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13:20 (토)
[역사비평 기획시리즈 ]식민지 시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역사비평 기획시리즈 ]식민지 시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 교수신문
  • 승인 2007.06.25 14: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을사늑약을 전후로 한국에서 활약한 미국인들은 미 본국의 루스벨트와 격론을 벌이면서 한국의 자주를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김원모는 일개 약소국의 공사 알렌이 루스벨트 미 대통령과 정책토론을 벌였으나 정책전환이 좌절된 사건을 두고, 미국의 배신행위 규탄에 앞서 한국 자체의 국력배양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신복룡은 헐버트 목사가 조선의 내재적 모순을 지적하는 동시에 미국의 묵시적 방조행위를 비판한다면서, 교육을 통한 내재적 모순 극복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알렌’의 하와이 이민 단행과 한국 보전책

알렌(H. N. Allen, 安連)은 1884년 9월 의료선교사로 내한했지만 외교관으로 변신, 주한 미국공사로 1905년 5월 본국으로 소환될 때까지 21년간 한국에서 최장기 체류했다. 알렌이 한국을 위해 공헌한 것은 두 가지이다. 한국인 하와이 이민 단행과 한국 독립보전책이다.
한국은 정치적으로는 대내적으로 한국정부의 정치적 분열과 탐관오리 등 정치적 부패, 대외적으로는 러·일간 한반도에서의 종주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제적으로는 1901년 ‘신축 대흉년’으로 만성적인 식량기근이 심각한 상태로 악화, 민생고가 극심했다. 알렌은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인 어려운 한계상황으로부터의 탈출구는 바로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임을 판단하고 한국정부로 하여금 하와이 이민을 결행하게 했다. 

1902년부터 3년간 7천여명 하와이 이주
이리하여 1902년 12월 첫 이민선이 인천항을 출항한 이래 1905년 12월까지 총 7,394명의 한인 이민집단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국책사업으로 한국인의 해외 집단 이민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해외이주로서 이는 한국의 ‘해외 국력신장’의 효시가 되었다. 불과 3년 만에 7천여 명의 한국인 하와이 이민이 오늘날 2백만 미국 한인사회로 성장하는데 동인이 된 것이다.
따라서‘항일 기층세력집단’으로 성장했다는 점에서 알렌의 이민정책은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일본정부는 1908년 친일 외교관 통감부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미국에 파견했다. 스티븐스의 미국행의 첫째 사명은 문호개방정책과 일본인 이민문제로 악화된 미국 국민의 반일감정을 진정시키고 미일전쟁 발발을 미연에 방지하고자한 것이다.
둘째 사명은 일본의 보호정치의 정당성을 미국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 미주 한인사회의 배일(排日)감정을 진정시킨다는 것이다. 대동보국회 소속 장인환(張仁煥)은 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선창부두에서 2천만 한국 국민으로부터 매국노로 규탄 받고 있는 스티븐스를 사살하는 의거를 결행했다. 스티븐스를 사살한 후 장인환은 “나는 한국 국민의 이름으로 스티븐스를 쏘았다. 그는 보호조약을 강제로 맺게 함으로써 나의 강토를 빼앗았고, 나의 종족을 학살했기에 이를 통분히 여기어 그를 쏜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장인환의 스티븐스 사살의거는 항일 무장의거의 기폭제가 되었다. 1년 후 안중근의 이토(伊藤博文) 사살의거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알렌, 러일전쟁시 일본승리 장담
알렌은 현지 한국공사로서 만약 러일전쟁이 발발하면 일본이 전승을 거둘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이유는 러시아의 후진 경제와 형식적인 관료주의로는 도저히 일본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이 전승하면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에서의 경제적 이권을 열강이 나누어 가진다는 문호개방청책을 파기하고 일본은 한국과 만주를 점령하고 영·미 등 상인을 추방하고 경제적 이권을 독점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러시아는 문호개방정책을 준수할 것이기에 한국을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고, 미국의 이권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러시아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친러·반일정책을 강력히 주장한 것이다. 이는 한국 독립을 보전하고 미국의 경제적 이권을 수호할 수 있다는 ‘윈윈전략’이다. 그러나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이 전승을 거두더라도 문호개방정책을 지킬 것이며 한국인은 자치능력이 없는 민족이기에 어차피 주변강대국에 희생될 것이며, 그럴 경우 러시아보다는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 친일·반러정책을 고수했던 것이다.
알렌은 현지 공사로서 한미조약에서 미국은 ‘거중조정(good offices)’을 공약했으므로 미국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친러·반일정책을 구현하는 것이 한국독립보전책의 유일한 방책이므로 이를 구현하는 것이 자신에 부여된 고유권한이라고 확신하고, 대통령의 친일정책을 바로잡아 한국을 구원하고 미국의 이권을 화보한다는 결의로 1903년 6월 미국행을 단행했다. 1903년 9월 30일 루스벨트 대통령과 정책 토론이 이루어졌다. 알렌은 “러시아는 문호개방정책을 준수하고 만주 상업시장을 개방했기에 만주 무역거래의 75%는 미국이 차지할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만약 일본이 전승하면 일본은 문호개방정책을 폐기, 미국을 비롯한 외국인을 추방하고 만주의 이권을 독점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친러·반일정책을 채택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그것은 상업무역상 이권을 위해 기회주의적 정책”이라고 반박하면서 미·영은 우호국이고 영일동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본과도 동맹관계라고 강조하면서 친일·반러정책을 고수하겠다고 언명하고 있다. 일개 약소국 주재 공사로서 대통령의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토론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알렌은 대통령의 정책전환 사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루스벨트가 친일·반러정책을 고수한다면 미·일 관계는 위기국면으로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본은 문호개방정책을 폐기하면 미국 국민의 반일감정은 더욱 고조될 것이고, 이로 인해 일본은 반미정책을 강화, 미국에게 날로 더 큰 곤란을 가져다 줄 것이고, 종당에는 마침내 일본은 미국에 칼을 겨누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이 같은 경고는 적중했으니, 1941년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일본은 미·영을 상대로 전쟁을 도발했다.

