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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모습을 한 '자비심 넘치는 부처' 형상화
인간의 모습을 한 '자비심 넘치는 부처' 형상화
  • 정은우 / 동아대·미술사
  • 승인 2007.04.09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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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_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37)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소조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든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꾸준히 만들어 졌지만 내구성이 약해 대부분 소형 소조불상들만 남아 있는 편이다. 한국 최고의 소조불상으로 이 분야의 전문가들은 ‘사천왕사지 채유소조사천왕상’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을 으뜸으로 추천했다. 이번 호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소조불의 아름다움을 느끼기에 논란이 여지가 적은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살펴봤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은 현존하는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온몸에 금빛이 찬연하고, 정교한 조각 솜씨를 자랑하는 걸작이다. 부석사 무량수전내 소조여래좌상이 갖는 美적인 특징과 의의에 대해 정은우 교수가 다양한 관점에서 세밀히 짚어 보았다. / 편집자주

 

불교미술 가운데 주 예배대상은 불상이다. 법당의 본존으로 모셔지는 불상은 부처의 가르침과 신앙의 내용을 예배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여야 함은 물론 추상적인 교리적 개념들을 불신의 모습으로 형상화해야 된다. 때로는 거대한 크기로서 예배자를 압도하거나, 명상에 잠긴 모습에서 신비적인 부처의 모습을 표현하기도 하며 때로는 인간과 같은 순수한 모습으로 친근감을 느끼게도 한다. 
 

당당하면서도 탄력있는 아름다운 불신의 유체미가일품인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의 모습이다.

거대한 크기로 만들기에 가장 적합한 재료는 소조불이다. 소조불이란 점토를 이용하여 계속 붙여 나가면서 일정한 형태를 만드는 상을 말하는데, 이때 흙으로 빚은 상은 泥佛, 흙으로 만들고 불에 구운 상은 테라코타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구별 없이 모두 소조불이라고 부른다. 구하기 쉬운 흙을 사용하므로 값이 적게 들며 대형불상을 제작하기에도 적당하지만 반면 내구성이 약해 남아 있는 작품은 드문 편이다. 고려시대 까지 남아 있는 불상 중 가장 큰 소조불은 부석사 무량수전의 소조여래좌상이다.
 

높이 278cm에 이르는 이 소조여래좌상은 결가부좌로 앉은 자세에 降魔觸地의 수인, 편단우견의 착의법을 하고 있다. 당당한 어깨에 일률적이면서도 복잡해진 옷주름, 이상성의 표현 보다는 근엄함이 강조된 얼굴 모습과 장중한 신체 비례를 보이는 점이 특징이다. 얼굴은 근엄한 모습인데 볼에 살이 많아 퉁퉁한 얼굴과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코는 짧은 편이며 입술은 도톰하면서도 볼륨이 있다.

왼쪽 어깨에만 옷을 두른 편단우견의 법의는 몸에 밀착되어 몸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며 옷주름은 일률적이지만 도드라지게 표현하였다. 볼록하게 강조된 양감 있는 가슴과 이에 비해 잘룩한 배는 마치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옮긴 듯 육감적이기 까지 하다.

 이에 비해 항마촉지인의 수인, 규칙적인 나발에 위로 솟은 육계, 머리중앙의 계주 장식은 부처님의 지혜를 상징하듯 규칙적이고 획일적인데 마치 종교적 신앙의 대상임을 거듭 확인 하는 듯하다. 이렇게 인간의 몸을 빌려 불신을 표현하면서도 이상과 자비, 위엄과 장엄을 갖춘 신비로운 불상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불상이 있는 무량수전 내부 공간의 장중함은 불상만이 아니라 불단, 원형의 두광과 신광으로 이루어진 목조광배와 천개 장식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광배는 외연부를 원으로 구획하고 각기 보상화당초문을 새겼으며 그 바깥으로 위로 솟는 화염문을 조각하여 화려함이 강조되었다. 원래는 화불이 있었던 듯 두광에 3, 신광에 4개의 꽂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용이 조각된 윗면의 궁전형 닫집도 매우 아름다운 모습이다.

