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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이 높은 식당
천장이 높은 식당
  • 최승우
  • 승인 2024.03.18 14: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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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연 지음|한겨레출판|284쪽

용기란 누군가의 죽음을
외면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그 자리, 얼마나 갈 거 같아요?”
하나의 자리를 두고 시작된 ‘을’들의 의자뺏기 게임
불행에 맞서는 여성 노동자들의 공감과 연대

한겨레문학상·세계문학상·제주4·3평화문학상 최종 노미네이트

신예 작가 이정연의 장편소설 《천장이 높은 식당》이 출간되었다. 이정연은 2017년 금호·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단편소설 〈2405 택시〉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천장이 높은 식당》은 작가의 첫 장편소설로, 출간 전 한겨레문학상·세계문학상·제주4·3평화문학상에 최종 노미네이트되며 그 시의성과 완성도 면에서 심사위원들의 높은 관심을 받았다.

이정연은 파견직 워킹맘 ‘승연’을 통해 노동자들이 어떻게 동료들의 고통을 외면하는지에 주목한다. 영양사 자리를 두고 갈등하는 승연과 전 영양사 ‘신유라’의 미묘한 관계에서는 사내 구성원 사이의 권력 구도를 정확히 파고들면서, 동료의 비극 앞에서 시스템이 노동자를 어떻게 적극적인 회피 또는 암묵적인 동조로 밀어넣는지 섬세하게 묘사한다.

경력단절 여성 채용이라는 마케팅 전략
그 반짝이는 포장 안에 숨겨진 노동자의 비극
그리고 피해자로 남기를 거부하는 ‘을’들의 조용한 반격

“여자를 생각합니다. 여자만 생각하겠습니다”가 슬로건인 화장품 회사 ‘선린’은 여성 친화적인 행보로 여성 소비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주인공 ‘승연’은 선린이 진행한 경력단절 여성 취업프로그램 ‘컴백맘’으로 선린의 구내식당 영양사가 된다. 회사에 적응해가던 어느 날, 영양사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의문의 여성은 격앙된 목소리로 승연에게 말한다. “그 자리, 얼마나 갈 거 같아요? 남의 자리가 그렇게 좋으냐고요.”

전화를 걸어온 것은 전 영양사 ‘신유라’로, 본부장에게 강간을 당할 뻔했다는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다가 쫓겨난 상태다. 그녀는 곧 이 사실을 인터넷에 폭로할 것이며 자신을 돕지 않으면 당신도 똑같이 당할 거라고 엄포를 놓는다. 그러나 남편이 이혼을 요구하며 딸의 양육권을 주장하는 상황에서, 승연은 반드시 이 자리를 지켜냄으로써 딸을 자신의 품으로 데려와야 한다.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네. 지호 뭐 해? 바꿔줄 수 있어? 나 많이 찾았을 텐데.”
“잔다니깐. 그리고 이거 집 전화 아니야.”
“언제 잤는데?”
“돌겠네. 방금 잠들었다고!”

그가 건 전화는 오늘도 032로 시작했다. 지호가 금방 잠들었다는 걸 보면 집 근처일 것이다. 부천이나 인천 그 어디 탁아 시설을 뒤지면 지호가 있는 곳을 찾을지 모른다. 승연은 흥분하지 않으려고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이혼은 할게. 대신 지호는 내가 키워. 그동안 애한테 얼마나 잘했는지 알잖아. 그리고 있지, 나 선린에 취직했어. 화장품 회사 말이야. 이번에 계약직 되는데 그러면 지호 키우는 데도 문제없어. 어린이집도 지원해주고, 주 5일 근무에 퇴근도 빠르고. 자긴 이제 일 시작하는 거잖아. 애가 어떤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키우려고 해.”_본문 중에서

한편 선린은 또 다른 사내 성폭력 사건으로 뒤숭숭하다. 대학생 인턴이 마케팅팀장에게 성추행당하고, 연이어 직장 내 괴롭힘을 겪었다는 사실이 공론화된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승연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인턴을 발견한다. 충격에 빠진 승연에게 회사는 인턴의 자살이 우울증 탓이라 증언해주면 파견직에서 계약직으로, 나아가 정규직으로 만들어준다는 제안을 해온다. 승연은 회사의 제안을 두고 죄책감에 시달린다. 승연 또한 과거 직장 내 괴롭힘의 피해자였고, 여전히 후유증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 회사의 편에 설 수 없다는 생각에 승연은 결국 인턴의 죽음을 기자에게 폭로한다.