루즈벨트, 한국포기정책 선언
일반적으로 한국에 와 있던 미국 외교관 선교사들은 한국을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친한·반일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그런데 한국정부는 주한 미국인의 말이 곧 미국정부의 공식적 대변인의 발언인양 오인하면서 계속 ‘거중조정’을 본국정부에 호소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한국포기정책을 선언하면서 미국은 1905년 7월 27일 태프트-가쓰라 비밀협정에서 일본의 필리핀 불침을  조건으로 한국에서의 일본의 ‘자유행동권’(free hand)을 인정했다. 이는 사실상 한반도에서의 일본지배권을 승인한 것이다.
러일전쟁이 장기화하면 일본에 절대 불리할 것이라는 것은 나폴레옹전쟁의 교훈이다. 일본은 루스벨트에 강화회담을 중재해 줄 것을 요청하자. 루스벨트는 일본이 문호개방정책을 준수하겠다는 확약을 받고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정치적·경제적·군사상의 우월권을 인정함으로써 사실상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보호국 수립을 승인했다. 루스벨트는 동양에 평화를 가져왔다는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는 한국의 운명을 일본에게 넘겨준 ‘정치적 희생’ 위에서 얻은 값비싼 노벨 평화상이 아닌가.
알렌은 본국 정부의 기본정책과는 관계없이 국무부 당국에게 미국의 한국문제에 개입, ‘불쌍한 한국’을 구제해 줄 것을 줄기차게 호소했다. 결국 이 같은 대한정책은 루스벨트의 친일정책과 완전히 상충·배치되는 정책이기에 좌절되었고, 결국 일본의 보호조약(을사조약, 1905. 11. 17) 체결에 장애요인이 된다 해서 알렌은 해임·소환되고 말았다.
알렌은 한국을 떠나면서 “한국정부는 낭비가 많고, 부패 잔인하며, 믿을 수 없는 허약한 정부이다. 그러나 한국 국민은 온순·선량하고, 인내심이 강하며, 매우 부지런한 국민이다. 그들은 자유와 평등 이념을 재빨리 수용하고 있다”고 논평하면서 한국정부는 믿을 수 없는 부패정부이지만 한국 국민은 성실하고 자유 평등사상을 수용할 능력이 있는 민족이라고 낙관하고 있다.
미국이 한미조약의 ‘거중조정’ 공약을 파기한 것은 분명 국제정치상 배신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제국주의적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대에는 국력의 뒷받침이 없는 국제조약이란 한낱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한국은 이 같은 미국의 배신행위를 규탄하기에 앞서 한국이 최소한도의 국력배양이 없었다는 사실에 한국인 스스로가 한국을 배신했다는 자성과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므로 약소국일수록 남이 도와주기를 바라기에 앞서서 한국이 살아남을 길은 한국 자신의 국력 배양뿐이라는 역사적 교훈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을사조약 늑결 전후기의 국권상실기에 한국독립운동 투사가 있다면, 내국인으로는 민영환, 외국인으로는 알렌을 들 수 있다. 특히 알렌은 한국주재 공사로서 청·러·일·미 등 열강을 상대로 외교적 교섭을 통하여 한국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그의 한국독립보전 정신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김원모 / 단국대·한미관계사


