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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 모델·조직사회성 갖춘다면 ‘그들만의 리그’는 없다
역할 모델·조직사회성 갖춘다면 ‘그들만의 리그’는 없다
  • 한경희 / 연세대·공학교육혁신센터
  • 승인 2007.07.15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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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여성, 그리고 과학기술

과학과 공학 분야의 여성 문제는 숫자로 비교적 간단히 드러난다. 첫째, 대학에서 공학과 자연과학을 전공으로 선택하는 남녀 비율에서 차이가 있다. 2006년 4년제 대학의 자연과학계열과 공학계열에 입학한 여학생 비율은 각각 55.1%, 19.0%이다. 자연과학 계열에 여학생 비율이 높은 것은 졸업 후 진로 등으로 인해 남학생들의 지원율이 줄고 생물학, 화학 등 여학생 선호학과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둘째, 과학과 공학 분야에 진출한 후에도 전공 선택에 있어서 성차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면 생물학, 화학, 건축공학이나 생명공학 진출이 두드러지고 물리학이나 기계공학, 금속공학, 전기전자공학 비율은 매우 낮다. 셋째, 고등학교에서 대학교, 대학교에서 대학원, 사회 진출로 올라감에 따라 여성 과학자나 여성 엔지니어의 생존율은 점점 더 낮아지고 그들의 모습은 사라져 간다. 2006년 자연과학계열과 공학계열을 졸업한 석사 중 여학생 비율은 각각 43.7%, 12.6%이며 박사 졸업생 중 여학생 비율은 이 보다 더 줄어 각각 33.4%, 7.6%에 불과하다.

과학, 남성 전유물로 당연시 여겨
그런데 그 원인 분석에는 상당한 편차가 존재한다. 우선 과학에 대한 전통적 견해를 지니고 있는 학자들은 여전히 과학이 본질적으로 여성과는 잘 맞지 않는다고 본다. 최근 들어 과학과 공학 분야의 우수 인재 풀 자체가 축소되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들에겐 과학 분야의 여성 비율이 낮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하등 문제될 것이 없었을 것이다.
과학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문화적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뿐 아니라 충분한 지적 능력과 경쟁력을 가진 사람(남성)이 과학을 행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사회는 이러한 전통적 견해를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지는 않다. 여성을 매우 수동적이고 결핍된 존재로 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나 빅토리아 시대의 의학 이론에 찬성할 사람은 이제 많지 않다. 하지만 이와 유사한 근거를 들어 여성이 과학이나 공학 분야에 참여하는데 거부감을 갖거나, 혹은 여성이 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는 생각은 여전히 성별을 막론하고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선구적인 이 시대의 페미니스트들이 과학의 남성중심성을 공격하고 비판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다. 이들은 근대 과학의 제도와 문화에 내재된 남성중심성과 젠더 스테레오타입을 효과적으로 분석해왔고 여러 가지 대안을 제시해 왔다. 하지만 과학기술과 여성의 오랜 문제를 현실적인 측면에서 해결하는데 이러한 비판이 그리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들 논의는 여성이 과학기술 분야에 진입해야 할 이유와 전략, 생존하고 승리하는 법을 제시하기 보다는 오히려 여성들로 하여금 과학 내부에서 싸우거나 과학을 멀리하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페미니즘을 과학기술분야 여성 문제의 원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과학과 공학의 여성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놓치고 있거나 혹은 실패하고 있는 지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우리가 새로운 관점에서 시도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보려는 데 의도가 있다.
첫째, 과학과 공학 분야 여성의 과소대표(under-representation) 문제는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다루어져 왔다. 전통적인 사고를 가진 근대 과학자들은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심리적 차이를 탓하면서 문제의 원인을 여성들에게 돌렸지만 곧 반격을 받았고 (공식적으로는) 신뢰를 잃기에 이르렀다. 반면 페미니즘을 비롯해 다양한 사회과학 분야 연구들은 과학이 가지고 있는 남성 중심 문화와 제도적 차별 구조, 사회화 과정, 인지적 특성 등을 효과적으로 지적해 왔고 이 문제를 시정하기 위한 대안들을 제시해 왔다. 이 중에서도 칸터는 여성이 조직 내에서 임계치(critical mass)를 확보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지적하면서 15%를 그 기준으로 제시한 바 있다.
나는 얼마 전 기계공학과 연구실 학생들과 만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여학생이 전무했던 연구실에 최초로 여학생이 들어오자 처음엔 혼란 그 자체였다고 한다. 더운 여름, 웃통을 벗어던질 수도 없었고 말이나 행동에서 매우 불편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또 다른 여학생이 들어오면서 간단히 해결되었다. 새로운 변화에 함께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또한 연세대 공과대학에서 2007년에 실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여학생 비율이 높은 건축, 생명, 화공 분야 여학생들이 그렇지 않은 기계, 금속, 토목, 전기전자 분야의 여학생들보다 평균적으로 자신의 전공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높고 전공에 대한 소속감도 높게 나타났다. 임계치 확보가 중요한 이유를 보여준다.