현재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목조로 짜여 져 있지만 실제 그 이전의 원형이 남아 있으며 바닥에는 통일신라 창건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녹유전도 남아 있다. 부석사는 676년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절로서 이 녹유전은 이 시대와 관련될지도 모른다. 무량수전의 불상도 고려시대와는 다른 통일신라적인 요소가 강하게 남아 있다.

 불상에 대해 언급한 원융국사비문과 무량수전 해체수리 당시의 묵서명인 鳳凰山浮石寺改椽紀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이 불상은 고려시대인 1054년 다시 만들어 졌다. 이후 왜구 침략 때 불에 타면서 이로 인해 얼굴이 날라 갔다고(敵兵火其堂尊容頭面飛出) 하여 왜구의 침략 이후인 1376년에 다시 중수가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즉 현재 남아 있는 불상의 원형은 1054년경의 작품으로 추정해 볼 수 있으며 제작 과정에서 이전 의상대사 창건 당시 불상의 모습이 어느 정도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부석사에서 의상이 차지하는 중요성 더 나아가 의상대사가 우리나라 불교와 민중에 끼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우리는 의상에 대한 설화 -오대산 낙산사에서의 수행과 푸른새(청조), 수월관음 관련 설화는 조선시대 까지 회화와 조각의 도상으로 남아 있으며, 의상의 명성과 선묘와의 로망스는 우리나라 만에 국한되지 않은 동아시아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 일본에는 의상대사의 전기를 내용으로 그린 가마꾸라 시대의 두루마리 그림이 아직도 남아 있다. 즉 의상은 한류의 원조인 셈이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의 얼굴 모습

이 불상은 전각의 정면이 아닌 측면의 높은 불단 위에 앉아 있는 방향이 매우 독특하다. 즉 동쪽에서 서쪽을 바라보는 위치인데 이는 우리가 사는 이 사바세계에서 서쪽으로 무수한 불국토를 지나면 극락세계가 있음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구조이다. 이 불상은 이렇게 우리가 죽은 뒤의 내세와 관련되어 있는 아미타불상이다. 고려시대에 이 절의 주지를 지낸 圓融國師碑文(1054년)에도 “전각 내에 오로지 아미타불만을 봉안하고 좌우보처도 영탑도 세우지 않았다” 하여 문헌을 통해서도 그 존명을 확인할 수 있다.
 

아미타불은 대체로 설법인을 취하지만 이 불상은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을, 왼손은 선정인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항마란 마귀를 항복 시킨다는 손의 모습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성도했음을 증명하는 순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수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단순하게 손의 형상으로만 본다면 이 불상은 석가를 의미한다.

즉 손의 모습은 석가모니의 깨달음의 순간을, 무량수전이라는 전각의 이름과 그 봉안 위치는 아미타불을 상징하는 이중적이고 복잡한 교리와 신앙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이다. 아미타불은 우리가 죽은 뒤의 세계인 극락정토를 담당하는 부처이다. 사찰은 여러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명복을 기원하는 장소이자 기일에 자식들이 제례를 행하는 장소로 이용되는 것이다. 사실 고려시대에는 일반인도 화장을 했고 사원에서 제례를 올렸으며 자녀들 사이에 齋를 올리는 비용을 충당하는 忌日寶도 성행하였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당시 민중들에게 신앙적 기능과 사회적 기능을 함께 제공한 구성체였으며, 소조여래좌상은 내세로 이끄는 중심적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부석사 무량수전내 소조여래좌상은 넓은 어깨와 딱 벌어진 가슴, 당당한 자세, 해탈에 이른 엄숙한 얼굴 표정에서 구체화된 사실성과 부드러움을 통해 당당하면서도 탄력 있는 아름다운 불신의 육체미와 정신성을 갖추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비심과 불법의 영원성을 간직한 신앙적인 측면이 부각되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주는 작품이다. 더욱이 닫집의 웅장함과 화려한 광배 등은 소박한 무량수전의 건물과 결부되어 한 층 상승효과를 높이면서, 시간을 초월한 자유로운 불국토의 세계에 들어가듯 평안한 세계로 예배자를 이끌어 주는 것이다.

필자는 홍익대에서 ‘고려후기 불교조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고려후기 불교조각사 연구>가 있고, 주요 논문으로는 ‘고려후기 보살상 연구’, ‘고려후기 불교미술의 후원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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