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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기획시리즈]동학농민혁명 연구의 새로운 방향
[역사비평 기획시리즈]동학농민혁명 연구의 새로운 방향
  • 교수신문
  • 승인 2007.06.18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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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규 위원은 현재 동학농민혁명 연구가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하며 △미시사, 생활사 관점에서의 접근 △지역적 관점에서의 접근 △연구 외연 확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배항섭 교수는 최근의 민중운동사 연구가 실종되다시피 했다고 주장하며 “농민군의 의식이나 사상을 상부구조로 파악하고 하부구조에 존재하는 모순이 반영됐다고 이해하는 것은 민중이 가진 독자성을 분석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말한다. 

□ 1894년 발발한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시대를 구획짓는 역사적 사건으로 논의되고 있다.
미시사·생활사 등 실체적 사실에 대한 접근 필요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조선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표출한 사건이다. 농민들의 대대적인 봉기는 조선사회의 와해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질서를 재편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동학농민혁명은 한국 근대사의 새로운 출발로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동학농민혁명의 연구는 많은 성과를 얻었다. 특히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점으로 연구 성과물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기존의 인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바로 그러한 폭발적인 연구 성과에 의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주제를 정리해 보면, 동학농민혁명의 배경, 단계별 전개과정, 농민군의 활동과 지향, 동학교단과 농민군 지도자들의 활동,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의 관계, 남북접 문제, 농민군 등으로 대변된다. 이러한 연구성과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장시키고 더불어 인식의 깊이를 더하였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동학농민혁명 연구는 답보상태
그러나 그것이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완결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2007년 현재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는 답보상태에 머물러있다. 지금까지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관점은 근대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근대지향으로서 동학농민혁명, 근대극복으로서의 동학농민혁명에 주목하였던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가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새로운 연구방향을 설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답보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연구방향은 무엇일까? 필자는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접근, 다시 말해 미시사 생활사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동학농민군은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었으며 농민군으로 활동했던 기간 중 어떻게 시간을 보냈으며, 어떻게 여흥을 즐겼는지 살펴봄으로써 실체적인 모습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물론 이러한 관점에서 연구하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작업이기는 하지만 필요한 시점에 도달하였다고 생각된다. 
두 번째는 지역의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을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동학농민군과 이를 토벌하기 위해 구성된 민보군을 보면, 현재 관점에서는 동학농민군은 선이고 민보군은 악이라 할 수 있다. 과연 이러한 관점이 올바른지 다시 검토해봐야 할 것이다.
1894년이라는 시간, 조선이라는 공간의 조건 속에서 동학농민군의 입장과 민보군의 입장을 동시적 관점에서 견지할 때 실재적인 역사적 사실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1894년 전라도 금산(지금은 충청남도)에서는 동학농민군과 민보군이 치열하게 대립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지금도 금산 남산공원에 가면 동학농민군과 전투 중에 사망한 민보군을 위한 기념물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현재 금산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동학농민군과 관련된 사람들은 많지 않고 그 반대편에 있던 사람들이 주로 활동하고 있다. 지역의 관점에서 보면 동학농민혁명의 새로운 측면을 볼 수 있다.   
세 번째는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세계사적으로 동학농민혁명과 유사한 농민운동을 비교하여 연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동학농민혁명을 논할 때 언급되는 것은 독일농민전쟁이었다. 농민전쟁이라는 명칭은 독일농민전쟁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러나 과연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1524∼1526의 독일농민전쟁을 비교하는 것이 적절한지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독일농민전쟁과 동학농민혁명은 370년이라는 시간적 차이가 존재하는데 이러한 시간적 거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물론 역사발전과정에서 중세 봉건질서를 부정하고 봉건영주에 대항한 농민들의 항쟁과 수취체제의 모순 등을 비롯하여 조선정부의 수탈구조에 저항하여 일어난 조선의 농민들과 유사한 점이 없지는 않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370년의 간극을 넘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독일농민운동과 동학농민운동의 차이
