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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혼술을 아느냐
너희가 혼술을 아느냐
  • 최승우
  • 승인 2024.02.21 11: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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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언 지음|답|288쪽

10년 동안, 천 번의 혼술을 한 작가, 김도언의 혼술 산문집 출간

도서출판답이 공들여 내놓는 신간, 『너희가 혼술을 아느냐』는 중견 소설가 겸 시인 김도언 작가의 네 번째 산문집으로 그가 직접 준비하고 경험한 ‘혼술’과 음주의 내력을 다양한 에피소드와 함께 매력적이면서도 감성적인 필치로 그려낸 독특한 콘셉트를 가진 책이다. 

2019년 말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한 이후 3년째 확산세가 꺾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적 거리두기의 영향으로 혼밥이나 혼술은 원하든 원치 않든 대중들에겐 하나의 대안 문화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김도언은 이미 10년 전부터 자신이 직접 술상을 차려서 혼술을 해온 문단의 소문난 애주가다. 김도언 작가에 의하면 그는 일주일에 평균 두 번 정도 혼술을 해왔는데, 그것을 10년 동안 일관되게 해왔다고 하니 1년 52주씩 산술적으로 계산해보면 1000번 이상의 혼술상을 차린 것이 된다. 문단에서는 그가 혼술의 달인으로 일찍이 인정받아왔다고 한다.

『너희가 혼술을 아느냐』는 그렇게 오랜 시간 혼술을 탐닉해온 저자가 자신이 혼자 술을 마시면서 성찰한 삶과 일상에 대한 생각, 그가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 시공을 교차하는 에피소드 등을 마치 기품 있는 소설처럼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문체로 풀어놓고 있다. 

보통의 경우 문인들이 펴내는 산문집은 그들이 자신들만의 심미안으로 자잘한 일상 속에서 캐치해낸 것들을 소재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여행이나 수집, 음악, 미술, 산책, 고양이나 반려 동물 등 평소 가지고 있는 취향들이 담기기 쉬운데 술 또는 혼술을 에세이 집필의 중요한 소재로 삼은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술을 중심적인 소재로 삼은 산문집은 아마도 시인 변영로 선생이 1953년 서울신문사에서 『명정40년』이라는 산문집을 펴낸 후 처음이 아닐까 싶다.

『명정40』년이라는 책 제목에서 ‘명정’이라는 단어는 술에 취해서 몽롱하고 황홀해진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라고 한다. 『명정40년』은 그러니까 40년 동안 술에 취했던 삶을 돌아보는 산문집인 셈이다. 이에 반해 김도언의 『너희가 혼술을 아느냐』는 그가 불혹에 들어선 시점부터 10년 동안 자신의 실존적 삶을 혼술과 함께 어떤 문학적 의도를 가지고 깊이 들여다본 시간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너희가 혼술을 아느냐』의 특징은 혼술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는 책답게 목차와 구성 역시 독특하다는 데 있다. 저자 김도언 작가는 자신이 직접 차렸던 술상 위에 올린 메뉴를 각 편의 에세이의 제목으로 삼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책에는 정성스럽게 정리하고 추려낸 이런 에세이가 30편 배열되어 있다. 과연 각 편의 에세이 제목에는 낙지볶음, 두부김치, 소시지야채볶음, 황태구이, 묵은지고등어찜, 제육볶음 같은 대중 독자들에게 친근한 안주 이름이 들어가 있는데, 소설가 김도언은 이 모든 안주를 집에서 직접 만들어서 술상을 차렸다는 것이다.

그날그날 다양한 안주를 올렸던 술상에 대한 소회를 밝히고 술과 얽힌 기억과 감상, 에피소드들을 소개하는 한편 그가 술상에 올린 안주에 쓰인 식재료가 우리나라에 유입된 기원과 내력, 이름의 유래, 영양학적인 정보 등이 설명되어 있고 간단한 레시피가 정리되어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혼술에 대해서 다양한 정의를 시도하는데, 여기에서 중견 작가가 길어올린 문학적 인사이트가 빛난다. 먼저 저자는 혼술을 단지 혼자서 술을 마시는 물리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정서적인 행위로 정의하고 있다. 무슨 말일까? 본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혼자서 술을 마시는 것은 당연히 물리적인 행위를 수반한다. 술병을 들고 술잔에 따르고…, 육체의 물리력이 작동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술을 물리적인 차원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혼술이 가지고 있는 풍성한 비의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한 것이다. 혼술은 물리적인 행동인 동시에 완벽하게 정서적인 행위다. 왜냐하면 혼술을 통해 술을 마시는 이는 자신의 전생애를 상당히 인상적으로 반추하고 성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추하고 성찰하는 힘을 돕고 응원하는 것. 혼술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시는 술과 가장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이와 함께 저자는 진정한 혼술은 술집이나 식당에 들어가서 혼자서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자신이 먹고 마실 술상을 직접 준비해서 마시는 거라고 강조하기도 한다. 본문을 인용한다.  

