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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입다 패션을 만들다
옷을 입다 패션을 만들다
  • 김재호
  • 승인 2024.03.20 14: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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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_『옷을 입다 패션을 만들다』 정연이 지음 | 에코리브르 | 288쪽

패션 디자이너인 학자가 들려주는 옷 이야기와 패션의 문화사
“좌절로 가득한 시대에도 우리 마음속에는 언제나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갈망이 살아 있다.”

우리는 평생 옷 속에 살며 어떤 옷을 입을지 생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편안하고 나다운 옷, 때와 장소에 어울리는 옷, 지구를 생각하는 옷까지, 옷을 고를 때면 고민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옷은 무엇일까? 지은이는 패션에 정답은 없지만, 내가 입은 옷이 어디에서 시작했고, 어디로 가고 있으며, 나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이해하면 삶이 좀더 풍요롭고 충만해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부터 옷 만들기를 좋아해 자연스럽게 관련 전공을 택하고 패션 디자이너가 된 지은이는,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세계적 명품과 우리나라 유수의 여러 패션 기업부터, 저렴한 캐주얼 브랜드에 이르기까지 디자인 실무를 두루 경험했다. 그렇게 접한 패션 산업의 민낯과 가치관의 충돌, 파리 유학을 떠나 현재 홍익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패션을 가르치는 교육자가 되기까지 보낸 고민과 배움의 시간을 패션의 역사와 함께 들려준다.

돌 사진 속 어머니가 떠주신 하얀 크로셰 망토와 모자를 쓰고 있던 지은이는 친구들과도 옷 입기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노는 아이였다. 대학을 졸업한 뒤 부푼 꿈을 안고 입사한 패션 기업에서 디자이너의 애환을 몸소 경험하며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회의를 느끼는 동안에도 ‘언제나 무언가를 입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계속되는 야근과 언제나 계절을 앞서 살며 유행을 선도해야 하는 고달픔, 외근 나간 공장에서 본 충격적인 패션 노동자들의 실태, 어미 배 속의 동물 새끼마저 꺼내 모피를 벗기고 옷을 만드는 인간의 탐욕 등 지은이는 갈등 끝에 현장을 떠나 유학길에 오르지만, 패션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는 못한다. 그리고 패션의 무게에 압도되지 않고 제 삶을 당당히 즐기는 파리의 멋쟁이들을 보고 느낀바, 늘 함께한 옷에 대해 공부하고 고민한 결과물을 한 권의 책으로 묶기에 이른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옷은 옷일 뿐, 저마다 의미를 부여해 편 가르고 차별하며 권력을 누리려 하는 것은 인간임을 지적한다. 그러나 패션은 역사에서 언제나 미에 대한 인류의 욕망을 대변해왔으며, 우리가 아름다움을 원하는 한 늘 새롭게 다시 태어날 것이다.

지은이는 기분 전환을 위해, 유행을 좇아 저렴하지만 불필요한 옷을 사는 우리의 소비 습관이 패스트 패션과 기후 위기의 시대를 만든 것은 아닌지 자문한다. 혹여 친환경 패션을 위한 노력이 부족해 보일지라도 인식함으로써 첫발을 뗄 수 있으므로 각자의 자리에서 먼저 시작해보자고 권한다. 더불어 자신의 기준에 맞는 현명하고 합리적인 소비를 한다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좋다는 위로를 건넨다.

지은이는 멋쟁이로 평가받고자 한다면 당대의 유행에 편승하는 것은 ‘언제나 지는 게임’이며, 각자 살아낸 삶의 방식과 축적한 시간을 통해 몸에 각인된 고유의 에너지인 제 스타일을 갖추는 것이 지속 가능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또한 사치나 과시가 아닌, 품질·자부심·탄탄한 서사를 갖춘 진정한 ‘명품’ 브랜드가 우리나라에서 나오길 바라는 소망을 피력한다.

지은이의 결론은 사회가 강요하는 미의 틀을 벗어나 몸과 삶에 맞는 옷을 자유롭게 고르는 것은 자기 배려의 시작이며, 타인에게 건네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또한 타인을 의식해 자랑하듯 소비하기보다 절제하고, 심미안과 단단한 취향을 훈련해 삶과 예술을 일치시키는 정신적 기쁨을 누리는, 지적이고 우아한 패션을 권한다.

다양한 패션 브랜드의 디자인 실무를 고루 경험하고, 패션의 본고장 파리 유학을 거쳐 인류의 복식과 문화에 대한 전문 지식을 쌓은 지은이가 이를 토대로 학생들과 호흡하며 들려주는 패션 이야기는 때로 놀랍고, 통쾌하며, 시종일관 흥미진진하다. 그러면서도 친한 친구와 허물없이 대화하는 듯한 소탈한 재미를 준다.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세상의 진정한 비밀은 숨지 않고 드러나 있다”고 말했다. 패션은 가끔 표피적이고 가벼운 것으로 오해받지만, 사실 그 속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바람과 이상이 녹아 있다. 지은이는 지구상에 옷 입는 생명체는 인간뿐이며,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우리의 느낌과 행동이 달라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패션에 대한 사랑과 미래에 관한 치열한 고민, 동시대를 사는 사람과 다른 생명들을 위하는 따뜻한 마음이 돋보이는 책이다.

