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06:35 (토)
[테마] 민족주의와 젠더정치학
[테마] 민족주의와 젠더정치학
  • 교수신문
  • 승인 2001.09.2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1-09-25 15:38:13
『위험한 여성』(일레인 김, 최정무 편저·박환무 옮김, 삼인刊), 『내셔널리즘과 젠더』(우에노 치즈코 지음·이선이 옮김, 박종철출판사刊)

임우경 / 연세대 강사·중문학

신문에서 정대협이 마련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인권캠프’에 참여한 할머니들의 환한 얼굴이 담긴 사진을 보고 공연히 눈시울이 뜨거워진 적이 있다. 그 순간에도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에 그토록 일치감을 느끼는 건 내가 그들과 같은 여성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같은 민족이기 때문일까 등등의 질문이 눈치없이 떠오르는 것은 연구자인 필자의 직업병인지도 모르겠다.

필자가 여성과 민족을 대립항으로 놓고 질문을 떠올리게 된 건 2년전 우에노 치즈코의 ‘내셔널리즘과 젠더’(이하 ‘젠더’)를 접하고 난 후의 일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트라우마처럼 생생히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한국을 방문해, 전시 중에 강제 연행된 남성 및 ‘위안부’를 강요당한 여성의 경험을 듣는 행사가 있었는데, 거기서 건장한 체격의 한 일본 젊은이가 갑자기 일어나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하고 소리내어 울어버렸단다. 나는 그 젊은이의 행동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일본의 양심있는 청년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까지 생각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자인 우에노 치즈코는 “젊은이가 일본정부를 짊어지고 소리내어 울며 위안부 문제를 사죄하기 시작한 것은 무서운 내셔널리즘”이며 “국가와 자신을 그토록 간단히 동일시해 버리는 그의 단순함은 공포스러울 정도”라고 쓰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민족주의에 대해 나름대로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던 나 역시 공포스러울 정도로 민족, 혹은 국민국가와 나를 완전히 동일시하고 있었던 셈이다.

여성과 내셔널리즘의 복합적 관련성

그러면 저자의 말대로 개인은 국민국가 혹은 그 이데올로기인 내셔널리즘을 초월할 수 있으며 혹은 반드시 초월해야 하는 것일까. 그 개인이 게다가 여성이라면? ‘젠더’의 저자는 내셔널리즘이란 국가주의, 국민주의 또는 민족주의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며, 그것은 “‘이룰 수 없는 약속’으로 마이너리티를 동원하기 위한 상징”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내셔널리즘 운동에 동원된 여성은 자신들의 요구가 결코 우선적인 과제가 될 수 없음을 보편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개인적 차원에서 일본을 상대로 제기한 보상청구소송과 그로 인해 비로소 쟁점화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여성과 국민국가간의 이러한 모순적 관계를 단적으로 그리고 굉장히 복합적으로 보여 준다.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여기는 가부장제가 강간을 남성의 재산권 침해로 받아들이듯이, 민족담론은 위안부 문제를 대개 민족 사이의 유린으로 받아들인다. 이 민족담론에서 ‘국민’의 전형으로 삼는 모델이 ‘남성주체’임은 말할 필요도 없으며, 피해자인 여성 개인의 상처와 고통은 민족의 처녀성 침탈이라는 상징으로 단일화되어 버린다. 또한 민족의 순결을 강조함으로써 남성주의적 민족주의 담론은 다시 여성과 여성의 순결에 규범을 부과하고 여성을 가부장적 질서에 귀속시키는 효과를 얻는다.