또한 성격에 있어서 차이점이 간과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을 반봉건 근대화와 반외세 자주화라고 규정할 때, 독일농민전쟁에서 반외세 자주화적 측면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다. 또한 봉건제 하의 봉건영주와 조선시대의 국왕을 비롯한 지배층을 등치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 종교적 배경 역시 독일농민전쟁은 종교개혁 과정에서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배반당하였으나 동학농민혁명에서는 종교지도자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점 역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 볼 때, 물론 동학농민혁명과 독일농민전쟁을 비교하는 것이 의미 있는 작업이기는 하지만 독일농민전쟁을 동학농민혁명의 원형적 모델로서 설정하는 것은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동학농민혁명의 외연을 확장하기 위한 작업으로서 2002년 5월 (사)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동학농민혁명의 동아시아적 의미’라는 주제로 개최된 학술회의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동학농민혁명과 유사한 중국의 태평천국 농민혁명이나 일본의 자유민권운동 등과의 비교 연구가 심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점은 아쉽다.
따라서 앞으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비교 연구는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유사한 농민운동을 연구하고 검토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와 같은 지역으로 동유럽 발칸지역의 루마니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이 있으며, 라틴 아메리카 여러 국가 등도 여기에 해당된다.   
현재 동유럽의 발칸지역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는 루마니아는 역사과정속에서 주변 강대국들의 무수한 침략을 받아왔으며 때로 주변으로 확장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반외세 저항운동뿐만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농민운동이 전개되었다. 1764년 트란실바니아 농민반란, 1784년 호리아 크로슈카 주도의 농민반란, 1821년 왈라키아 농민반란, 1831년 7월 동북부 제무푸레의 농민반란, 1848년 부크레슈티의 대봉기 등이 그러한 예이다.
불가리아는 발칸반도 남동부에 위치해 있으며 중세시기에는 불가리아 대제국을 건설하기도 하였으나 1389년 코소보전투에서 오스만 터키에 패배하고 1393년 수도가 함락당한 뒤 1878년까지 약 500년간 오스만 터키 지배를 받았다. 오스만 터키 지배 하 1830년대부터 1860년대까지 빈번하게 농민반란이 발생하여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특히 1876년 4월 ‘코트리브시타사’와 ‘플로브디프’ 농민반란이 일어나 대학살이 자행되었는데 이때 희생자가 3만 명에 달하였다. 이러한 농민반란은 러시아와 터키간의 전쟁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발칸의 맹주를 자처하는 세르비아는 14세기 두샨왕 시기 발칸유럽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고 비잔틴 제국을 위협할 정도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거대 제국으로 성장하였으나 1389년 세르비아군이 오스만 터키군에 패함으로서 터키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1878년 3월 산 스테파노 조약과 6월 베를린 조약을 계기로 세르비아는 독립국가로 등장하게 되었다. 오스만 행정부의 와해 이후 봉건적 기사계급, 스파히는 자기들의 봉토를 점차 확대하기 시작하여 세르비아 농민들을 불법적으로 착취하였다. 또한 야니샤리 계급의 횡포와 착취는 이보다 더 심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1804년에서 1813년 사이에는 오스만제국에 저항하는 제1차 세르비아 농민반란이 발생하였다. 1815년의 제2차 세르비아 농민반란은 내부의 지배계층인 야니샤리 계급에 저항하여 일어났다.
한편 브라질,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등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대체로 1800년대 초반 스페인과 포루투칼로부터 독립하여 각각의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 과정에서 식민지 지배세력에 대한 저항 또는 지배계층에 대한 저항운동이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저항운동 역시 약간의 상황의 차이가 있지만 동학농민혁명과 비교해 볼 때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동학농민혁명 연구는 미시사·생활사의 관점에서 실재적인 사실을 재구성하는 연구가 필요하며, 각 지역의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이해하고자 하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이와 함께 세계사적으로 동학농민혁명과 유사한 농민운동을 비교연구하고 이를 통해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성을 확인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병규/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


필자는 원광대에서 ‘금산·진산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을 지냈고 <전북지방 고문서 연구현황과 과제> 등의 저·역서가 있다.

