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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주 근방 嘉興, 中國 공산당과 臨政이 만든 인연
항주 근방 嘉興, 中國 공산당과 臨政이 만든 인연
  • 이중 전 숭실대 총장
  • 승인 2006.12.12 15:5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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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중국산책(21) 백범을 품었던 가흥

한국전쟁에 무력 개입했던 중국 지도자 모택동은 1893년생이다. 중국의 개입으로 모처럼의 통일 기회를 놓쳐버린 한국의 대통령 이승만은 모택동보다 18년 앞선 1875년생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을 때, 이승만은 만 70세였고, 모택동은 52세였다. 1912년생인 북한의 김일성은 33세로 모택동보다 19세 연하가 된다. 이승만, 모택동, 김일성이 비슷한 터울로 연령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옛날 풍속대로라면 각기 서로 서로 자식벌이 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 세 사람이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중국 대륙과 한반도에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 “임시정부 하면 곧장 상해가 연상되지만 실제 상해 임시정부는 10년 남짓 하고, 나머지 기간은 千辛萬苦의 長征 길이었다.” 사진은 백범 김구 선생이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일제의 압박을 피해 가흥에서 지낼 때 모습이다. 왼쪽부터 백범, 진동생, 이동녕, 엄항섭.
모택동은 장개석을 대만으로 밀어내고 대륙에 새 정부를 수립한다. 전후 냉전구조 속에서 이승만은 미국의 지원으로, 김일성은 소련의 개입으로 각각 남북한에 단독정부를 세운다. 1950년 6월, 30대의, 무장 게릴라 출신인 김일성은 70대의, 외교 전략가인 이승만을 공격한다. UN군의 참전으로 가까스로 전세는 만회되었지만, 중공군의 참전이라는 돌변에 직면하게 된다. 한반도의 남과 북이 미국과 중국의 영향권 안에 새롭게 진입하는 전환점이 한국전쟁에서 배태된다.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일련의 미·중 비밀회담의 중요의제는 엉뚱하게도 한반도 문제였다. 휴전에 항의하던 한국 대통령의 눈물을 비웃고, 조급하고 거칠다고 한국인을 헐뜯었다. 남북 간 대화의 통로를 만들도록 하여 한반도의 긴장을 풀어야 한다고도 했다. 이 때 이루어진 미국, 중국 간의 “한반도 현상”은 북한이 김일성 유일체제를 강화하고 핵 개발을 서둘기까지 그런 대로 유지되어 왔다. 북한의 핵 개발로 한반도는 또 한 번 지각변동을 겪고 있다. 그럴수록 미국과 중국의 발언권은 강화되고 영향력은 더욱 커지고 있다.

1953년 휴전 이후에도 북한의 공격성은 멈추지 않는다. 재건 경쟁에서 30대의 지도자가 일사불란하게 이끄는 북한이 단연 앞서 갔다. 70대 고령의 한국 지도자는 장기집권을 둘러싸고 야당의 격렬한 투쟁의 대상이 된다. 1960년 대통령 하야, 민주당 정권, 5.16으로 박정희 정권 등장 등 한국이 격심한 내부 혼란에 빠져 있는 동안 북한의 경제는 경공업 중심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국부 창출에 성공하고 있다.

1964년 수출 1억 달러 달성으로 우리가 환호성을 지를 때 북한은 이미 2억 달러 고지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1988년 올림픽의 해에 한국은 500억 달러인 반면에 북한은 20억 달러, 이 수치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80 고령의 이승만이 물러나고 김일성보다 다섯 살 아래인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기까지 남북한 대결은 북한의 일방적인 판정승이었다. 전후의 신생 독립국가 지도자와 그들 나라들의 진로에는 어떤 함수관계가 있었는지, 한번쯤 짚어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중국에서 풍상을 겪어 온 백범 김구는 이승만보다 한 살 아래이다. 이승만이 신생 독립국의 지도자로서 노령이라면 백범 김구도 예외는 아니다. 다 같은 황해도 출신인 백범과 이승만은, 광복 후 중국과 미국에서 각각 돌아와서 건국을 둘러싸고 노선 갈등을 빚기까지 형님, 아우님으로 서로를 불렀다. 두 지도자는 남북협상과 단독정부 수립으로 끝내 갈라지고 말았다.    

