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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절규와 장터
[문화비평]절규와 장터
  • 김현식 /한양대·사학
  • 승인 2007.05.21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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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1월 22일자의 글. “두 친구와 산책 중이었다. 해질 무렵,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붉어졌다. 탈진감이 엄습해, 난간에 기대어 섰다. 푸르고 검으며, 초록이고 자주며 노란, 토사물 색깔의 피오르드와 도시위로 피와 불의 혀가 날름거렸다. 친구들은 걸어 나갔으나, 나는 공포에 떨며 서있었다. 난 자연을 꿰뚫는 무한한 절규를 감지하였다.” <절규>의 탄생에 대한 뭉크 자신의 유명한 변(辯)이다. 그러나 이 글이 없더라도, <절규>는 그리 오독(誤讀)될 것 같지는 않다. 분명하기 때문이다. 모든 색채와 형상은 오직 하나, 중심의 ‘절규’로 집중된다. <절규>에는 정녕 낭비가 없다. 검정과 빨강, 보라와 노랑, 그리고 곡선과 직선이 서로를 관통해 오직 하나, ‘절규’를 토해놓는다. 하지만 누가 들을까. 누가 그 무한의 절규에 응답할까.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 글 쓰던 중이라, 무심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하기도 전에, 쏜살같이 퍼부어지는 말. “아무런 부담 없이 친구가 돼줄 수 있는 분, 연락주세요.”그리곤 뚜-뚜-뚜. 녹음은 아니었다. 앳된 목소리가, 나름의 분위기를 풍기며 실제로 전화한 것이었다. 번호를 보았다. 060-603-XXXX. 풋~ 웃음이 돌았다. 가끔 이메일로, 문자로 와 닿던 ‘그녀.’ “오빠. 왜 연락 안 해?”, “오빠. 나 잊었어?”등등. 가끔은 오빠(나?) 때문에 “온 몸이 뜨거워”진다던 060의 ‘그녀’가 이번에는 확실히 업그레이드된 것이다. 살아있는 목소리로, 세련된 매너로. 전화해 보고 싶었으나(순수한 실험정신으로!), 그만두었다. 내 전화번호 찍혀, 두고두고 ‘그녀’에게 시달릴까봐. 하지만 여전히 궁금했다. 누군가 정말 ‘그녀’에게 전화할까. 전화하면, 정말 ‘그녀’와 부담 없는 친구가 될까. 막상 전화하면 ‘그녀’는 옷 벗고 싶다는 둥, 온 몸이 뜨겁다는 둥, 애욕의 도가니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외로움’이 장사의 실마리라는 사실이다. 서글픈 현실. 친구, 대화, 공유, 공감, 소통. 이런 것들이 판매될 정도로, 우린 고립되어 홀로 있는 것이다.
 누구나 한두 번은 겪었을 게다. 출근길의 고통을. 지하철과 버스가 아무리 넓고 아무리 자주 온다 해도, 출근 녘의 대중교통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의 찜통이다. 다들 어디서 나왔는지, 무한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구석구석의 틈새에까지 칸칸이 채워진다. 이 때 부동(不動)은 기본이다. 움직임이 허락되는 정당한 경우, 예컨대 내린다든가, 올라타는 인파에 밀린다든가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손 하나 까딱이지 않는 게 상책이다. 잘못하면, “불쾌감을 주는 행위”의 유포자로 오인·처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청결한 이들과 뒤엉키면 그래도 다행이지만, 체취 가득한 이들과 마주하면 정말 제9지옥이다. 코 밑에서 얼씬대는 삼사일 묵은 머리 향내를 상상해보라. 분주한 저자거리, 널리고 널린 사람들. 우린 얼마나 많은 사람과 만나고 밀착되며 헤어지는가. 하지만 그들 중 누가 알까. 내 맘속의 넘쳐나는 환희를. 혹 내 맘속의 끊어지는 절규를.
 성경 한 구절.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얼마나 옳은가. 우리의 삶이란 교감 제로(zero)의 분주한 장터가 아닌가. 각기 따로의 소란한 시장이 아닌가. 뭉크의 <절규>는 그렇기에 아프다. 그렇기에 섬뜩하다. 소통 부재의 현실을 화폭가득 토해놓기에. 몸 휘도록 불안해서, 두려워서 <절규>의 주인공은 절규한다. 그것은 핏빛, 보랏빛 음파가 되고, 하늘과 바다를 움직여 출렁케 한다. 문제는 사람이다. 주인공의“무한한 절규”가 자연을 꿰뚫어 솟구치는데도, 동료 인간들은 관심이 없다. 자신들만의 삶에 분주할 뿐이며, 소리 지르는 자의 곁을 그저 지나칠 따름이다. 그렇기에 뭉크의 그림에서 인간은, 곡선의 자연과 달리 경직(硬直)의 꼿꼿한 직선이다. 절규하는 자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실점 뒤로 소멸되는 먼 거리의 사람들이다. 한 마디로, 다른 시간, 다른 공간의 다른 생명체이다.

김현식 /한양대·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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