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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統攝이라는 밈(Meme)
[대학정론]統攝이라는 밈(Meme)
  • 최재천 / 논설위원·이화여대
  • 승인 2007.05.21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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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책을 내본 이라면 대개 경험해본 일일 것이다. 우리나라 출판사들이 저자들에게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게 있다. 책의 제목을 짓는 일이다. 나 역시 그 동안 수십 권의 저서와 역서 들을 냈건만 책 제목을 내 뜻대로 뽑아본 적은 단 한번밖에 없었다. 그 단 한 번의 예외로 나온 책이 바로 <통섭·지식의 대통합>이다. 책의 제목을 기어코 내가 새롭게 만들어낸 ‘통섭’이라고 짓겠다고 우기는 내게 출판사 양반들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그렇지 않아도 안 팔릴 책이거든요. 그런데 거기다가 들어도 무슨 말인지도 모를 제목을 붙이면 저희는 어쩌란 말씀인가요?” 그래도 나는 우겼다. 몇 권만 팔면 손해는 보지 않느냐며 그만큼을 내가 살 테니 내 뜻대로 해달라고 우겼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그들에게 나는 한술 더 떠 “그런데 난 꼭 될 것 같은 느낌이 온다”며 끝까지 우겼다. 권 당 2만5천원이나 하는 책이 벌써 2만부가 팔렸다. 그만하면 손해는 보지 않은 걸게다.
하지만 내게는 책이 팔린 것보다 더 가슴 뿌듯한 일이 있다. ‘통섭(統攝)’은 원래 하버드 대학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원저의 제목 ‘Consilience’를 번역하며 고안해낸 용어다. 그런데 이 용어가 마치 발이 달린 듯 마구 퍼져나가는 것이었다.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가 유전자(gene)에 대응하는 이른바 문화유전자의 개념 용어로 제안한 ‘모방자(meme)’처럼 우리 사회 곳곳으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몇 달 전 어느 일간지에는 가야금의 명인 황병기 선생님이 첼리스트 장한나에게 덕담을 하는 대담 기사가 실렸다. 거기서 우리 옛말이라며 황병기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말씀이다. “우물을 깊게 파려면 넓게 파라!” 바야흐로 분과학문의 시대는 가고 여럿이 함께 넓게 파기 시작해야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려는 노력은 이미 활발하게 시작되었다. 이화여대는 이배용 총장의 취임과 함께 이화학술원을 만들어 학문의 융합을 선도하고 있다. 현승일 전 국민대 총장은 통섭정경연구원을 설립하고 활발한 토론 활동을 벌이고 있다. 얼마 전에는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내 등 뒤로 두 양반이 우리 사회의 온갖 주제들에 대해 열렬한 토론을 벌이는 것이었다. 무심코 그들의 대화에 귀동냥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중 한

양반이 “그래서 통섭을 해야 한다니까”라는 게 아닌가. 이제 통섭은 일반인도 사용하는 용어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 같다. 학문의 경계가 무너지며 또 한 번 문화의 르네상스가 도래하길 기대해본다. 그런 질풍노도가 이 땅에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흥분은 나만 혼자 느끼는 건 아닌 것 같다.

최재천 / 논설위원·이화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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