“사람이 죽었어요.”
“네?”
“사람이 죽었다고요.”
“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회사에서 사람이 죽었다고요!”
기자의 무관심한 반응 때문에 끝내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을 뱉어 버렸다. 유 기자는 다시 자리에 앉아 업무 수첩을 펼쳤다.
“얼마 전에 대학생 인턴이 자살했어요. 회사에서 괴롭힘을 당했다고 소문이 났던 사람이었고요. 뉴스는 나가지 않았고……. 그 이상은 저도 몰라요.” _본문 중에서

“용기란 누군가의 죽음을 외면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신샛별 문학평론가의 추천의 말처럼, 작가는 단기 파견직 신분의 여성 노동자가 사내의 비리와 불의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지켜보며 우리 모두를 가혹한 윤리적 시험대 위에 세운다. 기업은 비정규직 여성에게 고용유지를 빌미로 수많은 비위 행위를 조장하고, 문제가 되면 꼬리 자르듯 그들을 회사 밖으로 내몬다. 그마저 여의치 않으면 노동자들을 의자뺏기의 장으로 몰고 간다. 노동자들은 동료의 고통과 죽음을 외면해야만 승자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 용기를 내지 않기 위해 동료를 향한 공감의 가능성조차 차단한다.

이러한 시스템의 논리 아래에서 이정연은 두 여성 노동자를 익숙한 피해자의 자리에만 앉히지는 않는다. 두 사람이 각각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와 성추행 피해자라는 과거에 매몰되게 두지 않고 ‘을’이라는 위치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도록 한다. 여성 노동자를 불행하고 미숙한 존재가 아닌, 적극적으로 부조리에 반기를 들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모습으로 나아가게 한 것이다.

여성에게 요구되던 ‘순종’과 ‘포용’을 수행하지 않는 그들은 그야말로 피해자로 남기를 거부하는 현재의 여성 노동자를 닮아 있다.

최종적으로 이정연은 연대와 진보를 택한다. 계속되는 회사의 요구와 쉼 없이 이어지는 업무 사이에서 승연을 돕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경쟁자인 신유라다. 그녀는 승연의 업무를 도울뿐더러 승연과 딸 지호가 전셋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선뜻 손을 내민다. 승연 또한 인턴의 죽음에 대한 악의적인 보도를 바로잡기 위해 마지막까지 분투한다. “용기란 누군가의 죽음을 외면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결국 우리를 지탱하고 껴안는 것은 서로임을 이정연은 《천장이 높은 식당》에서 보여주고 있다.

신예 작가 이정연의 결론은 단호하다. 용기란 누군가의 죽음을 외면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 이 담담한 전언을 뒤집으면 비수 같은 질문이 된다. ‘당신은 스스로 용기를 내지 않아도 되게끔 만들기 위해 누군가의 죽음을 외면해오지 않았던가?’ 정의로운 선택을 위축시키는 시스템의 견고함을 직시하면서도 그것을 뚫고 나오는 공감의 힘과 진보의 가능성을 믿는 이 소설을 우리도 믿어 보기로 하자.
_신샛별(문학평론가)

추천사

이 소설이 ‘경단녀’ ‘워킹맘’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은 저성장시대의 그늘과 남성중심주의적 노동환경에 이중적으로 속박되어 있는 한국사회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의 삶이다. 그러나 단지 냉정한 현실고발을 수행하는 데서 자족했다면 나는 이 글을 쓸 마음을 먹지 않았을 것 같다. 작가는 한 걸음 더 들어가서 단기 파견직 신분의 여성 노동자가 사내의 비리와 불의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지켜보며 우리 모두를 가혹한 윤리적 시험대 위에 세운다.

