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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74] 힌두식 아나키즘의 완성자, 간디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74] 힌두식 아나키즘의 완성자, 간디
  • 박홍규
  • 승인 2024.03.04 09:0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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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간디 1
마하트마 간디(1869~1948)

인도에서 아나키즘은 국가 및 사회 해방을 위한 중요한 운동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인도의 아나키즘을 대표하는 사티아그라하 운동은 고대 힌두교 사상에서 나타나는 무국가 사회 개념의 전조에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야 유가(Satya Yuga)로 그것은 본질적으로 사람들이 다르마의 보편적인 자연법에 기초해 스스로를 다스리는 아나키스트 사회를 말한다. 

그러나 무국가 사회가 하나의 가능성으로 여겨지는 동시에 힌두교 정치사상의 많은 부분은 인간의 본질적으로 악한 본성에 초점을 맞추고, 따라서 왕이 인민을 위해 피해로부터 보호를 유지하는 한 통치할 ‘신성한 권리’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그들이 다르마에 기초하여 통치하지 않는다면, “규율이 부족한 왕이 있는 것보다 왕이 없는 것이 낫다”고 봤다. 이것은 결과와 무관하게 왕의 보편적인 신성한 권리를 인정하는 서양의 개념과 큰 대조를 이룬 것이었다. 

그런 인도의 전통을 따른 간디는 여러 번 아나키스트를 자처했고 항상 중앙집권화된 국가와 그것이 초래한 폭력에 반대했다. 1916년 바라나시 힌두대에서의 유명한 연설에서 그는 인도의 폭력적인 혁명가들을 언급하면서 자신이 그런 테러리스트와는 다른 유형의 아나키스트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의 아나키즘은 여러 서구 사상가들의 영향을 크게 받기도 했다. 1893년 톨스토이의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를 읽고 폭력에 대한 무저항 실천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비폭력 직접 행동 기법을 개발했다. 그리고 1907년 남아프리카 감옥에서 읽은 시민 불복종에 관한 소로의 에세이에서 자신의 접근 방식을 확인했다. 또한 러스킨에게서 그는 개인의 선이 모든 사람의 선에 포함되어 있으며 노동의 삶은 살 가치가 있는 삶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는 특히 러스킨의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Unto This Last)에 감동해 그것을 「사르보다야, 만인의 복지」(Sarvodaya,welfare for all)라는 제목으로 번역했다. 또한 크로포트킨의 저서를 읽고 자치 마을 공동체의 분권화된 사회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구체화했다.

아힘사를 위시한 힌두 아나키즘의 전통을 계승하다

그러나 서구의 영향 이상으로 간디의 아나키즘은 인도 철학에 근거한다. 그는 도덕적 규범을 내면화함으로써 인간을 완전하고 자제할 수 있는 신성한 존재로 묘사하는 고대인도 종교 사상의 전통을 재구성하려고 시도했다. 그의 세계관의 중심은 사티아(진실), 카르마요가(관심 없는 행동을 통한 자아실현), 바르나산스다트마(힌두교의 올바른 행동 법칙), 알라힘사(비상해 또는 비폭력)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간디의 가르침에서 가장 혁명적인 측면은 의심할 여지없이 개인의 자아실현의 원칙을 사회윤리의 원칙으로 전환시킨 아힘사의 사회적, 정치적 해석이었다. 그는 또한 마을 생활과 공동 가족·합의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관습에 대한 인도의 전통적 가치를 살려냈다. 그러나 인도의 전통에는 아나키즘과 다른, 아니 아나키즘에 반하는 요소도 많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악한 본성을 갖는다고 하면서 약자를 강하게 잡아먹는 폭력적인 홉스식 정치이론이다.

간디가 자기의 비폭력 사상의 근거로 평생 중시한 인도 고전 『바가바드기타』에 대한 인도인들의 해석에서 주류를 이루는 것은 간디식 비폭력이 아니라 폭력이다. 그래서 고대 인도의 정치사상에는 아나키즘적 요소가 아예 없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한 견해가 옳다고 해도 간디의 주장이 그르다고 할 수는 없다. 적어도 인도에서 아힘사가 개인의 자기실현을 위한 윤리적 원칙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고, 간디는 이를 사회 윤리의 원칙으로 삼고 모든 사회적 관계에 적용했기 때문이다.

개인의 수동적 저항이라는 옛 원칙을 사회적인 항의와 악으로 정의된 제도에 대한 저항의 형태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사티아그라하의 새로운 원칙으로 바꿔 놓은 것처럼 그는 아힘사의 옛 원칙을 새로운 사회비폭력 혁명의 철학으로 바꾸었다. 아힘사가 개인 윤리뿐만 아니라 사회적 윤리의 원칙이라고 본 간디는 고대 힌두교의 성악설을 거부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성선설을 취한 것은 아니고, 인간성은 선과 악의 혼합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확고하게 모든 사람이 선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구원할 수 없는 영혼은 없다”고 믿었으며, 인간의 본성은 정체되지 않는다거나 완전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그는 인간이 영적인 진실에 대한 통찰력을 증가시키면 점차 덜 폭력적이 된다고 믿었다. 

