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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를 설계하는 융합공학자의 역사관
승리를 설계하는 융합공학자의 역사관
  • 우동현
  • 승인 2024.02.27 08: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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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 『미래의 기원』, 이광형, 인플루엔셜, 2024
우동현 카이스트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1. “역사학이 곧 미래학”

“나는 역사학이 곧 미래학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이 보유한 세계적인 수준의 과학기술 요람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총장 이광형의 신작 『미래의 기원』 (이하 『기원』) 가장 앞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기원』을 관통하는 저자의 핵심 질문은 세상의 작동원리에 관한 것이다. 이에 대한 탐구는, 저자에 따르면, “미래를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게 도와준다(이광형, 『미래의 기원』, 2024).

『기원』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역사학이나 과학기술 서적은 아니다. 하여 평자는 이광형 사상의 기원을 고고학적으로 추적한 뒤 그의 활동을 냉전기 미국에 승리를 가져다준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총장들의 이야기와 함께 대위법적으로 제시하며 『기원』의 위상을 보일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승리를 설계하는 융합공학자의 역사관을 담은 교양서이다.

2. 『기원』의 탄생

“벤처 대부,” “괴짜 교수” 등 저자 이광형에 대한 다양한 수식어는 융합공학자이자 미래학자로서 그가 걸어온 실로 독특한 궤적을 잘 보여준다. 저자는 서울대(1978)와 카이스트의 전신인 한국과학원(1980)을 졸업한 이후, 프랑스 국립응용과학원(INSA) 리옹에서 전산학으로 석·박사학위(국가박사학위는 1987년 취득)를 취득했다. 유럽에서의 생활은 저자에게 미국 일변도가 아닌 다채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다.

저자는 1985년, 박사학위 취득 후 귀국하자마자 한국과학기술대학(1989년 카이스트와 통합) 전산학과 조교수로 부임한 이래 인공지능 연구를 주도하고 LG·포스코 등과 협업하며 산학협력의 여러 모델을 창출했다. 미래산업 정문술 회장에게 500여억 원을 기부받은 이야기나, 총장 취임 2년 만에 현금·토지를 합쳐 1천억 원 이상의 기부금을 유치한 사실은 유명하다. 이 기금은 융합의 중요성을 이른 시기에 간파하고 현실화하려는 저자의 노력을 뒷받침했다. 

저자는 카이스트 최초의 융합학과인 바이오시스템학과(현 바이오및뇌공학과)를 비롯해 한국 최초의 미래학 연구기관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설립을 주도했다. 역사학자인 평자가 세계적으로 드물게 인문학 전공자로서 원자력및양자공학과에 겸임 교수직을 맡을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구상하는 융합적 학문의 한 결과물이다. 이러한 독특한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신 저자와 학과 교수님들께 다시금 깊은 감사를 드린다.

『기원』은 저자가 카이스트 교학부총장을 역임하기 시작한 2019년부터 집필에 들어가 교내외 학인들과의 긴밀한 상호작용 속에서 재구성하고 벼린 138억 년의 긴 역사가 가독성 높은 서술로 담겨 있다. 초고의 적지 않은 부분을 제외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원』의 분량은 550여 쪽에 육박한다. 1부 ‘세상의 시작’은 네 장에 걸쳐 우주의 출현부터 영장류의 출현까지를, 2부 ‘인간의 시대’는 네 장에 걸쳐 유인원부터 21세기까지, 3부 ‘인류의 미래’는 세 장에 걸쳐 기술과 제도의 미래를 다룬다. 

책을 관통하는 중심 테제는 여러 환경적 요인에 대해 인간이 적응하고 대응하면서 인류의 역사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변증법적 운동 속에서 생각·관념의 힘을 강조한다. 『기원』은 우주의 역사에 비춰본 인간 존재의 미미함은 물론, 현재 맹렬히 벌어지는 자본주의 각축전이나 기후변화 같은 지구 차원의 위기가 실제적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생생히 들려준다. 하여 이 책은 현재진행형인 인류의 역사에서 독자 개개인의 위치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유용한 렌즈를 제공한다.

3. 『기원』의 기원

이 책이 지닌 여러 덕목 중 하나는 특정 주제를 다루는 역사학·과학기술 서적이 으레 그렇듯이 사실관계나 공식을 나열하지 않고 서사 형식으로 내용을 전개하는 데 있다. 이 책은 가독성이 대단히 높다. 선구적인 인공지능 과학자인 저자가 오랜 시간 쌓은 교육자로서의 철학을 바탕으로 세상의 원리를 탐구하기 위해 방대한 규모의 독서를 수행하고 그 정수를 정리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30년 넘게 공학자이자 교육자로서 살아온 저자가 『기원』처럼 실로 커다란 질문(big questions)을 던질 수 있던 생애사적 계기는 무엇일까? 저자의 1990년대 초중반 글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이광형은 1990년대 초부터 당시 최첨단 기술인 컴퓨터를 전공하며 기술의 대중화(“컴퓨터 마인드”)에 앞장서 왔다.

정보화 사회라는 미래를 예견하고, “정보를 소유하지 못하고 컴퓨터를 이용할 줄 모르면 식민지나 다름없는 처지로 다시 전락할 수도 있다”고 예측한 부분은 탁월하다. 동시에 “알고 보면 컴퓨터라는 것은 매우 간단한 기계에 불과하고 우리의 매우 충실한 종이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컴퓨터 기술에 겁먹지 말고 “어깨 좀 펴고 살”라고 주문하기도 했다(이광형, 『누가 컴퓨터를 두려워하는가』, 1992; 『포철 같은 컴퓨터 회사를 가진다면』, 1995).