신예 작가 이정연의 결론은 단호하다. 용기란 누군가의 죽음을 외면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 이 담담한 전언을 뒤집으면 비수 같은 질문이 된다. ‘당신은 스스로 용기를 내지 않아도 되게끔 만들기 위해 누군가의 죽음을 외면해오지 않았던가?’ 정의로운 선택을 위축시키는 시스템의 견고함을 직시하면서도 그것을 뚫고 나오는 공감의 힘과 진보의 가능성을 믿는 이 소설을 우리도 믿어 보기로 하자.
_신샛별(문학평론가)

어떤 이야기는 낙인을 강화하여, 인식을 만들고, 현실에 관여한다. 임신중지를 하는 여성은 불행하더라는 이야기가 여성과 의료 서비스의 간극을 넓혀 불행한 여성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한편으로 이야기는 어떤 삶을 납득하고 받아들여 너그러워질 수 있는 가장 쉬운 경로가 된다. 이런 이야기는 낙인에 맞서 인식을 뒤집고 마찬가지로 현실에 관여한다. 이정연 작가의 소설처럼.

여성의 노동은 세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가장 크면서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의 형식을 띠지 못해왔다. 어색하고, 비현실적이고, 미숙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고 고립된 여성의 이야기만이 현실적이라 평가받는 지금, 이 작품보다 더 말이 되는 이야기는 없다. 
_이민경(《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탈코르셋》 저자)

작가의 말

〈천장이 높은 식당〉을 쓰기 시작한 건 2015년 겨울부터다. 몇 달 뒤 완성하지 않은 소설을 사람들에게 보여줬을 때 나온 반응은 비슷했다. 요즘에도 이런 회사가 있다고? 캐릭터들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너무 수동적인 거 아냐?(물론 초고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그 뒤로 두어 번 더 수정했지만 의견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덜 쓴 원고를 두고 얼마간 고민에 빠졌던 것 같다. 내가 보고 느끼는 세상이 그렇게 고루한가, 표현 능력이 부족해 이것밖에 담아내지 못했나. 당시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것을 그려내는 내 능력까지 확신하지 못했던 것 같다. 덕분에 나는 1년 가까이 매달린 소설을 덮어야 했다. 글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후회와 쓰려고 했던 것을 눈감아버렸다는 자책을 내내 하면서.

그리고 2년 뒤 2018년, 미투와 갑질은 우리 사회의 최대 화두가 되었다. 현실은 내가 애초에 썼던 소설보다 훨씬 잔인했고, 참혹했다. 문화계, 예술계, 일반 기업, 학계 곳곳에서 기다렸다는 듯 터지는 뉴스를 보며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승연과 신유라는 우리 가까이에, 나와 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던 것이었다.
(…)
나는 또 바란다. 몇 년 전 사람들이 말했듯 〈천장이 높은 식당〉 속의 인물과 이야기가 낡고 오래된 것이 되기를. 제인 오스틴의 소설 속 인물처럼 ‘그땐 그랬었지.’라고 지나간 시대를 회상하면서 이 소설이 읽힐 때가 오길 소망한다.

줄거리

남편이 집을 나간 날, 승연은 경력단절 여성들을 위한 취업프로그램 ‘컴백맘’을 통해 국내 최대 화장품 기업 ‘선린’의 구내식당 영양사로 일하게 된다. 식당에 적응하던 어느 날, 승연은 의문의 전화를 받는다. 전화를 건 사람은 전임자인 신유라. 그녀는 자신의 자리를 가로채니 좋으냐며 승연을 비꼰다. 신유라는 본부장에게 성추행을 당한 사실을 회사에 알렸다가 쫓겨난 상태였다. 신유라는 승연이 자신의 자리를 가로챈 이상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회유한다.

