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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존재가 과연 될 수 있을까
‘순수’한 존재가 과연 될 수 있을까
  • 오주리
  • 승인 2024.03.08 1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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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순수의 시: 한국현대시사의 시적 이상에 관한 존재론적 연구』 오주리 지음|국학자료원|536쪽

염결성과 순결성은 시인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
순수 자아·존재에 대한 희구로 어어지는 순수시

‘순수(純粹)’. 새삼 ‘순수’라는 낱말의 뜻을 우리말사전에서 찾아본다. ‘순수’란, 첫째, 전혀 다른 것의 섞임이 없음이라는 뜻과 둘째,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 이러한 ‘순수’라는 낱말을 우리는 사랑한다. ‘순수한 사람’, ‘순수한 사랑’, 그리고 ‘순수한 시절’. 이 모든 ‘순수’가 그립다. 

시인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존재이리라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는 듯하다. 그렇다. 시인이 진실의 언어를 고백하는 자라 믿는다면, 시인은 순수한 존재일 것이다. 염결성(廉潔性)과 순결성(純潔性)은 시인이 시인이도록 하는 필요충분조건이라 믿는다. 

시인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시에 대한 희구는 문학사에서 순수시(純粹詩)에 대한 희구로 나타나기도 했다. 에드거 앨런 포(1809~1849)는 『시적 원리』에서 시를 아름다움이 음악적으로 창조된 언어로 정의했다. 이어서 폴 발레리(1871~1945)는 「순수시」에서 비시적인 것을 모두 제외한 이상적인 시를 순수시라 이름했다. 

순수시에 대한 희구는 시인에게 ‘순수한 나란 존재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순수시를 쓰는 것은 순수 자아를 찾아가는 도정이었다. 그러한 도정 가운데서 에른스트 카시러(1874~1945)는 『언어와 신화』에서 순수 존재로서의 신을 만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헨리 브레몽(1865~1933) 신부는 『기도와 시』에서 순수시를 기도의 경지로 보기도 한다. 

그렇다. 순수시에 대한 희구는 순수 자아에 대한 희구로 그리고 순수 존재에 대한 희구로 이어지고 있었다. 한국현대시사에서 모더니즘 시를 한국적으로 재창조하여 완성의 경지에 이르게 한 두 시인, 김춘수(1922~2004)와 김구용(1922~2001)은 모두 발레리의 애독자였다. 그들은 한국의 현대사 한가운데서 나름대로 발레리의 순수시 시론을 받아들여 자신만의 것으로 재창조했다. 

폴발레리는「순수시」시론을썼다.그는비시적인것 을모두제외한이상적인시를순수시라고불렀다. 사진=위키피디아

폭력으로 점철된 한국현대사를 시가 포용한다는 것은 순수시로만 남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김춘수와 김구용의 시에는 한편으로는 이상적인 시로서의 순수시에 대한 모색이 심층 텍스트에 녹아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현대사의 혈흔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책은 김춘수 시론과 김구용 시론에서의 발레리 시론의 전유 등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뿐만 아니라, 발레리의 스승 격인 스테판 말라르메(1842~1898)의 시와 시론이 김춘수와 김구용의 시 세계에 어떻게 전유됐는지에 대한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밖에도 김현승(1913~1975)은 신이라는 순수 존재를, 김수영(1921~1968)은 자연이라는 순수 근원을, 박재삼(1933~1997)은 진정한 자아라는 순수 자아를, 그리고 최문자(1943~현재)는 원죄 없는 순수 영혼을 찾아 그들의 시세계를 구축해 갔다. 그리하여 『순수의 시: 한국현대시사의 시적 이상에 관한 존재론적 연구(국학자료원, 2023)를 묶어낸다. 

발레리의 고향 세트(Sète)를 찾아가, 홀로 푸르른 지중해가 빛나는 무덤가를 거닐던 시간을 추억한다. 태초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우주가 창조됐던 그 순간처럼, 신의 모상으로 지어진 인간인 순수한 존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순수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진선미성(眞善美聖)을 아우르는 하나의 이상일 뿐일까. 순수의 풍경을 이 세상에 남기고 싶은 마음으로 『순수의 시: 한국현대시사의 시적 이상에 관한 존재론적 연구』를 낸다. 

 

 

 

 

오주리
가톨릭관동대 VERUM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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