          
필자는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알렌의 일기> <근대한미교섭사> <개화기 한미교섭관계사> 등이 있다.

 

‘고종의 정치 고문’ 헐버트 목사의 시각

한 민족이 멸망해 가는 이면에는 많은 애련(哀憐)과 곡절이 따른다. 조선을 병합하려는 일본의 야욕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1905년 10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고종은 근신들을 모아 대책을 논의하지만, 경륜과 용기의 면에서 앞장서 주는 사람이 없었다. 망연자실하던 중에 그의 머리에는 평소 믿고 자문을 구하던 헐버트 목사가 떠오른다. 왕은 헐버트를 불러 밀지(密旨)를 내리면서 미국으로 건너가 루즈벨트(T. Roosevelt) 대통령과 정부 요인들에게 조선의 자주와 독립을 호소해 줄 것을 부탁한다.
헐버트는 즉시 워싱턴으로 출발하여 당대 최고의 논객이며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하던 케난(George Kennan)을 만나 조선의 자주와 독립을 호소하고 지인을 통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했지만 미국의 태도는 매정하리만큼 냉담했다. 당시 미국의 지도자들은 한국에 대한 악의적인 비방에 익숙해 있었고 국익 관계도 미미한 조선을 도움으로써 일본과의 밀월이 깨어지는 것을 원치 않음을 분명히 했다.
노력한 보람 없이 헐버트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의 운명은 일본의 속방으로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이제 헐버트는 글을 통해서 조선에 대한 온갖 그릇된 비방을 변호하고 조선의 독립을 세계의 여론에 호소해 보리라고 결심하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탈고하여 1906년에 출판하게 되었는데 그 책이 곧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1906)이다. 역사로 보면 서양의 구약 시대에 이미 개국했으며, 비록 중국처럼 장사에 능숙하지도 못하고 일본처럼 전쟁을 잘하지도 못하지만 선량하고 문화적 유산이 그 어느 나라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 동방의 이 아일랜드가 왜 역사로부터 사라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화두이다. 그는 자신의 눈에 비친 한국의 멸망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산업화의 장애가 많은 나라
우선 그는 한국인의 심성을 설명하면서 인정스럽고 친근감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정은 산업 사회로 가는 길목에서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다고 헐버트는 지적한다. 즉 이 인정이 결국은 금전적 낭비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때로는 허세일 수도 있고 낭비일 수도 있으며 노동의 신성함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양반이 생산성을 높이는 데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의 기생적 속성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용서하는 심정적 요소 때문이며 이러한 사조는 멀리 볼 때 결코 인정만으로 합리화될 수 없다고 그는 지적하고 있다.