그즈음 선린은 자살 사건으로 시끄러워진다. 성추행과 직장 내 괴롭힘으로 괴로워하던 대학생 인턴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전 영양사 건에 이어 계속되는 성추문에 선린은 직원들 입단속을 시키기에 급급하다. 그러나 신유라가 인터넷에 올린 성추행 폭로글이 퍼져나가면서, 선린은 ‘파견직 영양사 성추행 사건’에 대국민 사과를 하기에 이른다. 승연은 신유라가 영양사로 복직할 거란 걸 알아차리고, 게시글을 다시 확인한다. 그리고 성추행 사건의 가해자가 마케팅팀장으로 바뀌어 올라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본문발췌

뺏길 게 없다고 잃을 것도 없는 건 아니에요. 뺏길 게 없는 사람한테 뺏는 건요, 고층 난간으로 사람을 몰아세운 다음 한 발로 버티고 있으라는 것과 다름없어요. 그러다 미끄러져 추락하면 아무 짓도 안 했는데 혼자 실수해서 떨어진 거라고 안타까운 척 연기하면 되니까. 귀찮은 사람 간단히 처리하는 거죠. _83쪽

어쩌면 제자리로 돌리려는 건지 모른다. 승연에게 하는 것처럼 필요에 따라 사람을 정리하는 게 그들의 오랜 방식일지도. 선린의 후속 조치 발표 이후 식당 사람들은 승연과의 거리를 유지했다. 이제는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 재빨리 승연이 없던 과거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아직 그대로네? 식사하러 온 직원들의 의아한 시선을 하루에도 수차례 느끼며 승연은 모르는 척 일을 했다. 왜 그렇게 쳐다보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_134쪽

“여기까지 오게 해서 미안합니다. 계약이 많아져서 움직일 틈이 나야죠. 최저임금이 올라서 이 바닥도 술렁이더니 웬걸요. 휴게시간과 점심시간을 근무시간에서 빼고, 교통비며 식비 같은 일비는 최저임금에 합치니까 결론적으로 달라진 게 없어요. 되레 최저임금이 기준이 돼서 그보다 더 주던 데도 거기에 맞춰 임금을 깎았으니까요. 한국말을 조금 하는 외노자를 찾는 회사도 부쩍 늘었고. 최근에는 무인 기기나 로봇으로 인력을 대체하는 곳도 늘어났으니 앞으로 또 어떻게 될지. 그런 면에서 선린은 양반이에요.” _143~144쪽

본부장이 넣은 돈은 200만 원이었다. 그동안의 대가가 고작 200만 원이라니 승연은 실망감에 수표를 내려다봤다. 어쩌면 본부장이 시키는 다른 일을 해내면 몇백만 원쯤 보너스를 더 받을지 모른다. 그의 말처럼 승연의 위치가 달라질지도 모르고. 그래도 어처구니없이 헐값으로 매겨진 보상에 허탈했다. 그나마도 지호를 돌보미에게 맡기려면 거절하기 힘들었다. 지금도 재희에게 나가는 돈은 승연의 월급으로는 부담이었다. 처음 생각한 건 분명히 돈이 아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정도도 바라면 안 되나 하는 억울한 감정이 꿈틀댔다. _223~224쪽

“어려운 말 아니에요. 영양사님이 식단에서 깻잎김치 같은 위치가 될 수 있다고요. 이게요, 예산이 부족하거나 메뉴가 마땅치 않으면 언제든 찾을 수 있는 음식이잖아요. 가성비 좋고, 먹는 사람도 불평이 별로 없는데 당연히 많이 찾지 않겠어요? 어차피 여기까지 왔는데, 진짜 깻잎김치가 되라는 소리예요. 생각나지도 않는 콩나물무침이나 어묵볶음이 돼서 묻히지 말라고요.” _238쪽

목차
1부 당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_7
2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_71
3부 17층, 천장이 높은 식당 _117
4부 컴백 스페셜 _201
작가의 말 _282

저자 이정연

동국대에서 정보통신공학을, 연세대에서 언론홍보학을 공부했다. 2017년 금호·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단편소설 〈2405 택시〉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2년 동안 회사 생활을 했고, 그 뒤로는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최승우 기자 kantman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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