉기를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잔여부대를 이끌고 험한 오지인 정강산으로 숨어 들어왔다. 정강산에서 시작된 그의 공산혁명 전쟁은 1949년 10월 10일, 북경 천안문 광장에서 세기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새 중국의 건국을 선포하면서 승리로 막을 내렸다.
“지나간 서른여덟 해/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가버렸네”라고 의역을 했지만, 직역을 하면 “서른여덟 해 지나간 시간도 손가락을 튕기는 짧은 한 순간이네” 쯤 될 것이다. 이 시는 중국의 시 잡지 <詩刊> 1976년 1월호에 발표되었다. 이 시를 쓴 시기는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 1년 전 쯤이었고, 발표는 묘하게도 모택동이 죽기 8개월 전에 이루어진다.     
1992년 8월 24일에 한국과 중국의 수교가 이루어졌다. 15년이 어느 새 지나가버렸다. 38년에 비하면 ‘손가락을 튕기다만’ 아주 짧은 시간일 것이다. 이념과 체제, 관습과 지향, 어느 것 하나도 닮은 것이 없었던 전혀 이질적인 두 나라가 어느 하루 덥석 손을 잡고 인적, 물적 교류를 시작한지 어느덧 15년 세월이 훌쩍 흘러가 버린 것이다.
지난해인 2006년도 한국과 중국을 오간 사람 수는 엄청나다. 한국인 392만 4천여 명이 중국을 찾았고, 중국인 89만 7천여 명이 한국을 다녀갔다. 수교 첫 해인 1992년엔 한국을 찾은 중국인이 8만 7천명, 중국을 찾은 한국인이 4만 3천명이었는데, 불과 15년 만에 인적 교류는 37배나 늘어난 셈이다. 한국인 중국 유학생 수도 날로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엔 6만 여명이 중국으로 유학을 갔고, 중국 내 외국인 유학생의 40%나 된다. 1992년 매주 30여회에 지나지 않던 항공편도 이제 780회나 된다.
한국과 중국의 수교는 시기적으로 보아 사실 힘든 일이었고, 북한과 대만을 두고 매우 긴장되는 외교문제였다. 중국과 북한은 피를 같이 나눈 동맹이었고, 대만 역시 대한민국 정부에게 있어서 오랫동안 유일한 중국 정부였다. 중국은 북한을 달래야 했고, 한국은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명동의 중국대사관을 새로 국교를 튼 중화인민공화국에 넘겨주고 말았다. 북한과 대만의 배신감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엔 영원한 적국도, 영원한 동맹국도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극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1992년보다 20년 앞서 미국과 중국은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국교 수립을 다짐하는 양국 수뇌회담을 북경에서 가졌다. 당시 국제 反共전선의 최선봉에 섰던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공산 중국을 직접 방문하고 모택동과 자리를 같이 했다. 1972년 2월 21일, 닉슨은 북경 공항에 내려 주은래 총리의 영접을 받았다. 중국 측의 많은 고위 환영 인사를 배제시킨 가운데 트랩에서 내려오는 미국 대통령 내외를 중국은 총리 혼자서 영접한 것이었다. 전 세계의 매스컴이 주목하는 가운데 연출된, 이 선명하고 기억에 오래 남을 역사적인 명장면은 오로지 닉슨 대통령에게 포커스가 맞추어지도록 배려한 결과였다는 얘기가 나중에 나왔었다.
원래 두 정상의 만남은, 날짜와 시간을 미리 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모택동의 건강 상태를 고려해서 적절하게 진행시키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닉슨이 오는 당일 바로 만나고 싶어 했다. 당일의 만남은 의전 관례상 무리였고, 일정을 조정해야 할 주은래도 이미 공항으로 가고 없었다. 나중에 이와 같은 모택동의 뜻을 전해들은 주은래가 ‘영활성’을 발휘하여, 닉슨과의 공식 오찬 순서를 마친 뒤, 곧바로 닉슨의 다른 공식 일정이 시작되기 전에 중남해의 모택동 서재로 닉슨 미국 대통령을 안내함으로써 순조롭게 진행 되었다.
애초에 15분으로 예정되었던 회담 시간이 65분으로 늘어나 1시간을 넘겼다. 모택동과 주은래, 닉슨과 키신저, 그리고 양측의 통역들만 배석하는 자리였다. 미국과 중국의 수교는 철저히 국가이익의 추구라는 원칙에 입각해서 추진되고 진행되었다. 닉슨은 이 점을 분명히 했다. 양국의 수교는 미국의 국가 이익을 위한 것이고, 중국의 국가 이익에도 부합하는 것임을 확실히 했다. 모택동은 바로 이러한 닉슨의 현실 추구노선을 높이 평가했다.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에서 불우하게 중도하차고 난 뒤에도 모택동은 닉슨 전 대통령을 칭찬하며 챙겼다.
키신저의 회고록 <백악관 시절>엔 모택동과 나누었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한번은 중공 방문 중, 등소평에게 우리 양국의 관계는 서로가 상대방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고 있지 않으므로 건전한 토대 위에 있다고 논평한 일이 있었다. 다음 날 모택동은 나의 논평에 대해 언급하면서 동시에 세부적인 데까지 관심을 표시하였다.”
그는 단호한 태도로 나의 진부함을 반박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만약 어느 쪽도 상대방에게 요구할 것이 없다면 귀하는 무엇 때문에 북경에 왔나요? 어느 쪽도 서로에게 요구할 것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 하러 귀하와 대통령을 받아들이려 한단 말입니까?”
그는 우리를 폭풍 앞에 있는 재비에 비유하였다. “이 세상은 고요하지가 않습니다.” 그는 고통스럽게 말을 토해 내면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폭풍과 바람과 비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람과 비가 가까워질수록 제비들은 바빠집니다. 바람과 비가 닥쳐오는 것을 연기시키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오는 것 자체를 막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한국과 중국도, 바람과 비가 닥쳐오니 바빠지기만 하는 제비들처럼 수교를 서둘렀던 것일까? 두 나라의 국가 이익은 무엇이었을까? 당시로서는 오로지 ‘경제’였을 것이다. 한국 경제의 확실한 優位, 88 올림픽 이후의 한국 경제의 눈부신 성장 동력이야말로 중국이 가장 탐내는 미끼일 수 있었다. 중국은 외국 자본의 투자가 간절한 시기였다.
15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적지 않은 분야에서 역전현상이 없지 않고, 많은 부분에서 상호의존적이 되어버렸지만, 1992년 당시만 해도 한국 기업의 중국 진출이야말로 중국 경제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중요한 몫이었다. 양국 간의 교역 총량은 1992년 63억 7천만 달러에서 2006년 1,180억 5천만 달러로 무려 20배 이상이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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