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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76] 서구 사상과 전통을 융합한 독특한 인도의 아나키즘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76] 서구 사상과 전통을 융합한 독특한 인도의 아나키즘
  • 박홍규
  • 승인 2024.03.18 0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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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간디 3

 

마하트마 간디

간디의 사르보다야는 서양의 아나키즘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어느 것이나 사회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 특히 독재 국가를 자유로운 개인 간의 비정부 협력 형태로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삼는다. 모두 강제력의 법적 도구를 독점한다고 주장하는 현대 국가를 민중이 진정으로 자치권을 실천하는 자유로운 협동조합적 질서의 장애물로 본다.

모두에게 자신의 양심에 순종하는 개인의 의무는 최고의 규범이며, 정치적 순종에 대한 국가의 주장보다 우선한다. 둘 다 사회적 통제와 결속을 유지하는 데 도덕적 권위의 요소를 강조하고 적절한 사회 제도가 주어지면 그것이 정치적, 법적 권위를 완전히 대체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자유롭고 자치하는 개인 사회의 실현과 유지에 필요한 조건에 대한 개념에서 무엇보다도 생산 수단으로서 사유 재산 제도를 폐지하는 점에서도 공통된다. 가족과 마찬가지로 사회에서도 재산은 공동으로 보유해야하며, 각자 자신의 능력에 따라 기부하고 각자 자신의 필요에 따라 받도록 해야 한다. 간디는 이를 신탁, 즉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모든 사유 재산에 대한 완전한 수용이라고 했다.

사유 재산의 폐지는 그것이 야기하는 불평등의 폐지로 이어진다. 또한 모두 개인이 동시에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생각한다. 이는 다른 개인이 수행하는 다양한 유형의 일에 대해 동등한 가치, 도덕적·사회적 및 경제적 가치를 인식해야한다는 것이다. 크로포트킨처럼 간디는 지적 노동과 육체노동의 구분을 폐지하고 손으로 하는 작업의 존엄성을 인정했다. 

수양을 통해 점진적으로 아나키즘의 본질에 다가가는 간디즘

간디와 서양 아나키스트 모두가 강조하는 자유 사회의 또 다른 중요한 조건은 분권화다. 폭정을 피하려면 사회 권력이 널리 분산되어야 한다. 인도에서는 인구의 80%가 여전히 살고 있는 마을이 기본 단위다. 각 마을은 소공화국을 구성하고 간디가 말했듯이 수평으로 다른 마을과 연결된다.

이러한 분산된 정치는 분산된 경제를 의미한다. 대규모 산업과 대도시에 집중하는 것을 피하거나 최소한으로 줄여야한다. 산업은 마을로 가져 와서 마을 또는 마을 그룹이 실질적으로 자급 자족하는 농업·산업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대 기술은 고된 일을 피하고 생산을 늘리는 수단으로 환영된다. 기술은 인간 착취 시스템의 강화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복지를 위해 적용된다.

간디와 서양 아나키스트는 정치적 행동을 비난하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국가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으며 정치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부패한다. 권력에 앉으면 누구나 시야가 좁아져 군대를 유지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려는 두려움과 욕구를 키운다.

의회 민주주의는 투표라는 가짜 장치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여론에 의한 정책을 실시하지 않는다. 다수결은 모든 사람의 복지가 아니라 소수에 대한 다수의 폭정만을 의미할 수 있고, 분열적인 세력이나 사기꾼, 반대자들의 비방, 뇌물 및 위협으로 권력을 추구하는 정당을 포함한다.

간디와 서양 아나키스트 모두 정치적 행동보다 직접적인 행동을 옹호한다. 혁명은 위에서가 아니라 아래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간디는 비폭력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과 함께 때로는 서구 동조자에게조차도 엄청나게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유연성을 결합한다. 이러한 유연성은 아직 성취되지 않은 인간의 마음으로는 절대적 진실을 알 수 없다는 간디의 주장에서 비롯된다. 비폭력은 진실로 가는 길이므로 누구도 완전한 비폭력을 이룰 수 없다.

여기서 간디와 서양 아나키즘은 서로 다르다. 국가 없이 질서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바쿠닌의 주장에 근거하는 아나키즘과 달리 간디는 인간이 지금보다 더 완벽하게 된 후에야 아나키즘적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는 점에서 점진적이고 실용적이다.

따라서 사회가 현재 가능한 최고의 자유로운 정부를 확보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간디가 말하는 건설적인 프로그램의 무소유와 금욕주의를 비롯한 금지 항목은 서양 아나키즘과의 또 다른 차이점이다. 서양 아나키즘의 자유롭고 쉬운 성의 자유는 물론 성적 표현도 간디에게 없다. 