 

투쟁하는 민중사 보다 민중 실상 보여주는 연구를

동학농민전쟁(이하 농민전쟁)은 단일 한국사에서 일어난 사건 가운데 가장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있을 정도로 커다란 관심을 받아왔다. 이 사건이 <동학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 <동학농민혁명>, <동학혁명> 등 시기와 연구자에 따라 다양하게 명명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이해는 분분하다.
농민전쟁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경향은 이러한 다양한 명칭이나 문제의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의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농민전쟁이 근대사회를 지향하였고 외세의 침략에 반대한 민족운동이었다고 이해한다는 사실이다. 1960~70년대의 급격히 진행된 산업화에 따른 사회적 모순의 증대라는 현실에 터하여 사회변혁운동이 고양되었고 이런 맥락에서 민중운동사 연구도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농민전쟁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졌으며, 농민전쟁 발발 100주년을 맞은 1994년을 전후하여서는 어느 분야보다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고 많은 연구 성과도 제출되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민중운동사 연구가 사실상 실종되다시피 하였다. 연구자들이 외면하는 듯 한 분위기이다. 한국사연구에서 이처럼 극적인 반전을 이룬 사례도 드물 것이다. 
농민전쟁을 비롯한 민중운동사 연구에서 보이는 이러한 반전은 무엇보다 내부적으로는 민주화가 일정하게 성취되었다는 점, 외부적으로는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변혁에 대한 전망을 흐려졌다는 점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동안 이루어진 민중운동사 연구 내부에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근대주의적 계급환원론적 이해의 극복
무엇보다 농민전쟁을 근대민족운동의 틀 안에서 이해해 왔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근대사는 당연히 “국권의 수호와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파악되었다.
농민전쟁에 대해서도 근대사회를 지향한 ‘민족운동’의 일환이었다는 점을 자명한 전제로 받아들이는 연구가 대세를 이루어왔다. 북한학계의 경우 농민전쟁을 개화파들이 주도한 부르주아민족운동의 보조 역량으로 규정하고 있다. 남한학계의 경우 토지개혁론 등에서 개화파와 다른 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농민전쟁이 근대를 지향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적인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개화파들보다 더 근대민족주의의 확립을 실천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근대사의 과제를 반봉건 반외세로 설정한 위에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투쟁하는 주체로 민중을 파악할 경우 그들이 처해 있던 일상생활이나 거기서 경험하는 질곡의 구체상, 민중의식의 내면세계, 그것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 등에 대한 관심은 외면될 수밖에 없다.
이러다보니 근대 민족주의라는 틀 속에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판단되는 다양한 민중상은 외면되거나 근대 민족주의의 틀 안으로 구겨 넣어져서 묘사되었다. 또한 근대 지향을 자명한 전제로 깔고 있기 때문에 근대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민중들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질문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수많은 농민군들이 목숨을 던져가며 추구하였다는 서구적 근대는 현재 더욱 강대해진 폭력성과 지칠 줄 모르는 욕망으로 무장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그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근대성의 폭력과 탐욕을 넘어서는 새로운 문명사적 비전에 대한 상상력”이라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이와 같이 근대에 대한 성찰과 비판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있지만, 민중운동의 이해는 근대의 틀 속에 갇혀 있었다는 점, 바로 여기에 민중운동사에 대한 연구가 실종된 비밀 가운데 하나가 숨어있다고 생각된다. 민중을 근대적 변혁주체가 아니라 이러한 독자성을 가진 존재로 파악하는 것은 근대에 대한 성찰과 객관화의 근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민중을 독자성 가진 존재로 파악’ 중요한 의미