‘임계치 확보’ 과대평가해선 안돼
하지만 임계치 확보가 완벽한 대안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다른 연구들에서 지적되었듯이, 임계치가 확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과 공학 분야의 오랜 조직 구조와 문화로 인해 여전히 여성들은 고립되기 쉽기 때문이다. 임계치 확보는 좋은 출발이지만 과대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여학생들이 많이 진출하고 있는 자연과학과 공학 분야 중 상당수는 오히려 산업 수요가 많지 않기 때문에 취업과 직업의 질, 경력 개발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한 남성의 텃밭에 발을 들이는 데 대한 두려움, 장기적 시야와 기획 능력의 부족이 과학자, 엔지니어로서의 인생 설계에 영향을 미친다.
둘째, 험난한 몇 단계를 무사히 통과하고 과학, 공학 분야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여성들의 문제를 살펴보자. 외국의 한 연구에 따르면, 어느 정도 성공한 위치에 있는 여성 과학자나 엔지니어들이 일을 중도에 그만두고 빠져 나가는 비율이 남성에 비해 훨씬 높다고 한다.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예상된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흥미롭게도 전공 분야의 연구나 일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 중 대부분은 과학과 공학 마니아라 부를 만큼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전공 분야를 떠나면서 과학을 탓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탓한다. 이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전공 분야 외로 처리해야 할 일들(extra stuff)이다. 동료 및 상사와의 관계, 연구 자금 수주, 대학이나 기업 등 직장에서 승진을 위해 감당해야 할 업무와 경쟁, 이 뿐만 아니다. 여성 과학자나 엔지니어들은 가족을 갖지 않기로 결정해도 가족과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아이를 낳아도 직장에서 눈총을 받는다. 결국 몇 고비를 넘은 여성들도 어쩔 수 없이 ‘엄마 트랙’을 가기로 결정하게 된다.
이런 면에서 전공 선택이나 경력 개발,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 현명하게 대처하는 능력에 대해 적절하게 조언을 받고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는데, 과학 및 공학 분야 여학생들은 쉽지가 않다. 연결망 연구에 따르면, 소수 집단(minority)은 조직에서 끼리끼리 움직이는 유유상종의 모습을 보이기 쉬운데, 이것은 과학과 공학 분야 여학생들의 조직 적응 능력 개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함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 사이에 정서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위로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부딪히는 실질적인 능력을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기서는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어 보려고 한다. 첫째, 훌륭한 여성 과학자와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역할 모델과 리더십 교육, 사회적 소통 능력의 형성이 필요하다. 나는 공과대학에서 일하면서 많은 재능 있는 여학생들을 만난다. 그들은 A학점도 잘 받고 보고서도 잘 쓰며 자신의 일을 꼼꼼하게 잘 챙긴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변부를 맴돈다. 함께 캠프를 가도 종종 불만을 토로하며 개인행동을 하고 연구실 선배들의 연구 이외 업무 요구에 이의를 제기하다가 순간 왕따가 되기도 한다.
혼자 결정해 조용히 유학을 다녀왔지만 누구를 먼저 만나 인사하고 어떻게 일을 시작해야 할 지 막막해 하기도 한다. 나는 이런 일들이 더 이상 개인의 수준에서 반복되지 않았으면 한다. 과학 분야 여성들은 사회적 소통의 기회와 방법에 익숙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동료나 선후배, 상사와 원활한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겪고 역할 모델이 없다보니 앞으로 어떤 일들을 어떻게 헤쳐 나가 무엇이 되어야 할지를 설계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과학 및 공학 분야 여학생에 대한 다양한 전공 외 교육 프로그램과 멘토 시스템이 구체적으로 초·중등교육과 대학교육, 각 직장에서 우선적으로 시작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여성들의 과학 리터러시(scientific literacy)를 키우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과학 리터러시는 개인의 의사결정, 시민사회에의 참여, 경제적 생산성과 관련해 요구되는 과학적 개념과 과학지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의미한다. 과학이나 공학에 대한 기본적인 능력을 갖는 것은 이 분야의 여성 참여를 늘릴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고 ‘그들만의 리그’에 개입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과학과 공학의 지식과 인공물들은 순수한 과학적 과정이 아닌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과정과 깊이 연관되면서 구성된다. 또한 대부분의 과학자나 엔지니어들은 주어진 조건과 제약들을 고려하면서 최선의 지식과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이 과정에는 의도하거나 의도하지 않은 변수들이 개입되고 복잡한 양상을 띤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이 여성들로 하여금 과학을 포기하거나 멀리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과학은 인간과 자연, 사회에 대한 탐구이며 미래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과정 중 하나이다. 따라서 과학, 공학 분야로의 여성 참여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다. 어떤 이들은 과학이 여전히 남성들에게는 이룰 수 있는 꿈, 곧 현실인 반면, 여성들에게는 이룰 수 없는 꿈, 환상(fantasy)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지금은 환상에서 깰 때다. 과학은 우리 시대의 거울이며 문화적 자산이다.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그리고 인류에게 좋은 과학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비단 여성에게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유익한 일이다.

한경희 / 연세대·공학교육혁신센터


필자는 연세대에서 “지역기반 기술협력 연결망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과학기술과 성불평등, 다른과학, 1998” 등을 썼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전문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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