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紅岩 정신, 핍박속에 불태운 혁명의 열정
紅岩 정신, 핍박속에 불태운 혁명의 열정
  • 이중 前 숭실대 총장
  • 승인 2006.12.26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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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중국 산책- 22회
여운형의 딸 여연구가 자기 아버지에 대해 쓴 책이 있다. 夢陽여운형은 1920년 대 초, 상해교민단 단장으로 있으면서 하와이에서 밀항해온 이승만을 프랑스 조계 안에 있는 미국인 목사 집으로 안내해준 장본인이다. 그러나 여운형은 상해임시정부가 맨 날 내부분열만 일삼고 별 볼 일이 없다는 이유로 임시정부 참여를 거부했다고  여연구는 적고 있다.


해방 공간에서 하루아침에 서울에서 사라져 북한으로 가버린 여연구는 아버지 몽양과 김일성의 각별했던 관계를 자상하게 설명해준다. 자신과 자기 남매들의 월북도 모두 아버지 몽양이 김일성에게 부탁하여 이루어진 일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아버지의 옛날 회고담을 빌려서 여연구는 상해 임시정부를 별 볼 일 없는 정부로 낮춰버렸다. 상대적으로 만주지방에서의 항일 게릴라 활동을 높이 평가했다.


대한민국 헌법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승계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볼품도 없는, 초라한 임시정부를 승계한 것이라면 대한민국 역시 초라해지고 만다. 만주 게릴라 활동을 독립운동사에서 우위에 둔다면 그것을 승계했다는 북한이 정통성에서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됨은 자명한 일이다. 윤봉길 의사가 왜군 수뇌들을 향하여 던진 폭탄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할 법도 한 상해의 홍구공원도 노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상해 임시정부 는 날이 갈수록 꺼져가는 등불처럼 우리들의 뇌리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최근 한국의 공중파 방송들은 고구려, 발해와 관련된 역사물을 집중적으로 방영하고 있다.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감성적으로 미화시키고 있다. 얼른 보기에 중국의 東北工程에 맞불을 지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어는 순간,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한 드라마들의 제작의도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한반도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두 나라, 두 정권의 정통성 싸움에서 어느 한편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다.


한국 임시정부가 8.15를 맞이한 곳은 중경이었다. 중경이 임시정부의 마지막 거점이었다. 최근 중경의 임시정부 청사가 새롭게 단장되었다는 소식이 있다. 반가운 일이다. 長江 뱃놀이의 시발점이 중경이다. 1989년 처음으로 중경 땅을 밟았을 때만 해도 내가 아는 중경은 임시정부가 있었던 도시이고, 중경에서 삼협 댐을 거쳐서 상해에 이르는 긴 유람선을 타는 곳으로만 알았다. 잠시 거쳐 가려고만 했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있으면서 이 山城도시의 매력에 빠지고 말았다.


고층 빌딩들이 다닥다닥 산비탈에 붙어있는 모양도 매력적이었다. 산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여기 저기 넓은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언덕이 높아서 자전거가 잘 보이지 않는다. 대신 오토바이가 많이 다니지만 경적을 금지했기 때문에 시끄럽지는 않다.  여름날의 중경은 찜통이다. 남경과 무한, 그리고 중경을 중국의 “3대 찜통(三大火爐)”이라 한다. 그만큼 살인적인 더위가 이 도시의 또 하나의 특징인데, 이 무더위를 뚫고 공산당 유적들을 찾아 나서려니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紅岩村이라, 붉은 바위 마을이라, 알고 보니 국공합작 시절, 국민당에 파견되어 있던 중공당의 근거지가 홍암촌이었다. 1938년부터 45년까지 중국의 戰時 수도는 중경이었다. 한국 임시정부가 중경에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너슨하고 모순이 많았던 국공합작이기는 하였지만, 북방 섬서성 연안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중공당도 전시 수도 중경에 파견 형식의 연락 또는 협력기관을 만들어야 했다. 공식적으로는 중공당 중앙남방국과 八路軍의 중경 판사처이다. 주은래, 등영초 부부와 엽검영이 홍암촌을 주로 지켰다. 중공군 10대 원수의 한 사람인 엽검영은 모택동 사후, 4인방 타도의 주역이다.


국민당과 중공당은 항일전쟁을 위해 임시로 합작한 처지였지만 문자 그대로 吳越同舟였다. 지향이 달랐고, 서로 경계했다. 그러나 중공의 수도는 멀리 있고, 중경의 경찰력과 병력은 모두 국민당의 것이었다. 실제로 전쟁 중에도 국민당은 중공당원을 핍박했다. 홍암촌은 이렇게 어려웠던 시절의 중공당의 모습을 일깨워주는 곳이다. 1953년에 가다듬기 시작해서 1958년에야 혁명 유적지의 하나로 정식으로 공개되었다. 바깥에서 보면 2층 집이지만 안은 3층으로 되어있다. 원래 홍암은 여주인인 錢國模와 남편 劉文章이 살았던 별장으로, 중공당은 이 집을 빌려서 비밀 아지트도 만들어 보안과 경계를 철저히 했다고 한다.


중국 도처에서 “紅岩”이란 이름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냥 붉은 바위가 아니라, 중경의 혁명 유적지 “홍암”을 일컫는 말이다. “홍암정신”이란 말도 있다. 홍암촌을 다녀간 사람만 해도 3천만 명이 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국 내 영도 급으로는, 주은래, 유소기, 주덕, 동필무, 엽검영, 등영초, 진의, 하룡, 곽말약,  양상곤, 이붕, 강택민이 다녀갔다. 모택동 사후 잠시 권력의 최정상에 있었던 화국봉도 홍암촌을 방문했었다. 외국인으로는 영국의 히스 수상과 미국의 키신저 국무장관이 대표적이다.


중공당은 공산당원들이 핍박을 받았던 산 증거로 중경의 감옥들을 보여준다. 渣滓洞 감옥과 白公館 감옥이 그것이다. 높은 산자락에 있어 경치도 아주 좋은 사재동 감옥은 원래는 감옥이 아니었고, 광부들의 숙소였다. 일본이 패퇴하고 국공내전이 다시 가열되면서 중공당에 대한 국민당의 탄압도 심해졌다. 많은 중공당 사람들이 정치범으로 이들 감옥에 갇혔다. 1백여 명의 탈출자가 떼죽음을 당한 곳도 사재동 감옥이었다.


광부들의 숙소였지만 하도 경치가 좋아서 戴笠이란 국민당군 특무 책임자가 장개석의 별장용으로 개조하기도 했다. 장개석의 호를 딴 “中正室”이란 현판이 그대로 남아 있어 눈길을 끌었다. 서안사변의 두 주인공 중의 한 사람인 양호성 장군이 희생된 곳도 이 감옥이었다. 1936년 12월 12일, 장학량과 함께 거사하여 장개석을 감금했던 양호성은 1949년 9월, 중공의 승리를 눈앞에 두고 이곳으로 끌려 와 비밀리에 살해되었다. 대립은 악명이 높았고, 이 일도 대립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5년, 종전 직후 장개석과 모택동의 회동이 중경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중경은 더욱 유명해졌다. 홍암촌도 덩달아 유명세를 탔다. 8월 28일, 모택동이 연안에서 중경으로 날아왔다. 홍암촌엔 당시 모택동이 머물렀던 방과 집무실도 전시되어 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마침내 합의를 보았다. “雙十協定”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쌍방이 서로 비난하는 것처럼, 잉크도 마르기 전에 더 격렬한 열전으로 확대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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