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烈士가 되기보다 戰士가 되어 남으리
烈士가 되기보다 戰士가 되어 남으리
  • 이중
  • 승인 2006.12.26 11:0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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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대만의 진로

제2차 세계대전 승리 전후만 해도 당당하게 중국을 대표했던 장개석이었다. 하지만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피난을 가고부터, 모든 중국 역사는 모택동을 중심으로 쓰이고 있다. 국민당 남경정부의 시각이나 해석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없다. 대만에는 국민당이 남아 있어서 이념과 전통의 맥을 이어 오고 있다고는 하지만, 대만의 국민당은 대만에서조차 이미 여당이 아니다. 

미국에 사는 내 친구가 있다. 그의 부인은 중국인이다. 대만 유학시절에 맺은 인연이다. 부인의 친정 고향은 물론 대륙이다. 中美 수교 이후 그들 부부는 대만과 중국 대륙을 수시로 오간다. 그 친구에게 내 책 “모택동과 중국을 이야기하다”를 주었더니, 독후감을 보내왔다. “거, 재미있게 읽었어. 다음엔 대만 자료를 갖고 한 번 써보면 어때……?” 그는 성공한 사업가지만 전공은 역사학이다. 대륙의 발전상과 의미에 대해서도 그의 이해는 진지하고 포용적이다. 그 친구의 말엔, 대만의 국민당도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이 가슴 가득히 쌓여 있을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거, 대만은 어찌 되는 거야……?” 한번은 내가 그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늙은이는 고향 생각하고, 젊은이는 처가 생각하고……” 愚問賢答이었다. 늙은이의 고향은 대륙이다. 젊은이의 妻家는 대만이다. 대륙에서 섬으로 옮겨 온 지 벌써 60년이 다 되어간다.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따라서 고향을 등지고 섬으로 온 갓 스무 살의 청년이 이젠 80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다. 

현 상황에서 대만의 진로는 네 가지 길 밖에 없다. 대만의 독립과 대륙에의 흡수통합, 그 사이에 일국양제와 현 상태 유지 즉 不統不獨이 있다. 최악의 상황은, 대만독립과 흡수통합을 둘러싼 무력충돌이다. 그것을 피하다보면 일국양제와 현상유지만이 가능한 방법이 된다. ‘부통부독’은 통합도 독립도 아닌 상태에서 일정기간 현재의 상황을 약속에 의해 유지하자는 것이다. “잠정적인 약속”으로 우선 분쟁부터 잠재우고 보자는 주장이다. 

▲ 지난 2000년 '대만의 아들'로 불리는 민진당 천수이벤에 의해 대만에서 50년만에 처음느오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대만 독립을 주장한 천수이벤의 집권은 대만 젊은이들의 대륙 중국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과 경계심도 한 몫을 했다.

‘일국양제’란, 감성적으로 본다면 고향과의 관계 복원이고, 현실적으로는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대만의 무소속 입법위원 李敖의 일관된 주장이 일국양제이다. 1935년 하얼빈에서 태어난 그도 어느새 70을 넘은 노인이 되었다. 국민당 간판으로 총통이 되어 대만 독립노선을 추구했던 李燈輝는 ‘面統暗獨’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겉으로는 통일을 외치면서 속으로는 대만 독립을 원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현 여당인 民進黨의 천수이벤은 내놓고 대만 독립을 주장한다. 이러한 대만 독립에 완강하게 저항하는 대표적 인물이 바로 李敖이다. 그는 烈士로 죽기보다는 戰士로 살아서 싸우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하는, 특이한 ‘사상가’이다.

작년 4월, 그가 입법위원이 되고나서 한 중국 주간신문 기자와 나눈 대화가 있다. 실제로 입법원에 들어가서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기자가 묻자, 그는, 대만의 공개된 장소에서, 나 혼자만이라도 확실하게, 용감하게, 정치적으로 능란한 말솜씨로 ‘一國兩制’를 외칠 수 있게 된 것이, 입법위원 당선의 의미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그는, 입법위에 들어가서 정부를 향해서 “이게 무슨 정부냐. 기어이 13억 인구와 맞서 싸워야 하겠는가. 싸울 줄만 알지 백성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지 않으려는가. 1천 5백억 인민폐를 들여서 그렇게 많은 무기를 사려는 것은 무슨 뜻인가?”하고 대들었다고 말했다.

