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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中國 散策]상해 개발 현장
[이중의 中國 散策]상해 개발 현장
  • 교수신문
  • 승인 2007.07.09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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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강이 황해 바다와 닿는 지점을 長江 삼각주라 한다. 장강 삼각주는 양질의 항만을 필요로 하고 있다. 현재 상해항의 수심은 9.4~15m정도인데, 만조가 되어야만 2천5백TEU 물량을 실은 화물선이 드나들 수 있다. 세계 제1의 물류 허브 항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데 한계가 있다. 또한 계속 준설을 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때문에 수심 15m의 항구적인 항만시설이 필요하다.
지난 2004년 통계를 보면 상해항의 총 물동량은 3.79억ton에 이르렀다. 세계 2위였다. 컨테이너 물동량은 세계 3위로 1천4백55만 TEU였다. 물동량은 날로 증가추세에 있다. 상해와 가까운 바다 한 가운데 수심 15m 이상의 섬을 찾아낸 것이 절강성의 양산도였다. 양산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를 건설하고, 거기에 대규모의 컨테이너 터미널을 만들자는 구상은 그래서 나온 것이었다. 1차 공사는 재작년에 완성을 보았다. 
입구에서 양산 보세항구 관리위원회가 발행하는 임시통행증을 받아서 32.5Km의 동해대교를 건넜다. 바다 부분만도 25Km나 되는, 세계 최장의 다리라고 하는데, 상해 남회구의 蘆潮港과 양산항을 이어주고 있다. ‘소양산 隧道(터널)’을 지나 전개되는 양산 심수항은 하나의 별다른 신천지였다. 소양산도에 이어 대양산도 공사도 진행 중이었다. 전망대 비슷한 바위산에 올랐다. 천지사방이 창망한 바다였다. 연방 컨테이너를 실어 나르는 배와 화물차가 이 바위섬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양산 심수항의 최종 규모는 船席 52개(수심 15m), 처리 능력 2천2백만 TEU, 세계 최대 규모를 목표로 하고 있다. 
작년에 나는 부산 新港이 건설되는 加德島를 가 본 적이 있었다. 20여 년 전에 가덕도 앞 바다에서 생선회를 먹던 것만을 추억 속에 넣고 현장을 찾은 나에게 가덕도 신항의 거대한 밑그림과 부푼 꿈은 “‘천지개벽’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하는 감탄을 자연스럽게 내뱉게 했다. 그보다 규모가 크고, 이미 1차 공사가 완결되어 가동되고 있는 洋山 深水港 컨테이너 터미널 광경은 또 다른 경악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거대 자본이 투입되는 이러한 공사들은 2010년 상해 엑스포와 연동되어 추진되고 있는 것도 눈 여겨 볼 대목이었다.
바위에 새겨진 ‘양산 심수항에 부치는 글’ 또한 걸작이었다. 중국인다운 자기 자랑과 긍지가 넘쳐 있었다. 天涯賓朋踏浪而來로 시작되는 글은 偉哉洋山大港, 世界嘆, 人間滄桑으로 끝맺고 있었다. 삼협 댐 건설과, 양자강 물을 황하로 끌어가는 南水北調, 그리고 양산 심수항 건설 등을 보며 “중국이 돈이 많긴 많구나!”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달러가 넘쳐나는 오늘의 중국, 그 돈을 어디에 어떻게 투자하느냐에 따라 중국의 미래는 결정될 것이다. 등소평의 말을 빈다면 “지금 잘 하고 있지 않느냐?”가 될 것이다.
외국 기자가 등소평에게 물었다. “당신이 죽고 난 뒤에도 개혁개방 정책은 계속된다고 보는가?” 등소평이 답했다. “개혁개방 정책과 내 죽음이 무슨 상관이냐?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은 건국 이래 중국이 실패와 성공을 거듭해 온 모든 정책의 총화이다. 그것이 좋은 것이라면 내가 죽고 난 뒤에도 지속될 것이고, 좋지 않은 정책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폐기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잘 하고 있지 않느냐?”
