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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로고스와 파토스
[문화비평]로고스와 파토스
  • 김현식/한양대·역사학
  • 승인 2007.07.16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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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 따르면, 수사(修辭)의 힘은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 그리고 로고스(logos)의 결합에서 온다. 즉, 인격(권위), 감성, 논리(이성)가 설득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서양 제현(諸賢)에 의해 최상의 가치로 부각된 것은 로고스였다. 곧 이성의
판별력에 기초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이야말로 정당성의 초석이며, 진실의 근거라는 것이다. 서양의 모던을 정초한 베이컨과 데카르트가 이의 좋은 실례인데, 그들의 작업이란 한 마디로 우상과 편견의 제거 및 회의와 의심을 통해 “아르키메데스의 지렛점” 곧 부동의 로고스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사물에 대한 인간의 제국”을 건설하며, “모든 학문에서 진리에 도달”하는 밑거름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서양의 모던이란 로고스중심주의에 다름 아니며, 모던적 교육이란 곧 호모 사피엔스의 양육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삶의 끝에는 무엇이 남을까. 사십을 넘겨 오십에 이르고, 육십을 넘어 칠십에 이르면 무엇이 기억될까.
며칠 전 어머니와 친구 분을 모시고 저녁을 먹었다. 뎅그러니 고기 한 접시의 만남이 아니라, 경춘가도의 드라이브가 곁들여진 풀코스의 만찬이었다.
추억은 많다. 초승달과 그 곁의 노란 별, 군청색의 산들 사이로 불 켜지던 춘천, 그리고 골 패인 어머니, 어머니. 차를 모시던 친구 분께 어머니는 ‘음악’을 부탁하셨고, 친구 분께서 노심초사 고르신 것은 저 유명한
‘휴게소 테이프’였다. 컴퓨터가 합성한 인조 색소폰을 풍경삼아, 허스키의 한 여가수가 연속 눌러 내리는 블루지(bluesy)한 옛 노래들. 소양강물 따라, 못 다한 사랑, 이별과 추억, 그리움, 서러움, 아쉬움, 서글픔이 흘러내렸고,
그 한가운데 어머니 말씀도 섞여 흘렀다. “넌 모르지. 나이 들면, 이런 것들이 좋아져. 감상적인 것들이.” 유치하고 애잔한 감정의 부스러기들. 흔하디흔해 차라리 가벼운 납덩이들이 어머니와의 저녁에 별처럼 박혀 있었다.
인터넷을 하면, 중독되어 가보는 곳이 몇 군데 있다. 그 하나가 중고 오디오 기기를 매매하는 유명 사이트이다. 처음에는 진공관 때문에 들렀는데, 요즘은 자유 게시판 때문에 종종 그 곳에 머문다.
“낡았으나 최고인(Oldest but Goldest)” 추억의 팝송 때문이다. 주로 사오십 대 ‘아저씨들’이 주류를 이루는 데,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애잔한 음악과 감상적인 글이 화면 가득하다. “괜스레 울고 싶어진다. 음악
때문일까”, “비오는 날엔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어디로 가야할지 나도 비도 알지 못하더라도”, “영원히도 아닌 짧은 생을 살면서 그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묻기에, 자식도 다 키우고, 시간도 나고 하니, 후회 없이 타오르는 진한 사랑, 다시 한 번 하면 안 될까”, “외로움과 고독만이 나의 벗이니,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중년의 그림자인 외로움이여” 등등. 중년 아저씨들의 모임에서도, 내 어머니의 서글픈 노래와 목소리가 넘쳐흘렀다.

파토스. 고대 그리스 당시부터, 에토스의 파탄과 연관된 불길한 단어. 어둠과 고통의 심연. 로고스에 비할 때, 언제나 파토스는 가볍고 일시적이며 유치한 표면이었다. 타락과 파멸로의 경박한 충동이었다. 하지만 무엇을 기억할까? 삶의 끝날, 우리는 무엇을 원할까? 로고스? 거대하나 차갑고 무표정한 그것?
난 차라리 굴곡과 부침(浮沈)의 파토스이다. 내 곁의 살아있는 하나의 감성이다. “그는 그녀의 눈길이, 강물 깊은 곳으로 퍼져 내리는 햇살처럼, 자신의 영혼을 관통함을 느꼈다. 그는 일순의 망설임 없이, 자신의 사랑이 보답 받으리라는 일말의 희망 없이 그녀를 사랑했다. 무조건적으로. 이 고요한 황홀경속에서…그는 자기희생의 열망, 즉각적인 헌신에 대한 절박한 충동을 느꼈다.”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의 한 구절. 프레더릭 모로는 아르노 부인에 대한 순백의 감정으로 불타오른다. 물론 열여덟에 시작된 그의 사랑은 끝내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의 구절로 종결된다. 그래도 그것이었다. 마흔에 이르기까지 그를 헌신케 하고, 그를 일하게 하

며, 그를 존재케 한 것은 그녀에 대한 파토스였다. 그녀를 통해 교육된 감성이었다. 파토스, 파토스의 힘.
우리를 움직여 살게 하는 것은, 정녕 회색의 일상을 녹색으로 지탱케 하는
것은, 빙한(氷寒)의 로고스가 아니다. 오히려 “끝까지 가봐요. 우리”의 짙고도 강렬한 파토스이다. 비록 그 끝이 서걱거림의 회한일지라도.

김현식/한양대·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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