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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지식인 소수자의 風景 앞에서
[문화비평]지식인 소수자의 風景 앞에서
  • 최재목[영남대·철학]
  • 승인 2007.04.3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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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영남대·철학]
요즘 서점가엔 조선시대 지식인 ‘소수자’의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과거’를 현재의 살아있는 문맥 속으로 채 찍질해 온 것은 다름 아닌 인문학자들의 ‘글쓰기’와 ‘자료 편집술’ 덕분이다. 누구나 가질 만한 소수자들의 트라우마가 스토리텔러에 의해 긍정과 희망의 이야기로 반전되는 곳에 대중의 감성이 안식한다.
과거 지식인 소수자 이야기의 등판에 달라붙어 시대를 가로질러 온 것은 영웅의 傳記가 아닌 바로 ‘작은 이야기’이다. 우리 곁에 늘 있어왔던 배고프고 가슴쓰린 서글픈 삶들, 산전수전 다 겪고 단맛쓴맛 다 본 삶의 상처에 대한 風景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트라우마를 소수자의 이야기에 투영하며 위로받고, 자신의 영혼을 치유할 노하우를 키운다.
사람들은 요즘 이런 작으면서도 크고, 외로우면서도 즐겁고, 낮으면서도 높은, 스스로의 내면을 後見하는 ‘멘토’가 될 이야기에 목말라 하고 있다.
그런데 솔직히 조선시대의 지식인 소수자는 유교적 소양을 갖춘 漢文의 먹물이 든 사람들이다. 양반과 서울을 그리워하며 身言書判을 갈고 닦던, 유교사회의 권력 헤게모니 다툼에서 밀려나거나 상처 입은 자들이다. 그들의 見聞之知는 꼭 중국의 유명 지식 브랜드에 憑依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팍스 시니카(Pax Sinica)에 오리엔테이션된 흔적을 지울 수 없다. 공자를 모르고 맹자를 모르는 맹꽁이거나, 이름 없이 살다 떠난 무식쟁이의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이름 없는 자들의 이름은 역사의 평면 위에는 없다. 지식 소수자의 有識 뒤에 가려진 一字無識 소수자는 ‘흔적’이 없다. 뒷골목의 주막, 민간의 건축, 서민의 도자기, 대장경의 板刻 틈틈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 아니면 소외와 불온, 전위와 저항과 같은 그로테스크한 삶의 풍경 속에 그들은 그냥 그늘로 침묵해 있다. 그래서 삐딱하거나 엇갈리고, 엉뚱하거나 헷갈리는 곳에서 그들은 입체적으로 발굴되어야 한다. 유식자들의 욕망과 번식, 그 경계 너머로 떠밀려, 文字와 글쓰기의 외곽에서 그들은 그냥 어두워져버렸다. 이런 知識生態의 단면을 잘라내어 섬밀하게 들여다보는 知의 技法, 그런 메스를 쥔 눈 뜬 인문학자들의 고군분투로 무식 소수자는 적극 조명되어야 마땅하다.
어쩌면 우리가 우선적으로 짚어볼 것은, 소수자를 다수자와 대립시켜온 경직된 이분법적 도식일 것이다. 예컨대 동성애, 홈리스, 정신병원 수용자, 문맹자, 문제아, 약물중독자, 학업중단 청소년 등등만 소수자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수자인가. 그 구분방식이 과연 옳기나 한가. 나아가서 전자는 ‘소수/비정상/무능(不才)/약자/부정적/악’이고, 후자는 ‘다수/정상/능력(才)/강자/긍정적/선’일 수 있는가. 누군가 이러한 양자의 ‘차이’를 구분해내고 이것을 끝내 ‘차별’로 둔갑시켜 사회에 유통시킨다. 이러한 ‘차이의 구분’→‘차별’이라는 못된 관습을 교정하는 인문학에 더욱 힘이 실려야 한다. 우리는 鰥寡孤獨·生老病死·憂患을 道伴 삼아 살아가고 있다. 흔히 말하는 소수자는 ‘어느 인간’만이 아닌 ‘인간 누구나’의 본원적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 삶에서 절대적 소수자도 또한 다수자도 없다.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리는 ‘聖德大王神鐘’의 銘에서는 ‘대저 지극한 도는 형상의 바깥까지 포함하고 있으나 그것을 보려 해도 그 근원을 볼 수가 없고, 커다란 소리는 천지 사이에 진동하나 그것을 들으려 해도 그 울림을 들을 수가 없다(夫至道包含於形象之外, 視之不能見其原, 大音震動於天地之間, 聽之不能聞其響)’고 했다. ‘一乘의 圓音’ 즉 누구나 똑같이 들을 수 있는 둥글둥글한 소리에 대한 말이다. 인간을 ‘소유와 능력’이라는 형상에서 평가해가면 그 흔적에 밀려난 것은 모두 소수자가 된다. 그러나 ‘존재 그 자체’로서 그대로 놔두고 바라본다면 인간은 누구나 等質의 의미를 갖는다. 저 ‘一乘의 圓音’은 그때에 비로소 들릴 것이다. 莊子가 끊임없이 말해대는 不才, 無能, 無識, 弱者의 무한한 ‘쓸모 있음’은 바로 인간 자신의 그늘에 대한 뒤집어보기이다. ‘작은 고기새끼’를 ‘大鵬’으로 변환시키는 視線이다.
생각해보면 삶이란 얼마나 서글프고 옹졸한 일인가. ‘너에게 나란 그저 외로움일 뿐…’. 꽃이 지는 봄날 우연히 들은 그룹 클릭비의 ‘소요유’란 노래의 한 구절이다. 우리들의 영혼은 누군가, 무언가로부터 늘 상처받고 있다.
하지만 별로 위로받을 데가 없다. 최근의 조선시대 지식인 소수자 이야기가 우리 삶의 저변에 대한 시야를 넓혀 가는 실마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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