책의 구성

1부 “태초에 옷이 있었다”에서는 역사에 남을 호모 사피엔스의 바늘 발명부터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리틀 블랙 드레스’, 청바지, 줄무늬 티셔츠까지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준다. 호모 사피엔스는 바늘귀에 실을 꿰어 몸에 맞는 옷을 지어 입음으로써, 네안데르탈인과의 진화 경쟁에서 살아남아 고유의 개성과 미의식을 나타낼 수 있었다. 검은색은 고대에는 고귀함을, 근세에는 예술가의 우울을 상징하다 전설적인 패션 디자이너 샤넬의 손을 거쳐 우아함의 대명사 ‘블랙 리틀 드레스’로 패션사에 남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파란색은 과거 유럽에서 천대받는 색이었으나 성모 마리아와 같은 고귀한 상징에 사용하며 ‘신분 상승’을 거쳐 오늘날 젊음과 순수를 나타내게 되었고, 줄무늬는 노예·죄수와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낙인이었다가 이제 경쾌함과 대담함의 표상이 되었다.

2부 “옷 입은 사람들의 역사”는 다양한 패션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변천사와 여기에 얽힌 사람들의 얘기다.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는 패션의 이면에는 전쟁, 착취, 차별, 탄압, 사치와 같은 그늘이 숨어 있다. 유행과 상관없이 언제나 사랑받는 트렌치코트는 사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혹한 전투를 벌여야 했던 군인들의 옷이었다. 지금도 문제가 되는, 패션이라는 이름의 동물 학대는 16세기 사람들이 유행하는 모자를 쓰기 위해 비버를 남획할 때도 벌어졌으며, 이때 모자를 만들던 노동자들은 수은 중독으로 심하게 고통받았다. 19세기 프랑스에 처음 등장한 백화점은 사치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으며, 주로 ‘중심’에서 ‘변방’으로 향하던 패션의 흐름이 변해가는 현대에는 패러디나 오마주라는 이름으로 표절과 창작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패션 브랜드의 행보가 논란이 된다.

한편 전시에 애국과 물자 절약을 내세워 국민의 복장을 제한하는 정부에 맞선 사람들도 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옷 입을 자유는 이들이 애쓴 결과이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 배우가 관객의 눈에 잘 띄려고 신다가 신체의 언어와 매력을 동시에 확장하는 신발이 된 하이힐, 세계대전에 지친 사람들에게 다시 아름다움을 꿈꾸게 한 디올의 ‘뉴룩’, 저항으로 시작한 록 음악이 빛바래가는 것에 다시 저항한 펑크와 글램 패션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코르셋은 오랫동안 여성을 옷 속에 가두었다. 이미지는 1878년의 코르셋이다. 이미지=위키피디아

3부 “패션에 대한 불편한 진실”에서는 제목 그대로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패션의 단면을 다룬다. 요즘 우리가 패션 산업이 기후 위기를 악화시킬까 걱정하듯이, 과거 사람들은 사회가 강요하는 패션의 제약으로 고통받았다. 예를 들어 미에 대한 사회 통념에 맞추어 몸을 졸라매는 코르셋은 수백 년 동안 여성을 옷 속에 가두었다. 여성이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해 바지를 입고 처음 거리에 나섰을 때 사람들은 이들을 손가락질했다. 불세출의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이 있는 모습 그대로 자신 있고 아름다운 여성을 위한 턱시도 슈트 ‘르스모킹’을 디자인할 때까지 이러한 차별은 계속되었다. 일제 강점기 우리 여성들은 한복 대신 일본식 ‘몸뻬’를 강요당하기도 했다. 현재 패션 산업은 더 큰 이윤을 위해 노동자를 착취하고, 저개발 국가의 환경을 오염시키고, 모피와 가죽을 얻기 위해 동물을 학대하며, 실제로는 환경을 위한 패션이 아닌데도 그런 듯 위장하는 그린워싱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4부 “어떻게 입을 것인가”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다. 가끔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과거의 향수까지 자극하는 요즘의 레트로 혹은 뉴트로 유행을 보면 유행은 영원하지 않으며 돌고 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절제하는 우아함을 추구한 댄디들, 새로운 방식으로 살고자 하는 힙스터의 역사와 무분별하게 새로움을 추종하는 것의 문제점, 아름다움과 가치를 식별할 수 있는 좋은 취향, ‘럭셔리’라 부르는 명품의 역사와 속성, 한국과 프랑스에서 경험한 명품 이야기를 통해 앞으로의 패션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본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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