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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대중으로 남을까, 무리가 될까
고독한 대중으로 남을까, 무리가 될까
  • 김동규 명지대 정치학
  • 승인 2007.06.11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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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_<전체주의의 기원 1, 2> 한나 아렌트 지음 | 이진우·박미애 옮김 | 한길사 | 2006

‘너무 잘 짜인 줄거리의 소설이나 영화에 사람들이 열광한다면 일단 긴장하라. 부조리하고 복잡한 세상을 일관된 논리로 설명해치운 이론에 지식인들이 열광한다면 또한 경계하라.’ 한나 아렌트가 소설 <다빈치 코드>를 읽었다면 이렇게 반응했을 것이다. 몇 해 전 세계의 독서대중을 사로잡았던 <다빈치 코드>는 보수 기독교 교리를 지키려는 ‘오푸스데이’ 비밀집단과 보수적 교리를 뒤집으려는 ‘프리메이슨’ 집단 사이의 암투를 소설화한 작품이다. 우리가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서양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이 이 두 집단 사이의 암투의 결과였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되는데, 소설의 줄거리는 그 치밀함이 수학적이기까지 하다.

키워드는 ‘원자화되어 고독한 군중’
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에 망명한 여성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독일사회가 나치즘의 광기로 빠져들 무렵 <다빈치 코드>류의 음모론이 대중을 사로잡았었다고 밝힌다. <다빈치 코드>의 주요 요소인 보수 가톨릭 조직의 국제음모, 프리메이슨의 국제음모 이야기는 이미 널리 퍼져있었고, 이보다 유

대인들의 세계지배 음모론이 더욱 힘을 얻고 있었다. 로스차일드 가문과 같은 유대계 국제금융자본에 대한 각국 국민들이 가지는 반감에 이들 국제자본이 국가들 사이에 전쟁을 부추겼다는 전쟁음모론까지 덧붙여지면 꽤나 호소력 강한 ‘유대인 세계지배 음모론’이 된다. 결국 이러한 유대인 음모론은 히틀러와 같은 나치 선동가들에 의해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전대미문의 ‘인종청소’로 이어지게 되었는데, 독일 대중들이 진심으로 이러한 유대인 음모론을 믿고 따랐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 독일로부터 탈출하여 미국에서 오랫동안 무국적자로 지내면서 그의 대작 <전체주의의 기원>을 완성하였는데, 1951년의 일이다. 그리고 7년 후 후속작인 <인간의 조건>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전체주의의 기원>의 ‘철학적 인간론’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조건>의 이해를 위해서는 그 역사적 배경을 상세하게 기술한 <전체주의의 기원>을 읽어야 할 것이며, 반대로 <전체주의의 기원>을 읽고 난 후에도 철학적 갈증이 남아있다면 <인간의 조건>을 읽어야 할 것이다.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키워드를 찾는다면 그것은 ‘원자화되어 고독한 대중’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중의 특징은 무엇인가? 한나 아렌트는 인간 활동을 행동(action), 일(작업 또는 제작, work), 노동(labor) 세 가지로 나누는데, 고독한 대중은 무엇보다 노동하는 존재라는 특징을 갖는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행동이란 인간의 정치적 활동으로서 이웃, 동료, 친구들과 의사소통하는 것이 그 요체다. 우리는 이러한 소통을 통해 감각기관을 통해 얻은 감각자료들을 타인들 것과 크로스체크 한다. 즉, 우리는 소통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물을 여러 각도로 비춰볼 수 있는 ‘감각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는데, 우리가 허위와 환상의 덫에 쉽사리 빠지지 않는 것은 이 ‘감각 네트워크’ 덕이다. 아렌트는 이 ‘감각 네트워크’를 ‘커먼 센스’(common sense)라 부른다.

인간활동, 행동·일·노동으로 분류
한편, 우리는 일(제작)을 하는 경우 동료인간들과의 소통을 떠나 ‘골방’을 찾는다. 창의적인 일은 ‘골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작)하는 사람은 인간세계와 소통은 단절되었더라도 사물세계와의 교섭은 여전히 이루어진다. 생물을 탐구하고 기계를 발명하는 사람은 언제나 사물세계와 교섭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인간세계의 소통, 사물과의 교섭에서 배제되면서 오직 컨베이어벨트의 리듬에 맡긴 자신의 근육과 그 힘의 소진만을 의식할 뿐이다. 이것은 노동하는 존재로 하여금 깊은 內省的 고독에 빠지게 하는데, 이로써 노동하는 존재는 인간의 세계와 사물의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온 ‘뿌리 없는’ 존재가 되어, 그가 감각기관을 통해 얻는 수많은 감각자료들은 동료 인간들과의 크로스체크를 거치지 못한 채 明滅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믿을 수도 없고 깨지기도 쉬운 자신만의 감각자료에 갇혀 지내게 됨으로써 객관적 세계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게 되어, 모든 것을 부정하는 허무주의나 감각자료 뒤에 숨어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이 존재한다는 음모론에 쉽게 빠져든다. 또한, 바깥 세상에 대한 신뢰가 낮아질수록 자신 안에 존재하는 ‘논리’의 세계에 대한 믿음이 강해져, 그는 논리와 일관성을 진리의 유일한 잣대로 신뢰한다. 일관되고 논리적인 거짓에 쉽게 마음을 준 그의 幻滅은 크나큰 파국을 겪은 후에야 올 것이며, 그 때는 후회하기에도 너무 늦게 된다. 히틀러의 선동을 좇아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수백만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국민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 다빈치코드’ 떠올라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수많은 ‘노동하는 존재’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들은 이른바 ‘계급 없는 사회’의 등장과 함께 계급조차도 없는 ‘고독한 대중’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20세기 초 독일과 기타 유럽지역의 이들 고독한 대중은 자신에게 ‘아리안 인종’이라는 (비록 알량한 것이지만) 최소한의 소속감과 자부심을 부여한 나치운동, 그리고 그들이 선전하는 일관성으로 무장된 인종주의 논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되었다. 심지어 이들은 지도자가 (정치) ‘운동’의 목적에 필요하다고 요구한다면 ‘반역자’ 역할도 기꺼이 수행했다. 고독한 대중은 오명을 받으며 처형되는 것보다 자신에게 존재감을 준 ‘운동’의 물줄기에서 퇴출되는 것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결국 고독한 대중은 양치기를 따르는 양떼와 같은 인간 ‘무리’가 되어버렸다.      
인간세계와의 소통, 사물세계와의 교섭을 상실한 채 오직 ‘노동’의 리듬에만 몸을 맡긴 존재가 어떻게 인간의 문명 그리고 이 문명을 떠받치고 있는 정치세계를 위협할 수 있는지에 대한 아렌트의 설명을 듣는 동안, 독자들의 머리에는 어떤 장면들이 떠오를까? ‘황우석 신화’의 열광? 아님 시청광장을 가득 메운 월드컵의 열광? 독자들은 <전체주의의 기원>을 읽으면서 우리 주변에 흩어져 있는 전체주의의 퍼즐조각들을 찾아보게 될 것이며, 이내 긴장하게 될 것이다. 나는 <다빈치 코드>를 떠올렸다.  

김동규 /명지대 강사·정치학


 

필자는 美  럿거스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1995년 외무고시 합격 후 외교통상부에서 근무하면서 남북관계, 6자회담 등을 담당했다. 역서로 <공화주의> <서양정치철학사> (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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