“혼술과 관련해서 나에겐 지론이 하나 있는데, 혼술은 단순히 혼자 술을 마시는 행위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내가 인정하는 혼술은 술을 마시는 사람이 자신의 술상을 반드시 직접 차려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이 차려준 술을 혼자서 마시는 것을 나는 혼술로 인정할 수 없다는 거다. 진정한 혼술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자기 자신의 수고로움과 노고가 필수적으로 스며 있어야 한다.

거저 주어지는 술상을 탐닉하는 것은 감각적으로 도락을 소비하는 것과 크게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음식을 만들어 올리고 술을 구해서 차린 술상을 음미하는 것은, 자신의 행위와 노동에 대한 자의식의 섬세한 성찰이나 자족이 따라붙는다. 그것이 있을 때 혼술은 깊고 그윽해지는 것이다.”

소설가 김도언에 의하면 혼술이 하나의 신성한 의식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대목이다. 혼술이라는 것이 코로나 시대를 맞이해서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퍼진 것이 사실이지만 과거만 해도 혼자 술을 먹는 행위는 정상적인 행위와는 거리가 멀었저. 어떤 사람들은 누가 혼자 술을 마신다고 하면 비정상적인 사람 취급하거나 심지어는 알코올 중독자로 간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비단 코로나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제는 개인의 사생활이나 권리에 대한 존중이 강조되면서 다른 사람의 삶을 간섭하거나 눈치를 보는 것이 낡은 관습 같은 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만큼 개인주의가 진화하고 성숙해졌다고 볼 수 있는데, 김도언의 혼술 탐닉은 이런 시대적 징후를 상당히 앞서서 선험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김도언 시인 역시 책에서 이와 같은 사회 현상과의 관계 속에서 혼술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찾고 있다. 프롤로그의 일부를 인용해본다.

“10~20년 전만 해도 (지금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혼자서 술을 마시는 행위는 사회적으로 권장될 수 없는, 환영받지 못하는 금기에 가까웠고 심지어는 알코올 중독과 동의어로 여겨지기도 했다. 혼자서 술을 마셨다고 하면 사회성부터 의심되었다.

하지만 지금 혼술은 경쟁의 구도 속에서 갈수록 부박하고 복잡해지는 인간관계와 사회적 책무, 그리고 개인의 자각된 윤리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방전된 사람들이 자신의 주체성을 복원하고 다시 세우는 하나의 솔루션으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나름의 매력적인 독립문화, 대안문화 비슷한 게 되어버렸다.”

소설가 김도언의 혼술 산문집 『너희가 혼술을 아느냐』에는 이밖에도 술을 마시는 동안 시인이 겪은 인상적인 에피소드들이 소개되기도 하는데 언젠가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시를 쓰는 동료들 몇몇과 맛집으로 소문난 망원동의 순대집에 일없이 술추렴이나 하려고 들어갔는데 옆 테이블에 일용노동자처럼 보이는 인부 몇 사람이 들어와서 소주를 시켰고 술이 나오자 식당 주인에게 소주잔을 달라고 하지도 않고 밥을 순대국에 통째로 비운 뒤 그 밥그릇에 소주를 가득 따라 물처럼 벌컥벌컥 마시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그 장면을 보고 저자는 이런 성찰을 하기에 이른다.

“백면서생들처럼 잔을 달라 말라 군소리가 필요 없었다. 나는 그 순간 좀 과장해서 말하면 찌릿한 전율이 일었다. 그들은 술을 의식처럼, 의장처럼 마시는 게 아니었다. 단지 그 순간의 지친 육체가 원했던 술을 바투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어서 빨리 술기운을 온몸에 퍼뜨려 하루 종일 노동으로부터 두들겨 맞은 고통을 잊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니 소꿉장난에나 쓰면 좋을 소주잔이 무에 필요했겠는가. 나는 그날 나의 술잔이 부끄러워서 술이 조금도 달지 않았다. 맛있다고 소문난 순대의 맛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술잔을 비우면 비울수록 오히려 정신이 오롯해졌을 뿐이다. 그러면서 힐끔거리며 저 위대한 지친 사람들이 나누는 술을 동경하듯 훔쳐보았다.”

책 속에서 저자는 혼술을 줄곧 예찬하면서도 혼술이 가지고 있는 고독의 성질을 간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것을 늘 경계하듯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혼술을 즐기되 그것에 중독되거나 지나치게 남용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라고 분명히 주의를 준다. 그러면서 타인과의 연대와 소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함께 말하고 있다. 

“혼술을 제일 좋아하지만 그럼에도 나 역시 다른 애주가처럼 내가 사는 가까운 곳에 마음 편하게 소주를 마실 수 있는 술친구가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내게 "너, 요즘 페북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냐? 남들에게 너무 좋은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쓰지 마."라거나, "너의 생각은 대체적으로 좋은데 아주 치명적인 포인트를 놓치고 있어."라거나, 곧 탈고한 원고를 먼저 읽고 날카롭게 품평하는 등의 질좋은 충고를 편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나 역시 그에게 그럴 수 있는 존재이길 바라고.” 

