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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반 20년간 ‘겨울’에 진입했던 美 ‘디지털 역사학’ 
1970년대 중반 20년간 ‘겨울’에 진입했던 美 ‘디지털 역사학’ 
  • 우동현
  • 승인 2024.03.27 08: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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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역사학의 물결② 디지털 역사학의 역사

과거를 재구성하는 학문인 역사학이 인문학의 주요한 축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디지털 역사학(DHis)은 디지털 인문학(DH)의 중요한 부분이다.

한편 인문학 연구자는 특정 주제에 관한 선행 연구에 주목한다. 기존 학자들이 해당 주제에 어떻게 접근했고, 어떠한 주장을 펼쳤으며, 어떠한 문제에 맞닥뜨렸는지를 알아야 연구 지형을 조망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기여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연재에서는 DHis의 연구사를 간략하게 살펴본다.

<연재 순서>
① 디지털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② 디지털 역사학 역사
③ 디지털 역사학의 성과 1 미국
④ 디지털 역사학의 성과 2 유럽
⑤ 디지털 역사학의 성과 3 동아시아
⑥ 디지털 역사학의 성과 4 국내
⑦ 디지털 인문학의 최대 난제와 돌파구
⑧ 디지털 역사학의 가능성과 전망

학계의 높은 기대와는 달리 당시 컴퓨터 기술로는 
수치화·구조화되지 않은 긴 글자 데이터는 거의 다룰 수 없었다. 
일부 역사학자들이 수치화·구조화된 자료를 
편향적으로 선호하거나 복잡한 역사적 맥락을 
숫자로 표현(code)하는 일에 대한 회의감은 예상된 것이었다.

많은 독자에게 DHis의 연구사 정리는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은 최신의 현상이지 않은가? 이러한 오해로 인해 컴퓨터 기술 발달사나 DHis의 전사(前史)는 별다른 흥미를 자아내지 못한다. 하버드대학에서 한국학을 개척한 에드워드 와그너(Edward Wagner)와 함께 과거 급제자 명단인 방목(榜目)의 전산화를 시도한 송준호처럼 DHis의 역사에 한국의 존재가 뚜렷하지만, 기술의 새로운 외양에 가려 마치 연구사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오해는 아쉽다.

‘투기자 보유 토지’를 해석하는 새로운 방법
 
미국인 역사학자 로버트 스비렌가(Robert Swierenga)의 사례는 DHis의 연구사뿐만 아니라, 오늘날 DHis 논의를 이해하는 작업에 대단히 유용한 참조점을 제공한다. 1935년생인 그는 아이오와대학 역사학과에서 19세기 아이오와주의 토지사로 박사학위논문을 쓰고 1965년 학위를 받았다. 부동산의 역사를 탐구한 것이다. 대체 왜 그러한 주제를 골랐을까?

학위논문의 서문에서 밝히듯, 아이오와주가 미국 농업사에서 중요한 지역이었고 스비렌가가 연방 토지대장과 카운티의 전매 기록 등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료들은 스비렌가도 참여한 미국 원주민들의 배상 소송과 관련되기도 했다. 스비렌가는 데이터를 정확히 독해하기 위해 원주민, 관료, 해당 기록을 전산화한 회사 등과 협업했다. 더하여 같은 대학 산업공학 대학원생과 함께 PROFIT이라는 IBM 7044 컴퓨터용 프로그램을 만들어 방대한 데이터를 6개월 이상 천공 카드에 입력하고 처리했다.