지나친 유교중심주의의 폐해
헐버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또 다른 특징은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가족 또는 씨족 중심의 소집단 이기주의였다. 가족이 살갑게 사는 모습은 아름다울 수 있지만 한국에는 ‘집’은 있어도 ‘가정’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600~700년에 걸친 주자학적 가치관이 가정에서 여인의 존재를 매몰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 헐버트의 지적이다.
그는 또한 한국 사회가 지나치게 보수적인 것을 우려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문명의 이입이 오직 중국을 통해서만 일방통행적으로 들어왔기 때문인데, 그것이 중화사상으로 결정화(結晶化)되면서 창의성이 억압되었음을 개탄하고 있다. 이러한 소중화 사상이 가장 절실하게 나타난 것이 한자 중심의 문화였다. 과거(科擧)를 한자로 보아야 하고 비실용적 고전이 관리 등용의 첩경이 됨으로써 문명의 진보에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한글’이 지식인들로부터 외면당하고 하천한 계급이나 정규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여인들의 문자로 전락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민족성을 가진 한국이 왜 끝내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언제인가는 합병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빠지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러한 비극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일까? 그는 대한제국의 멸망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먼저 지적되어야 할 점은 지배 계급의 부패였다. 헐버트는 한국의 멸망이 일차적으로는 내재적 모순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관찰사가 5만 달러에 매관되고 현감이 5백 달러에 거래되는 현장을 바라보면서 이 나라의 장래는 결국 패망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민생을 괴롭히는 것은 이러한 매관의 연쇄 현상으로 나타나는 관리의 횡포였다. 이것은 결국 민심의 이반으로 연결된다는 것이 그의 전망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왕실과 그 주변의 지배 계급이 문명 진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명치유신 이후 미완성된 자본주의의 모순을 타개하기 위해 정한론으로 무장한 일본의 대륙론자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명치유신 이후 착검과 특권이 박탈된 사무라이들이 그들의 살길을 찾아 서구의 문물과 관료 제도를 받아들이고 있을 때 조선의 지배 계급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채 주자학적 중화사상에 안주하면서 세계의 대세를 읽지 못했다. 대원군의 쇄국이 당시로서 일말의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좀 더 유연하게 서세동점에 대처하면서 자신의 정책을 변용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물론 당시에 이러한 보수파에 대항한 개화파가 있었지만 그들은 일을 너무 조급하게 서둘렀다. 그들은 지금이 아니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조급함에 사로잡혀 있는 분별없는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의 진심이 아무리 순수한 것이었고 우국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김홍집과 어윤중이 저자 거리에서 돌멩이에 맞아 죽는 것을 바라보면서 헐버트는 그들이 난세에 살아남는 지혜를 갖추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본심과는 달리 그들이 친일적 성향을 보인 것은 그들의 경륜이 익지 못했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민중적 정서는 일차적으로 그들이 책임져야 할 문제라고 헐버트는 생각했다.

미국은 대한제국 멸망의 묵시적 방조자
그러나 이와 같은 모든 내재적 모순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외재적 요인 즉 미국의 무신(無信)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헐버트의 입장이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미국은 한국과 국교를 맺은 최초의 서방 국가이며 그 조약에서 미국은 한국의 안전과 이익을 존중하겠노라고 약속했다. 한국은 자신의 독립이 유린될 때에는 이를 막아 줄 수 있는 국가로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미국에게 구원을 요청할 권리를 갖는다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그러나 한국민에게 환난이 닥쳐오고 그토록 되풀이하던 공언이 순수한 것이었음을 입증했어야 할 무렵에 미국은 그토록 약삭빠르게, 그토록 차갑게, 그토록 심한 멸시의 눈초리로 한국민의 가슴을 할퀴어 놓았다. 기울어 가는 조국을 건질 길이 없게 되자 충성심이 강하고 지적이며 애국적인 한국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동안에 한국 주차 미국 공사 몰간(E. V. Morgan)은 일본공사관에서 이 흉행(兇行)의 장본인들에게 샴페인을 따르면서 축배를 들고 있었다. 이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망국의 낙조가 비치는 대한제국의 지도자와 국민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자신의 민족이 자신을 정복한 민족과 대등하게 될 때까지 자기 민족의 교육에 전념해야 하며 순수한 인간성을 무기로 하여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하여 느끼고 있는 멸시를 상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충고로 글을 끝맺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교육이 국가 흥망의 열쇠이며 민족의 자존을 회복하는 것이 지도자의 책무라는 것은 변함없는 교훈으로 남아 있다.

신복룡 / 건국대·정치학


필자는 건국대에서 ‘동학사상과 한국민족주의’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 <전봉준 평전> <이방인이 본 조선> 등이 있다.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을 역임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