마지막으로, 혁명론에서 간디 아나키즘과 서양 아나키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간디는 혁명을 본질적으로 가치의 재평가로 본다. 혁명의 첫 단계는 개인의 지성과 감정 모두에 호소하여 가능한 한 대량으로 개인을 새로운 관점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톨스토이와 마찬가지로 혁명은 미래 사회의 가치를 살기 위해 시작된 개인의 결과로 발생한다고 본다.

이처럼 간디 혁명론에는 계급이 없는 점에서 서양 아나키즘이나 마르크스주의와 다르고, 이 점에서 서로를 격렬하게 비난하게 된다. 그러나 영국 지배하의 인도에서 마르크스주의보다 간디의 사상이 더 큰 지지를 받았고, 독립 후에도 마찬가지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간디와 대척점에 섰던 무장주의 아나키스트 바갓 싱

그러나 간디에 대한 반대가 없지 않았고, 심지어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은 계층 안에서도 그러했다. 1920년 이전에는 인도의 아나키스트-생디칼리스트와 획기적인 독립 지도자인 바갓 싱(Bhagat Singh)이 보다 명시적인 아나키스트 운동을 대표했다. 싱은 서양 아나키즘과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그러한 태도가 극도로 인기가 없는 나라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무신론자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그는 바쿠닌을 열렬히 연구한 반면 마르크스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자신들의 나라에서 혁명을 일으키는데 성공한” 레닌과 트로츠키의 글에는 관심이 컸다. 따라서 전반적으로 싱은 그러한 용어를 사용할 가치가 있다면 아나키스트-레닌주의자로 기억될 수 있다. 인도 정치의 역사에서 싱은 영국의 지배로부터 인도의 자유를 위해 싸울 대중적인 반식민지 조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간디식 평화주의와 테러리즘 사이에 있는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는 또한 간디가 ‘폭탄 숭배’라고 말한 것의 신도였다. 그것은 해방을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서양의 개념에 기반을 두었다. 이에 대해 인도 혁명가들은 간디의 비폭력 사상도 톨스토이에서 비롯된 서양적 기원이며 따라서 진정한 인도의 것이 아니라고 비판했다. 

싱은 무장투쟁을 초기에는 꺼려했지만 1920년대 중반에 와서는 영국인을 국외로 몰아내기 위해 일반 인도인까지 무장시키는 전략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그는 전국을 여행하며 민병대를 조직하여 그 과정에서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1928년에 조직화된 무장 반란의 전략은 독립을 지지하는 신문 <키르티>(Kirti)에 실린 싱의 기사에서 개인의 순교와 테러 행위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로 바뀌었다. 같은 신문의 다른 호에서 그는 자신이 무신론자인 이유에 관한 유명한 에세이와 아나키즘에 관한 여러 기사를 발표했다. 

아나키스트 기사에서 싱은 ‘보편적인 형제애’라는 전통적인 인도 개념을 ‘무지배자’의 아나키즘 원칙과 동일시하며, 모든 외부 권위로부터 독립을 달성하는 일차적 중요성에 초점을 맞췄다. 싱은 레닌과 트로츠키의 저술에 영향을 받았고 인도 공산당 창당 후 6년을 살았음에도 인도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그의 사상에 대한 아나키스트의 영향 때문이었다. 

전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던 비폭력 영적지도자

간디의 사상은 그의 생존 시부터 리처드 그레그(Richard Gregg)의 『비폭력의 힘』(Power of Non-Violence, 1935)과 같은 책을 통해 서양에서 대중화되었다. 네덜란드의 아나키스트인 바크 드 릭트(Bart de Ligt)는 『폭력의 정복』(The Conquest of Violence, 1937)에서 동료 아나키스트들에게 폭력이 많을수록 덜 혁명적이라고 경고했으며, 간디의 도덕적 비폭력을 생디칼리스트의 비폭력 직접 행동(특히 전국파업)과 연결시켰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신좌파와 핵군축 운동에서 아나르코 평화주의가 전면에 등장했고, 1960년대 말까지 간디의 비폭력 혁명사상이 특히 미국의 민권운동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인권운동의 핵심 사상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타임>지는 1999년 12월 31일자에서 14대 달라이 라마, 레흐 바웬사,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세자르 차베스, 아웅 산 수지, 베니그노 아키노 주니어, 데스몬드 투투, 넬슨 만델라를 간디의 자녀이자 비폭력의 영적 상속자로 선정했다.

간디는 또한 로맹 롤랑과 마르틴 부버를 비롯한 20세기의 많은 사상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최근 기후변화로 인해 환경철학과 기술 철학 분야에서도 간디의 기술관이 중시되고 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했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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