혼술을 중심 소재로 다루고 있는, 문단의 소문난 애주가 소설가 김도언의 『너희가 혼술을 아느냐』는 당신의 음주라이프를 더욱 건강하게 하고 그러면서 문화적으로도 풍성한 의미를 안겨줄 가이드북이 될 것이다. 

저자 김도언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당선돼 소설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2012년에는 계간 《시인세계》 신인상을 받으며 시인으로 데뷔했다. 펴낸 책으로 소설집 『철제계단이 있는 천변풍경』(자음과모음), 『악취미들』(문학동네), 『랑의 사태』(문학과지성사), 장편소설 『이토록 사소한 멜랑꼴리』(민음사), 『꺼져라 비둘기』(문학과지성사), 경장편 『미치지 않고서야』(중앙북스) 등과 산문집 『불안의 황홀』(멜론), 『나는 울지 않는 소년이었다』(이른아침), 『소설가의 변명』(가쎄), 시집 『권태주의자』(파란), 성인동화집 『코끼리 조련사와의 하룻밤』(문학세계사), 인터뷰집 『세속도시의 시인들』(로고폴리스) 등이 있다. 현재 서울시 은평구에서 헌책방 ‘살롱 도스또옙스끼’를 운영하고 있고 197~80년대 브리티시록을 LP로 들으며 술 마시는 걸 소박한 행복으로 생각한다. 

본문 미리보기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들은 혼자 밥을 먹거나 혼자 산책하는 것, 혼자 잠을 자고, 혼자 술을 마시는 것 등을 다소간 비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른데, 나는 불가피한 고독이 아직 주어지지 않는 연령대의 사람들일수록 사실은 고독이 지극히 실천적인 행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지적으로 고독을 실천하거나 수용한 이들은 실제로 불가피한 고독이 찾아왔을 때도 그 고독을 고통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자연스러운 형태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더 이상 주어진 고통이 아닌 자발적 고독을 즐기는 순간에 우리는 그렇지 않을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하게 삶의 근원을 통찰할 수 있다. 이미 그것을 훌륭히 치러낸 수많은 인류의 선배들이 가르쳐준 것이다. 퇴근시간이 다 되어도 전화벨이 울리지 않고, 주말에도 아무도 나를 불러내지 않을 때, 당신에게는 비로소 고독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것을 굴욕이 아니라 단 한번만이라도 영예라고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지. 그리하여 나는 혼자 산다. 나는 고독하다 뭐 어쩔 건데? 같은 배포를 마음에 품어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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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 내륙 출신인 나는 꼬막 역시 성년이 되어서 대도시에 살면서 먹어볼 수 있었다. 아마도 전라도식 백반집에 갔다가 반찬으로 나온 꼬막무침을 먹은 것이 꼬막과의 첫 만남이었을 텐데, 그 맛이 기막힐 정도로 맛있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런 음식이 있는 걸 모르고 살았던 세월이 아쉬울 정도였달까.

이후 여러 차례 남도를 여행하면서 백반집에 갔는데, 만약에 꼬막무침이 없으면 심히 낙담을 하고 그 백반집을 아주 박하게 평가했고 꼬막무침이 올려지면 그 집 백반을 최고로 쳐주었다. 꼬막에 대한 지극한 편애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서울에 살면서도 틈만 나면 수산시장에 가서 꼬막을 사다가 무침을 해 먹었다. 그런데 웬만한 음식은 자주 먹으면 당연히 물리기 마련인데, 꼬막은 먹어도 먹어도 전혀 물리지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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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솔레르스가 『도전』이라는 소설에서 “자신을 배반하고 부정할 수밖에 없는 청춘은 얼마나 슬픈 것인가”라고 말했던 20대. 모든 사람에게도 있었을 청춘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그때, 나는 맹목적인 열정 하나로 문학에 빠진 채 세상 물정 모르고 현실의 질서를 부정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았던 것 같다.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이라곤 밑줄 쳐진 시집과 언제나 얇고 낡은 한두 장의 지폐뿐이었는데, 희미하고 매캐한 세상 때문에 매일 취하고는 싶어서 친구들과 자취방에서 두부두루치기를 자주 만들어 먹었다. 두부 한두 모 사고 대파와 양파 등을 사면 재료 준비는 끝났으니까.

양푼 그릇에 두부두루치기를 만들고, 자취방 바닥에 술상도 없이 술병과 함께 늘어놓고 소주를 마시면서 나는 얼마나 무모하면서도 치열하게 방황했던가. 세월은 흘러갔지만 그 시절 그 남루한 젊음의 서사는 잊을 수 없고 두부두루치기는 내게 그 청춘을 분명하게 상기시키는 음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두부라는 식재료는, 작가로서 내 영혼의 근육을 만드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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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우 기자 kantman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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