1992년 제2차 南巡講和에 나섰을 때, 등소평의 나이는 88세였다. 이 무렵에 찍힌 등소평의 사진을 보니 90을 바라보는 노인의 기색이 완연했다. 그럼에도 그는 1984년의 제1차 남순에 이어 8년 뒤에도 深 등지를 다니며 개혁개방을 다그치고 있었다. 8년 전만 해도 심천과 홍콩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등소평은 심천의 낡은 망대에 올라 홍콩을 바라보았지만, 이제는 달랐다. 홍콩 반환도 영국 대처 수상과의 협상이 잘 풀려서 타결을 보았고, 이제 5년 뒤면 꿈에 그리던 홍콩 땅을 밟을 수 있는 터였다.
그는 새로 만든 심천의 통도대교 위에서 홍콩을 바라보며 “1997년 홍콩이 조국의 품에 돌아오면 반드시 홍콩을 찾아가겠다. 걷지 못하면 휠체어라도 타고 가겠다”고 기대와 의욕을 불 태웠다. 비록 홍콩 반환이라는 역사적 대사건 몇 달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지만 등소평은 그의 得意의 ‘一國兩制’로 홍콩 반환을 매듭지을 수 있었다. 영국이 “중국 주권, 영국 통치”라는 편법을 내놓았을 때, 이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 ‘한 나라 두 체제’였던 것이다. 홍콩 반환 못지않게 등소평이 역점을 두었던 국가적 과제가 상해 개발이었다.
우리에게도 8순을 넘긴 정치 지도자들이 아직 생존하고 있다. 전직 대통령만 해도 두 사람이나 된다. 현직 지도자가 아니더라도 국가경영에 대한 훈수와, 경륜을 앞세운 지도와 충고는 가능할 것이다. 현실은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그들의 得意는 현재의 大選국면에 갇혀 있는 인상이다. 정당 정치인만큼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대선 정국을 뛰어 넘는, 나라의 백년대계를 다짐하는 원로 정치 지도자들의 음성과 행보가 아쉬운 현실이다. 우리 정치의 한계일까, 운명일까, 양산 심수항을 둘러싼 황해 바다가 너무나 넓고 망망하게 다가왔다.        
며칠 전에 다녀온 단동의 단교가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중국은 ‘6.25 사변’에서 발단된 한반도 전쟁에 직접 개입해서 전쟁 당사국이 되었다. 1950년 9월, 맥아더 장군의 진두지휘로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이내 서울 탈환과 북진이 이어지면서 평양과 원산이 UN군과 한국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중공군의 한반도 진입이 시작되었다. 지금도 18만 3천 명의 중공군 전사자들의 시신이 북한 땅에 묻혀있다. 2백만의 중공군 병사들이 ‘인해전술’로 한반도의 전선을 누볐다.
중국은 이 전쟁을 ‘抗美援朝戰爭’이라 칭하고 승리한 전쟁으로 자랑하고 있다. 요즘 한국의 한 케이블 방송(中華TV)에선 중국이 만든 <압록강의 기억>이란 기록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물론 참전의 동기와 과정도 중국 시각으로만 되어있다. 압록강을 건너서 한국 땅으로 진격해 들어가는 중국 병사들의 모습을 나레이터는 “氣像非常雄偉”라고 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 영화에선 사령관으로 내정된 팽덕회가 주로 참전을 주장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었지만, 중공군 참전의 진상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엊그제 시작된 영화라서 아직은 도입부만 나오고 있는데, 주목되는 나레이션과 비밀스런 이야기도 간간이 나왔다. 예를 들면, “9월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미국의 한반도 점령의 제1차 계획은 완성되었다”라는 해설은 통상적인 우리의 역사인식과는 괴리가 너무 크다. 아니 정반대이다. 참전 직후 팽덕회가 산 속의 김일성을 찾아가서 만나는 장면도 나온다. 팽덕회가 묻는다. “병력은 어느 정도인가?” 김일성이 조금 머뭇거리며 “이건 비밀인데 당신에게만 말한다. 우리 병력은 3개 사단만 남아 있다”고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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