열사와 전사에 대한 구별도 재미있다. 그는, ‘北京法源寺’라는 책에서 두 종류의 인물에 대해서 썼다고 했다. 潭嗣同과 梁啓超. 담사동은 열사가 되어 죽음을 택했고, 양계초는 일본으로 도망을 갔지만 전사가 되어 일본에서 신문을 꾸리며 적과 싸웠다고 말한다. “열사가 되는 것은 별거 아니다. 전사가 되는 것이 총명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 ‘사상가’이며 ‘국보’라고 말하면서 ‘전사’의 길을 걷고 있다고 말한다. 기자가, 입법원에서는 늘 사람을 공격하는 일들이 많다고 하는데, 당신이 조금 걱정된다고 말하자, 그는 “아 그건 걱정 마시요. 공격을 해도 사람을 봐서 하는 것이요. 나는 국보요. 나를 때린다면 바로 예술품을 파괴하는 것이요.”라고 익살을 부린다. 그러나 그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대명제 앞에서는 늘 단호하다. ‘일국양제’에 대해서도 낙관적이다. 대만의 경제인들을 예로 든다. “그들은 정치인에 비해 훨씬 총명하다. 그들은 대륙에서 크게 돈을 벌었다. 대만에서 돈을 벌려는 사람들은 대륙이 아니면 돈을 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아주 낙관적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말을 잇는다. “대만만 보아서는 낙관적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전체 국면을 보면 아주 낙관적이다. 당신은 젊다. 우리 같은 70세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을 모른다. 우리는 중국이 다른 나라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았던, 그런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다. 지금 우리가 서로 싸우지 않는다면 중국은 얼마든지 번영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가장 만족스럽고 중요한 일이다.”

그는 외로운 전사인 셈이다. 그의 동년배들도 자신의 고향이기도 하고, 조상의 고향인 중국대륙에 대한 향수와 귀속감을 쉽게 저버리지 못할 것이다. 다만 각자의 정치적 입지 때문에 중공당과 함부로 손을 잡지 못할 뿐이다. 반면에 젊은 층들은 대륙의 의미로부터 자유롭다. 대륙에 뿌리를 둔 중국인들의 3세, 4세가 되는 그들에게 사회주의 체제인 대륙 중국에 매력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할 것이다. 국민당과 함께 대만에 왔던 사람들의 후손들도 이미 많은 수가 대만 원주민 여자들과 짝을 지었다. 그들의 처가는 대만일 뿐이다.  

대만의 인구구성은 다소 복잡하다. 1948년 장개석이 국민당 지도부를 이끌고 대만에 왔을 때, 이미 많은 중국 사람들이 대만 원주민 형식으로 현지에서 삶의 터를 닦고 있었다. 그들의 조상은 물론 중국 대륙이고, 대부분이 대만과 가까운 복건성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의 지배 아래, 일본 국민으로 살아야 했다. 대만 독립으로 이제 중국인으로 환원되는가 했는데, 국공내전으로 이념적 혼란을 겪었고, 갑자기 장개석의 국민당이 대만으로 상륙하면서 대만은 하루아침에 전후 냉전구조의 최첨단에 서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젊은이들은 대만 원주민들 후손들과 결혼도 했고, 이질적인 체제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과 경계심도 만만치 않다. 그러한 분위기를 타고 천수이벤이 집권에 성공한 것이다. 세계질서는 전후 냉전구조가 해체된 지 오래지만, 대만과 중국 복건성 사이에 있는 대만해협에는 아직도 냉전의 파고가 높다. 높은 파도를 타고 넘어서 대만의 경제가 속속 대륙으로 이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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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질 2007-01-20 12:41:07
그냥 인터넷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글을...... 펌질 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