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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물질적 유령
영화, 물질적 유령
  • 김재호
  • 승인 2024.03.25 05: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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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베르토 페레스 지음 | 이후경·박지수 옮김 | 컬처룩 | 700쪽

에드워드 사이드도 극찬한 바로 그 책
이론적 엄밀함과 비평적 섬세함이 정교하고도 아름답게 교직된,
21세기 영화 담론의 축복과도 같은 명저

하나의 보편 이론이 마스터 키처럼 군림하기는 불가능한 이른바 ‘포스트-이론’의 시대에, 이제 20세기 앙드레 바쟁의 글쓰기처럼 비평과 이론의 아름다운 융합은 더 이상 불가능한 것인가. 이 질문에 당당하게 긍정으로 답할 수 있는 한 권의 책이 드디어 번역 출간되었다.

저명한 영화학자이자 영화비평가인 질베르토 페레스는 《영화, 물질적 유령: 이론과 비평의 경계를 넘어》에서, 엄격한 인문학적 사유와 천진한 영화광적 감수성이 결합된 유연하고도 창의적 정신에서 비롯된, 정교하면서도 아름다운 영화 비평의 한 정점을 선사한다. 에이드리언 마틴, 조너선 로즌바움 등의 저명한 평론가들과 〈사이트 앤 사운드〉 등 영화 매체들뿐만 아니라, 에드워드 사이드와 스탠리 카벨 같은 동시대 석학들까지 이 책에 대한 찬사를 바치고 있다.

페레스는 영화사적으로 중요한 영화들이자 자신이 사랑하는 영화들을 뜨거운 공감의 태도를 지닌 채 비평적으로 탐사한다. 동시에 이러한 비평 작업에 동원되는 개념들의 적확성과 이론적 컨텍스트를 질문한다. 이는 바로 이론에 계속해서 끌리면서도 오늘날 무엇을 ‘이론’이라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는 영화 비평, 즉 비평적 방법이면서 동시에 이론적 개념의 비평적 재검토이기도 하다. “물질적 유령”이라는, 얼핏 보기에 형용모순적인 제목에는 페레스의 이러한 유연하고도 역동적인 정신이 함축되어 있다. 영화는 실재의 물리적 흔적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물질적이지만, 동시에 지금 여기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허구화의 공정을 거쳐 우리 눈앞에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유령인 것이다.

이 책은 영화의 주요 개념을 여러 영화의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버스터 키튼, F. W. 무르나우, 알렉산드르 도브젠코, 장 르느와르, 존 포드,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 장뤽 고다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등에 대한 빼어난 작가론을 펼치고 있다. 또한 그들의 주요 작품(상대적으로 덜 다뤄져 온)에 대한 예리한 작품론도 담고 있다. 특히, 키튼의 열린 공간과 채플린의 닫힌 공간의 함의, 〈시골에서의 하루〉에서 르느와르가 공간과 시간을 다루는 방법에 대한 통찰, 키아로스타미의 〈클로즈업〉에서 모더니즘과 자연주의가 합일하는 순간의 포착하는 부분 등에서는 탁월한 비평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이론적 엄밀함과 비평적 섬세함이 정교하고도 아름답게 교직된 이 책은 ‘영화의 경이로움을 발견하는 여행’으로 우리를 이끈다. 또한, 기존의 영화 담론뿐만 아니라 예술사 전반에 대한 깊은 통찰과 문학과 연극과 미술 작품들에 대한 폭넓은 식견으로, 영화학도나 영화애호가들뿐만 아니라 예술과 인문학에 관심을 가진 많은 독자에게 책 읽기의 진정한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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