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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지치와 시뮬라크르
이 무지치와 시뮬라크르
  • 김현식/ 한양대 사학
  • 승인 2007.04.28 14: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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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벌써 1년 전이다. 작년 4월 말의 공연이었으니까. 그래도 기억은 생생하다. 시작 전 벚나무아래의 밤(夜). 담배 한 모금, 아내와의 커피 한잔은 얼마나 향긋했던가.

저기 오색 빛 은은한 분수, 머물러 속삭이는 연인들, 빛 속을 헤집는 아이들. 그 밤, ‘예술의 전당’에선 소란조차 풍경이었고, 풍경 끝에 걸린 서울, 그조차 아름다웠다. 약속이 있었기에. 이 무지치(I Musici), 비발디의 ‘사계’를 들고 온 그들과의 설레는 만남이 있었기에. 대학 첫 미팅처럼, 그러나, 끝은 허탈했다.

‘2%’이상의 부족감. 확실히 허전했고, 분명히 씁쓸했다. 그들의 연주는 결코 서툴지 않았다. 이른바 ‘봄’의 알레그로 악장부터 ‘겨울’의 또 다른 알레그로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연주는 찬란했고 거침이 없었다.
絃은 정녕 우리 이탈리아의 것이라는 자부심이, 공연 내내 콘서트홀을 휘감았다. 이 무지치의 ‘사계’. 해석과 기교에 어찌 모자람이 있으랴. 문제는 우리였다. 검은 아날로그의 LP시절부터 은빛 디지털 CD의 오늘에까지, 이 무지치의 ‘사계’를 수없이 반복했던 우리. 우리의 나른한 갈증을 채우기엔, 그들은 너무 가냘팠다.  
풀어진 기대감의 증표는 잔기침이었다. 나지막하고 간헐적이었으나, 연주 내내 이어진 잔기침. 낯선 경험이었다. 공연관람이란 사실 인고(忍苦)의 시간이다. 선율이 이어질 때, 행여 연주나 감상에 방해될까봐, 숨죽여
긴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악장과 악장 사이의 짧은 틈새는 언제나 소란스럽다. 그동안 참았던 기침이 한꺼번에 쏟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무지치의 ‘사계’연주 때는 색달랐다. 이전, 예컨대 로카텔리의 ‘바이올린의 예술’이 연주될 때까지도 관객은 조용했다. 하지만 ‘사계’에 이르러 달라졌다. 악장 사이의 빈틈은 물론 연주 중에도 연신 기침을 토해냈다. 느슨해진 관객. 청중은 소멸되는 음 하나하나에 집중하여 곡 전체의 흐름을 기억하기는커녕, 음악을 그저 무심코 흘려보냈던 것이다.

왜였을까. 왜 관객은 주요리를 맛보는 순간에, 그 달콤한 미각을 놓아버린 것일까.
간단한 이유. 우리는 이미 이 무지치의 ‘사계’를 너무 많이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전성기의 이 무지치, 예컨대 펠릭스 아요가 협연한 제 1대 이 무지치의 찬연한 합주로 말이다. 그래서였다. 눈앞에 차려진 이 무지치의 ‘사계’. 막상 먹어보니, 별거 아니었던 것이다. 얼마나 기묘한가. 두말할 나위 없이, 최상의 연주는 라이브다. 실연주야말로 원본이고 실체이며, 진정성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꾸로였다. 이 무지치의 실황에 기대어 자신이 들었던 ‘사계’를 가늠하는 대신에, 우리는 시나브로 자신이 들었던 ‘사계’로 이 무지치의 실황을 평가했던 것이다. 그날의 실제연주는 사실 CD에 담긴 연주보다 못했다. 합주의 양과 질이 그랬고, 소리의 결이나 울림도 그러했으며, 곡 중간 중간의 상큼해야 할 하프시코드 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원인은 물론 분명하다. (예컨대) 난 집에서 나름대로 값비싼 앰프·스피커에 물려 이 무지치를 들었고(충분한 볼륨으로!), 공연장에선 2층 뒷좌석(그것도 오른쪽으로 치우친)에서 그들의 연주를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무지치의 멤버도 예전의 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대란 바로 이러한 것이다. 눈앞의 생음악이 기준이 아니라, CD에 녹음된 음악이 평가의 기준이 되는 시대. 실제의 이 무지치가 이 무지치가 아니며, 녹음된 이 무지치가 실제의 이 무지치가 되는 시대가 바로 오늘인 것이다. 그렇다면 CD에 녹음된 이 무지치의 ‘사계’는 진짜일까 거짓일까.

내 오디오 시스템을 통해 재생된 이 무지치의 ‘사계’는 과연 실제일까 아니면 허상일까. 그것은 원본이 아니며 그렇다고 복사본도 아닌 그 무엇이다. 실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미지도 아닌 그 무엇이다. 이 무지치의 연주이면서 동시에 이 무지치의 연주가 아니기에. 결국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는 어느덧 새로운 ‘실체’가 되어, 음악회의, 영화관의, 학교 강의실의 당신과 나 사이에 내려앉은 것이다. / 김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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