네루(사진 왼쪽)와 간디의 모습이다. 사진=위키백과

진실에 대한 간디의 실험, 비폭력 저항의 정신으로 나아가다

그러나 간디의 아나키즘을 그의 다른 사상과 마찬가지로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간디는 엄청난 양의 글을 썼지만 자신의 경험에 따라 자신의 이론을 항상 바꾸었고, 이를 부끄러워하기커녕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그의 자서전 부제가 ‘진실에 대한 나의 실험’(My Experiments with Truth)임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의 방대한 저술에서 그는 도덕적 또는 정치적 철학의 명확한 체계를 남기지 않았고 오히려 ‘사상과 행동의 실존적 패턴’을 남겼다.

그는 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힘썼기 때문에 그의 글은 주로 몇 가지 기본 주제의 단조로운 반복으로 구성됐다. 간디 평화주의의 주요 동기는 종교적이었지만 남아프리카에서 그는 인도인의 주민등록법에 반대하는 특정한 저항 방법인 사티아그라하를 개발했다. 그것은 구자라트어로 ‘진실의 확고함’을 의미하지만 간디의 손에서 그것은 일종의 비폭력 투쟁이 되었다. 톨스토이는 국가를 훼손하는 방법은 국가와 협력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간디는 강조점을 수동적 저항에서 능동적 비폭력 저항으로 옮겼다.

그는 ‘수동적 저항’을 약자의 무기로 여겼지만, 성난 반항을 의미하는 ‘시민 불복종’도 경계했다. 따라서 그의 전략은 육체의 힘이 아닌 정신의 힘으로 싸우려는 비폭력 저항의 형태였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마라’는 계율에 따라 적에게 해를 끼치거나 미움을 유발하지 않고 적을 무찌르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실제로 그것은 파업의 고전적 생디컬리스트 전술을 포함하지만, 또한 돌격하는 경찰에 대한 반격을 거부하는 것을 수반했다.

비폭력에 대한 그의 모든 약속에도 불구하고 간디는 절대적인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보어 전쟁에서 영국 측의 들것 운반자가 되었고 심지어 영국군에서 신병 하사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는 1차 세계 대전에서도 들것 운반자가 되고자 했다. 겁쟁이보다는 싸우는 쪽이 낫다고 생각한 그는 ‘비겁과 폭력 사이의 선택만이 있을 때 나는 폭력을 권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전통 인도 사회와 세계 사회의 변혁을 아우르다

아나키즘에 대한 간디의 가장 중요한 공헌 중 하나는 수단과 폭력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한 점이다. 그는 이 둘을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즉 수단은 목적으로, 수단은 결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자체 목적을 창출하고, 우리가 올바른 수단에 집중하면 원하는 목적이 자동으로 따라온다고 했다. 다시 말해 마치 우리가 자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 행위자로 지금 여기에서 행동함으로써 우리는 자유 사회를 먼 목표로 보지 않고 실제로 자유 사회를 이룩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의 비폭력 혁명은 권력의 장악이 아니라 일상생활과 관계의 변화를 포함한다. 그의 방법은 점진적이고 단편적이었지만, 간디는 인도에서 영국의 통치를 종식시킬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인도 사회와 궁극적으로 세계사회의 변혁을 추구한 혁명가였다. 그의 장기 목표는 지상에 하나님의 왕국인 Ram Raj를 가져오기 위해 전 세계에 평화와 정의의 영역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1930년대에 불가촉천민의 지위에 집중함으로써 카스트 제도의 더 나쁜 측면을 뿌리 뽑기 위한 캠페인을 심화시켰다. 일부러 하리잔(신의 아이들)이라고 부르고 자기 변기 청소 같은 전통적인 하리잔의 일을 하며 모범을 보였다. 캠페인은 보다 평등하고 협동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그의 깊은 소망을 보여주었다.

그는 ‘후진 부족들’에 대한 봉사와 ‘여성의 고양’을 가져오는 데 관심을 가졌다. 그가 느꼈던 여성들은 지위는 평등했지만 기능은 달랐다. 그는 푸르다(purdah)의 폐지를 요구했고 여성이 남성의 지배에서 해방되면 성적 억제를 실천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바다의 파도가 폭풍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듯이, 국가악은 사회악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질병을 치료하는 유일한 방법은 원인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다.”라는 간디의 말이 인도에서 처음이자 가장 잘 알려진 아나키즘에 대한 표현이다. 

사티아그라하의 원칙은 아힘사에 도달하는 것 

다시 말해, 간디는 폭력을 모든 사회 문제의 근원으로 보고, 국가의 권위는 그 정당한 사용의 독점에 의존하기 때문에 이러한 폭력의 명백한 표현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국민을 가장 적게 다스리는 국가는 완전하고 비폭력적이다. 가장 순수한 아나키 상태에 가장 가까운 접근 방식은 비폭력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일 것이다”라고 했다. 

간디에게 그러한 완전한 비폭력 상태(아힘사)에 도달하는 과정은 사람들을 통치하는 국가를 바꾸는 것보다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자기 통치(스와라지)는 그의 사티아그라하 이론 전반에 걸쳐 실행되는 기본 원칙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해석하는 것처럼 인도 민족 국가의 정치적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 반대였다. 대신, 스와라지는 개인에서 시작하여 마을 수준으로 바깥쪽으로 이동하고 마지막으로 국가 수준으로 바깥쪽으로 이동한다. 기본 원칙은 다른 모든 고려 사항보다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이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했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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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2024-03-09 19:09:19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라’는 계율에 따라 적에게 해를 끼치거나 미움을 유발하지 않고 적을 무찌르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출처 : 교수신문(http://www.kyosu.net) 중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라" 옳은 문장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