1921년 중국공산당 창당대회는 상해서 첫날을 보내고 이튿날부터 항주 근방의 嘉興이란 곳으로 피난가다 시피 하여 속개된다. 이른 바 船上 창당대회가 열린 셈이다.

가흥은 10여년 뒤, 한국 임시정부와도 인연을 맺는다. 1932년 5월, 김구의 상해임시정부는 상해로부터도 망명을 하게 된다. 상해가 망명지인데 또다시 망명길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亡命이란 무엇인가. 逃亡而救命의 준 말이다. 일단 위험으로부터 벗어나서 새로운 활로를 찾는 것이 망명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해를 기점으로 계속 도망과 구명의 장정을 하게 된다.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가 있자 일본은 임시정부를 싹쓸이하기에 혈안이 된다. 그동안 온정적이었던 프랑스 조계도 결코 안전지대나 성역이 될 수 없었다. 부랴부랴 피난 간 곳이 嘉興, 중국공산당의 선상 창당대회가 열렸던 바로 그곳이었다.

역사란 변화무쌍하다. 한국전쟁에서 전쟁 당사국의 두 우두머리로 맞섰던 이승만과 모택동이 불과 몇 달 사이로 상해를 스쳐갔다. 임시정부 법통을 껴안고 중국을 전전했던 김구가 상해임시정부를 지탱할 수 없어서 첫 도망지역으로 택했던 곳이, 중국공산당 역시 상해 창당대회를 속개하기 힘들어서 도망가다시피 해서 선상대회를 열었던 가흥이란 곳이었다. 오늘의 가흥은 공업지역으로 탈바꿈되었다. 상해 서남방에 있으며, 항주와 상해 사이의 가운데쯤에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가흥을 기점으로 하여 항주, 남경, 진강, 남경, 한구, 장사, 광주, 유주, 사천성 기강, 그리고 중경에 정착해서 8.15 광복을 맞게 된다. 임시정부 하면 곧장 상해가 연상되는데, 실제로 상해 임시정부는 10년 남짓 하고, 나머지 기간은 千辛萬苦의 長征 길이었다. 망명 지사들이 다녔던 이 길을 오늘은 한국의 기업들이 누비고 있다.

상해를 중심으로 하는 華東지역은  삼성, LG, SK, 현대 그룹을 비롯한 한국의 거대기업들이 모두 진출해 있다. 인천, 부산, 대구, 청주, 그리고 제주공항과 상해 포동을 잇는 항공편이 1주일에 115편이나 된다. 

요즘 들어서, 임시정부가 뭘 했느냐, 맨 날 자체 내부에서 싸움질만 하고 제대로 日帝와 맞붙어 싸우지도 못한 정부가 아니냐 고 핀잔하는 소리를 듣는다. 일면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런 논란들의 배후를 살펴보면 어떤 의도 같은 것이 쉽게 포착된다. 항일독립운동의 정통성을 중국 동북지역이나 蘇滿국경 지대에서의 국지적인 항일 게릴라 활동에 두려는 試圖가 그것이다.

鄭靖和 여사가 쓴 “長江日記”(학민사 발행)를 보면 “일경의 현상금까지 걸려 있어 신변의 위험을 심하게 받고 있던 白凡은 공장에 머물지 않고 따로 그 공장의 공장장이며 저보성의 수양아들인 진동돈 집에 숨어있기로 했다. 그리고 그곳도 불안하다고 느껴질 때에는 南湖라는 호수의 배 안에 은신하기도 했다”고, 가흥으로 몸을 숨긴 백범의 곤고했던 당시의 사정을 전하고 있다.

정정화 할머니는 앞서 이야기했던 동농 김가진 선생의 며느님이시다. 백범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살피고 모셨던 분이다. 연로한 시아버님을 모시겠다고 단신으로 상해 밀항을 결행했고, 그 후, 몇 차례에 걸쳐서 독립운동 자금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한국으로 잠입하기도 했다.

이중 / 전 숭실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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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시 2007-03-11 14:27:33
이총장님.
감명깊게 읽고 갑니다.
총장님의 끊임없으신 학구열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 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