토지에 투자한 투기자들의 자금 회수율을 계산하기 위해 만든 이 프로그램(코드)의 학술적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때까지 학자들은 토지를 통한 부당 이득 취득(land profiteering)이 미국 서부의 발전을 저해했다고 보았다. 당시의 지배적인 해석 아래 토지 투자는 정당한 ‘비즈니스’가 아닌 ‘투기’로 매도됐고, 학자들은 투기자 보유 토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에이브러햄 링컨도 투자를 위해 아이오와 변경 지대에 주목했을 만큼, 19세기 미국의 변경 지대 투자는 중요한 경제적 행위였으나, 역사가들은 관련 기록을 참조하지도 않고 투기꾼의 역할을 부정적으로만 보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스비렌가의 학위논문은 투기에 관한 긍정적인 경제사적 해석을 내놓았고, 연구의 일부는 저명한 『The Journal of Economic History』에 게재되었다. 그가 도운 원주민들도 1천5백만 달러의 정부 보상금을 받았다.

미국 학계를 사로잡았던 ‘디지털 역사학’ 열풍

전산 연구, 인문 전산(humanities computing), 컴퓨터 보조 연구 등으로 불린 DHis는 방대한 데이터(특히 숫자)를 비교적 단시간에 처리할 수 있는 컴퓨터 기술의 발달로 가능해졌다. 천공 카드를 이용한 역사 연구는 1930년대에 시작됐지만, 그 인기는 1950년대 후반 제창된 수량 경제사(Cliometrics)라는 학문을 통해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양적 접근이 주는 신선함과 파급력은 작지 않았다. 각종 명부, 공증·조세 기록, 인구조사 자료 등 수치화·구조화된 데이터는 과거를 ‘과학적으로’ 보여주는 DHis의 총아가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DHis 열풍이 미국 학계를 사로잡았다.

1970년대 초, 계산과 양적 방법론은 촉망받는 학문이었고 미국 유수 대학의 강단과 강의안에 등장했다. 정치학 연구를 위한 대학 간 협력단(ICPR)이 꾸려져 DHis 하계강좌를 개최했고, 유서 깊은 미국역사협회는 위원회를 설치해 DHis 붐에 대응하고자 했다. 『Computers and the Humanities』와 같은 DH 전문 저널도 등장했다. 학제 간 연구와 융합을 강조하는 분위기 속에서 DHis의 방법론과 그 연구 결과를 대중에게 설명해주는 논문과 책이 쏟아져나왔다.

“통계표는 ‘증거의 배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부를 거치며 DHis의 열기는 한풀 꺾인다. 대니얼 그린스타인(Daniel Greenstein)에 따르면, 인기 저하의 가장 큰 이유는 디지털 기술을 데이터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왜곡이 발생한다는 점이었다. 학계의 높은 기대와는 달리 당시 컴퓨터 기술로는 수치화·구조화되지 않은 긴 글자 데이터는 거의 다룰 수 없었다. 일부 역사학자들이 수치화·구조화된 자료를 편향적으로 선호하거나 복잡한 역사적 맥락을 숫자로 표현(code)하는 일에 대한 회의감은 예상된 것이었다.

이러한 비판에 직면해 DHis 선구자이자 스비렌가의 스승인 윌리엄 아이델럿(William Aydelotte)은 이미 1960년대 후반, 역사학 고유의 해석 문제에 대해서 깊은 통찰을 내놓았다. 그에 따르면 통계표는 ‘증거의 배열’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표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의 문제였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는 DHis 연구자는 적었고, 저명한 역사가 로렌스 스톤처럼 역사학 연구자들은 서사 중심의 역사로 회귀했다.

인공지능의 발달사에서 1970년대 중후반과 1990년대처럼 관심과 지원이 급감했던 시기를 ‘인공지능 겨울’이라고 부른다. 1970년대 중반부터 DHis와 DH는 20년간의 ‘겨울’에 진입한다. 다음 연재에서는 긴 겨울잠에서 깬 미국 DHis의 현주소를 살펴본다.

우동현 카이스트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조교수
UCLA에서 과학기술사(북한-소련 관계사)로 논문을 쓰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국사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The Historical Journal』에 한국인 최초로 논문이 게재됐다. 2023년 8월부터 한국역사연구회에서 디지털역사학연구반을 설립해 운영 중이다. 연구실 주소는 https://sites.google.com/view/then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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