지난 1997년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계 여성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집필된 ‘위험한 여성’은 한국에서의 이러한 민족담론과 여성의 관계를 좀더 다양한 범위에서 다루고 있다. 예컨대 문승숙은 박정희 이래로 관변에 의해 구축된 민족담론이 어떻게 근대화 발전 이데올로기와 전통담론을 모순적으로 결합함으로써 남성중심적 상상력으로 가득찬 민족정체성을 구성해 내는지를 흥미롭게 분석하고 있다. 또 양현아는 한국에서 종군위안부를 ‘기억’하는 민족담론의 전략을 분석하고 있고, 캐서린 문의 연구는 관제 민족담론 속에서 기지촌 매매춘 여성들이 달러 벌이 애국자로 추앙되는 웃지 못할 상황을 보여준다. 또 反식민지 민족주의에서도 여성은 아들과 남편을 위해 헌신하는 무성적인 어머니상으로 이상화되거나 혹은 남성적 존재인 강대국에 의해 유린당하는 약소민족의 알레고리로 등장할 뿐, 반식민적 혁명의 행위성이나 자율적인 주체성을 부여받지는 못한다는 사실이 이 책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분석된다.
이를 통해 볼 때, 우에노 치즈코의 주장처럼, 특히나 여성의 입장에서는 국민국가 혹은 내셔널리즘이란 반드시 초월해야 할 대상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는 특히 일본의 위안부는 ‘창부’에서 나온 것이고 한국의 위안부는 강제로 동원된 것이라는 한국 정대협측의 군대 성 노예제 패러다임이 일본과 한국 여성 사이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민족주의적 논리는 강간을 둘러싼 ‘강제’와 ‘임의’ 공방의 함정에 똑같이 빠지는 것이며 결국은 여성의 정절과 순결관념을 역설적으로 옹호하게 됨으로써 여성에 대한 억압논리를 더욱 강화할 뿐이라고 한다.

궁극적으로 여성억압을 강화하고 여성들 사이의 분열을 조장하는 ‘강제’와 ‘임의’ 논리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은 누가 뭐래도 타당한 지적일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개인이 ‘국민국가를 초월하고’ 페미니즘은 ‘내셔널리즘’을 초월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어떻게 초월할 것인가? 질문을 이렇게 던지고 보면 ‘초월해야 한다’는 당위에 동의하는 것은 차라리 너무나 단순한 일에 불과해 보인다. 예컨대 저자가 한국계 미국여성 김깁슨의 통곡을 보고 “가해 국민에 속하는 일본 여성인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라며 곤혹스러워 하는 장면은, 국민국가를 의식적으로 초월하고자 하는 저자 자신도 자기가 몸담고 있는 국민국가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 여성의 연대를 논의한다는 것이 유감스럽게도 불가능함을 보여 준다.

정교해져야 할 민족 개념

이것이 ‘위험한 여성’과 ‘젠더’가 같은 맥락의 주장을 하고 있으면서도 묘하게 긴장관계를 이루는 원인이기도 하다. ‘위험한 여성’은 미국인으로 살면서도 원죄처럼 끊임없이 한국계 미국여성들을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 부정하고 싶으면서도 쉽게 무시하거나 간단히 초월해 버릴 수 없는 것이 민족, 혹은 그와 유사한 것이 아닌가를 암시함으로써 ‘젠더’의 주장에 회의적으로 답한다.

곤혹스러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역사는 ‘재심’의 연속”이며, 강자의 논리에 저항해서 약자의 ‘또 하나의 현실’을 낳는 것은 그 자체가 투쟁이라는, 여성사 구축을 위한 그녀의 역사관도 강자와 약자의 ‘현실’을 구성하는 힘의 역관계를 추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한 비난을 면할 수 없다. 더구나 그것이 해석의 차원이 아니라 과거 혹은 현재 제국주의와 피식민지라는 현실적 상황으로 존재할 때, 그러한 주장은 너무나 무책임하게 힘의 논리를 인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에노 치즈코의 정당한 문제의식을 받아 안으면서도 그 곤혹스러움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족의 개념이 훨씬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가 유행어처럼 되어버린 이래, 민족이란 상상으로 생긴 것인 만큼 쉽게 초월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을 종종 일으킨다. 더구나 아시아적 특수성보다는 유럽적 현실을 기반으로 한 ‘상상의 공동체’ 개념에 우에노 치즈코는 너무 쉽게 기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국제사회에서 기승을 더해 가는 민족분쟁이나 자본주의적 전지구화 추세 속에서 민족, 국민국가는 사회경제적 범위에서 재정의될 필요가 있다. 각 국가마다의 고유한 민족의 형성 과정, 특히 근대에 들어서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공유하고 있는 아시아에서의 근대 국민국가의 특수성이 먼저 고찰될 때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아시아에서 페미니즘이 초월해야 할 내셔널리즘이 무엇인지 또 아시아 여성으로서 우선 연대할 수 있는 지점이 어디인지가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을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