저자가 카이스트 총장으로 부임한 이후 주장한 개념중 하나인 “기정학(技政學)”은 국제관계에 대한 공학자의 탁월한 지적이자 대한민국이 기술 분야에서 선택과 집중을 내려야 한다는 메시지로, 이광형은 이미 1990년대 초에 비슷한 생각을 개진했다(이광형, 『동아일보』, 1994.01.13.).

이러한 생각은 미국과 일본의 과학기술 식민지인 1970년대 한국에서 성장한 그가 유럽에서 1980년대를 보내며 다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데서 나왔다(이광형·안은경, 『달팽이와 TGV』, 1992). 이처럼 『기원』은 저자가 삶에서 던져온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인간 존재의 보잘것없음에 대한 겸허함을 가르치면서도 지구적인 기술 패권 경쟁에서 대한민국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해답을 제시한다.

4. 승리의 기원

평자의 전공 분야인 냉전 과학기술사에는 이광형처럼 승리를 설계한 미국 과학기술자의 존재가 부각 된다. 냉전기 미국 정책가들은 자국의 안보가 과학기술과 군사력에 달려있다고 판단, 연구개발에 실로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다. 한편 1957년 10월, 소련은 최초의 우주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면서 미국을 경악시켰다. 대응에 나선 미국 정부는 대통령과학자문위원회(PSAC)를 설치했다.

PSAC 과학자들은 과학기술과 기초 교육에 대한 예산 증액을 주도했고 1958년, 항공우주국(NASA) 설립과 국방교육법(NDEA) 통과를 성사시켰다. 이제 미국은 우주 및 적(러시아) 연구에 엄청난 규모의 투자를 시작할 터였다. 주오우예 왕의 저작이 잘 보여주듯, MIT의 총장들이 PSAC를 이끌었다. 그들은 1960년대 미국 행정부의 과학기술정책을 자문하면서 부분적핵실험금지조약(PTBT)을 체결시켰고 인류를 달에 착륙시키는 쾌거를 이룩했다.

MIT는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 기관이다. 하지만 역사의 격랑 속에서 MIT를 이끈 총장들이 인문·사회·예술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칼 컴프턴(1930~1948년 재임), 제임스 킬리언(1948~1959년 재임), 제롬 와이즈너(1971~1980년 재임) 등은 총장을 역임하면서 과학기술 중심의 MIT 강의안에 예술과 인문·사회과학을 통합하고 전인적 교육의 기반을 넓히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대공황의 폭풍우가 전 세계를 휘감은 1930년부터 MIT를 이끈 컴프턴의 지휘 아래 인문학부가 출범했고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도 세계적인 연구 성과를 내놓는 기관으로의 도약을 준비했다. 스푸트니크 충격에 빠진 미국 과학기술계를 정비한 킬리언의 재임기에는 MIT에 마침내 인문대학(1950)이 들어섰고, 인문·사회과학 교육과 연구를 단과대 차원에서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케네디·존슨 행정부의 과학기술정책을 총괄하며 인류를 달에 올려놓는 업적을 쌓은 와이즈너는 총장 재임 시절 예술학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1985년 개설되는 MIT 미디어연구실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아울러 1972년, MIT에서 예술 활동 진작에 전념하는 예술협의회가 설립되기도 했다.

미국이 세계 학계를 선도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정부·재단·기업 등 다양한 주체가 제공하는 학문에 대한 막대한 지원을 바탕으로 MIT 같은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융합적인 접근을 적극 장려하고 수행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원』의 가치는 승리를 설계하는 융합공학자가 던지는 메시지로써 읽을 때 더욱 빛이 난다. 책의 곳곳에는 과학기술상의 승리와 그 수성(守成)을 위해 대한민국이 집중해야 할 미래의 기술과 그보다 더 중요한 인간 이해의 절실한 필요성이 녹아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인문학, 그리고 인문학을 통해 길러진 사상을 구현할 수 있는 기술력이다.

역사 속 MIT 총장들의 활동처럼 이광형은 공학과 인문학의 융합을 선구적으로 추진해왔다. 그 결과 수준 높은 연구진을 교원으로 보유한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는 2022년 4월부터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DHCSS)로 명칭을 바꿨고, 이광형 총장은 인문학의 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현재 DHCSS의 진용을 확충하는 데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고 있다.

이와 함께 DHCSS는 대한민국 최초로 디지털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공학학위를 제공하는 석사과정을 개설(2023)했고 조만간 박사과정을 개설해 국내는 물론, 세계의 유관 담론을 선도할 연구 성과를 내놓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저자의 따뜻한 시각을 강조하며 『기원』에 대한 서평을 맺고자 한다. 내년이면 저자는 카이스트의 교육자로 40년을 보내게 된다. 국내외 게임시장과 IT시장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기업을 창업한 고(故) 김정주(넥슨)나 이해진(네이버) 등은 “세계 어디에서도 하지 않는 걸 하게” 주문하는 이광형 교육철학의 대표적인 산물이다.

그리고 그러한 주문의 이면에는 학생들에 대한 깊은 사랑이 배어있다. “학교와 같이 사람을 기르는 곳에서는 그 어떠한 가치 기준보다도 우선하는 것이 사랑이어야 하지 않을까.”(이광형, 『과기원신문』, 1993.12.08) 높은 수준의 기술력과 인문학으로 이룰 승리의 원천에는 다름 아닌 사랑이 자리한 것이다.

우동현 카이스트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UCLA에서 과학기술사(북한-소련 관계사)로 논문을 쓰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국사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The Historical Journal』에 한국인 최초로 논문이 게재됐다. 2023년 8월부터 한국역사연구회에서 디지털역사학연구반을 설립해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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