그러나 근대이행기의 민중운동이 근대를 지향했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민중운동이 전근대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고 붕괴를 촉진함으로써 그 사회의 근대를 진전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또 투쟁과 갈등 속에서 새로운 의식이나 문화를 형성하여 스스로 근대적 시민이나 국민으로 자기 변용의 길을 모색해나가기는 했지만, 민중운동 그 자체가 근대사회를 지향한 것은 아니었다. 르페브르에 따르면 프랑스혁명 당시의 농민운동은 반봉건 반자본주의의 지향성을 가진 평등주의적인 운동으로 결코 자본주의를 촉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프랑스 혁명 속에서 좌절되었다고 했지만, 단순히 부르주아에 의해 동원된 것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에 개입함으로써 혁명의 진행이나 성격에 영향을 미친 독자적 측면을 가진 사회운동이었다고 하였다. 이점에서 민중은 국가권력이나 지배층에 온전히 포섭될 수 없는, 전근대적 혹은 근대적 가치관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또 거기에 쉽사리 포섭되지 않는 자율성과 독자성을 가진 존재였다. 
지금까지의 연구가 가진 또 하나의 문제는 계급환원론 혹은 경제구조환론적인 시각이다. 농민군의 모습은 사회적 모순을 첨예하기 인식하고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일어선 변혁운동의 주체였다. 이는 사회구성체론이 입각한 것으로 농민군의 의식이나 사상을 상부구조로 파악하고, 그것은 하부구조에 존재하는 모순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가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주로 경제구조의 분석에 입각하여 변혁주체를 설정하는 방식은 민중운동의 객관적 조건과 주체(운동)를 구체적으로 연결하여 파악하는 논리와 방법론에 대한 고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민중이 가진 독자성과 운동에 내재한 고유한 리듬을 분석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
민중은 경제뿐만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그물망 속에서 생활하며 고유한 심성을 획득해 나간 독자성을 가진 존재였다. ‘생활전문가’로서의 민중은 일상생활 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겪으며, 스스로를 변화시켜가며 독자적인 규범과 의식세계를 만들어갔다. 민중이 고통을 감수하면서, 때로는 목숨까지 내걸고 운동이나 저항에 나서는 것은 거기에 토대를 둔 것이다.
농민전쟁 연구가 전봉준이라는 ‘영웅’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도 민중의 일상생활이나 그 속에서 형성되어 가는 의식세계에 대한 관심의 외면과 관련이 있다. 근대 민족주의라는 틀로 바라볼 때 전봉준이라는 존재는 농민군 가운데 최고수준의 생각과 행동을 보여주었다. 전봉준은 농민군들을 대변하고자 했다. 그들의 삶의 질곡을 타파하고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의 생각이 곧 농민군대중 모두의 생각일 수는 없다. 집강소 시기에도 전봉준과 농민군 대중 사이에는 갈등이 초래되었다. 전봉준은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농민군들을 “무뢰배”라고 지칭하였다.
이를 보더라도 지도부와 농민군 대중을 묶어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어떤 점에서 ‘민족적’ 위기를 외면하고 ‘계급적’ 모순에 입각하여 사적인 분풀이를 한 농민군 대중들의 의식세계야말로 보다 더 민중적일 수도 있다. 농민전쟁을 유교적 질서를 지키기 위한 보수적 의거였다는 견해도 ‘영웅주의적’이해라는 혐의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근대이행기 민주운동은 근대를 객관화하는 데도 중요한 ‘비빌 언덕’이나, 이를 위해서는 농민군의 꿈과 희망을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 반봉건 근대, 반외세 민족주의를 지향한 농민군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아니었다.
세계사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도 아니다. 세계사적 경험과 달리 근대를 지향했다면 그 자체만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그에 대한 적극적인 해명이라는 또 다른 과제가 제기된다.
그러나 ‘평균분작’으로 표현된 농민군들의 토지개혁 구상도 근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근대 민족주의의 틀로 농민군을 이해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근대 지향의 역사의식 속에 그들의 생각을 부당하게 가두는 것 일 수 있다.    
근대민족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하는 민중사, 혹은 경제구조의 분석에 입각하여 사회적 모순을 증명하는 민중운동사가 아니라, 당시 민중들이 처해 있던 삶의 실상과 그 속에서 독자적인 규범이나 의식세계를 형성하고 독자적인 미래를 열어가던 민중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해명하는 연구가 진전되기를 기대해 본다.

배항섭 / 성균관대·한국근대사


 

필자는 고려대에서 ‘동학농민전쟁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민중운동과 동학농민전쟁의 발발> <한국근대사회와 문화 1: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를 중심으로>등의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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